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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H사건 - 여공들, 민주주의의 봄을 부르다

  • 등록일자 : 16/01/19

1. 배고파 못 살겠다, 먹을 것을 달라!

장마도 끝나고,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떠오른 태양이 아침부터 숨통을 턱턱 막히게 하는 8월 초였다. 에어컨도 귀한 시절, 열대야에 잠을 설친 사람들은 흑백텔레비전을 켜는 것으로 무료하고도 지루한 하루를 시작하기 마련이었다. 군사독재 치하의 뉴스란 매일처럼 계속되는 대통령의 산업시찰을 나열하고 그 업적을 찬양하는 게 고작이었다. 그러나 그날 아침의 뉴스는 달랐다.

‘신민당사 농성 여공 전원 연행, 여공 1명 사망’

흑백화면에 떠오른 자막 뒤에는 초라한 작업복 차림의 여성노동자들이 사지를 붙잡힌 채 질질 끌려가 경찰버스에 실리는 모습이 흐르고 있었다. 철저한 언론 통제로 집회나 시위에 대한 보도를 거의 볼 수 없었던 시절이었다. 돌연 텔레비전 화면을 채운, 경찰버스 철창을 부여잡고 울부짖는 나이 어린 여성들의 모습과 사망소식은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정부는 곧바로 언론을 통제해 텔레비전에서 더 이상 여공들의 강제연행 장면을 볼 수 없게 했다. 그러나 소문은 걷잡을 수 없이 번져나갔고 이를 본 국민들을 분노로 끓게 했다. 

‘배고파 못 살겠다, 먹을 것을 달라!’

농성하던 187명의 여성노동자들이 내건 플래카드의 구호였다. 육군 소장 박정희가 구국의 결단이라며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정부 주도의 급속한 산업화를 추진한 지 18년, 전국 곳곳에 수출공단이 조성되고 거대한 제철소와 조선소들이 바닷가를 차지하며 번영의 선진조국을 노래할 때, 바로 그 생산의 주역이던 노동자들이 어떻게 이런 절망적 호소를 하는 지경에 이르렀을까?

2. 기업주의 꿈, 노동자의 꿈

군사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는 민심을 사기 위해 미국과 일본에서 사양화된 섬유, 봉제, 신발, 조선 등 인력집약형 공장들을 대거 유입해 산업화에 나섰다. 이는 산업자본 축적의 밑바탕이 되었다. 하지만, 이에 동원된 노동자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장시간 노동과 가난뿐이었다. 수많은 농민과 그 자녀들이 부자가 되겠다는 꿈을 안고 도시의 공장으로 몰려들었으나 좌절만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날 경찰의 진압과정에서 숨진, 만 21세의 여성노동자 김경숙의 고백이다.

맨 처음엔 커다란 포부와 꿈을 안고 서울로 왔으나 막상 와서 보니 별 것 아니었습니다. 고향에서 생각했던 꿈을 이루기가 어려웠습니다. 서울에 올라와 하청공장에 취직을 했을 때였습니다. 말로만 듣던 철야작업을 두 달 동안이나 밤낮으로 하고 나자 코를 건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 피곤한 나머지 건드렸다하면 코피가 쏟아졌던 것입니다. 저의 몸은 더욱 약해지고 얼굴은 창백해져 갔습니다. 그리고 어떤 회사에서는 삼 개월치 봉급을 받지 못했고 헐벗고 굶주린 나는 오원짜리 풀빵 삼십 원 어치로 추위에 허덕이며 생계를 이어가야 했습니다. 그때마다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자살이라도 해버리자고 마음먹었으나 고향이 그 길을 막곤 했습니다.

최소한의 노동법도 지키지 않는 하청회사를 전전하던 김경숙은 가발을 만드는 YH무역에 취업하면서 다시 희망을 품는다. 한때 수출순위 15위까지 올랐던, 4천여 노동자가 일하는 대기업이었다. 큰 회사에 들어갔으니 이제는 월급도 제대로 받고 저축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것이 모든 노동자들의 소박한 꿈이었다.

현실은 달랐다. 이윤은 자기 돈이고 손해는 노동자에게 전가하는 것이 모든 기업주들의 꿈이었다. 일한 만큼 벌어간다는 명분으로 강요되는 도급제야말로 좋은 수단이었다. 형편없이 낮은 도급단가로 노동을 착취하다가 일감이 줄어들면 그나마 지급하지 않음으로서 업주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제도였다. YH무역은 거의 전 공정을 도급화하여 최대한 노동력을 쥐어짜고, 최소한의 대가만을 지급했다. 건조반의 한 여성노동자는 증언한다.

잘 모르니까 시키는대로 할 수밖에요. 게다가 일거리가 없어서 공치는 날은 한 푼도 못 벌고 밥값만 빚지고 퇴근하는 수도 있었어요. 74년인가 75년인가 공치는 날이 한참 많을 때는 글쎄, 한 달 봉급이 1,575원이었어요. 그런데 그 당시 기숙사 밥값은 3천원이었거든요. 결국 마이너스 봉급을 받은 셈인데 그런 때는 시골에 가서 빚을 얻어와 생활을 했지요.

업주 장용호는 초창기에 벌어들인 막대한 돈을 미국의 백화점에 투자하거나 해운회사를 설립하는 데 흥청망청 써버린다. 이 과정에서 무리하게 자금운영을 하다가 상당한 은행 빚까지 진다. 게다가 1978년 석유파동으로 세계적 공황이 오자 노동자를 5백 명으로 감축해 버리더니 1979년 4월에는 일방적으로 폐업을 선언했다. 

이에 노동조합은 거래은행인 조흥은행과 노동부를 찾아가 장용호가 미국으로 빼돌린 돈을 회수해 공장을 살려달라고 간곡히 호소하는 한편, 자체적으로 공장을 가동했다. 하지만 어떤 은행도, 관리도 그들을 돕지 않았다. 그들은 노동자들의 경영참여를 좌경적인 불순한 의도로 간주하고 오히려 경찰을 동원해 탄압하기에 바빴다. 결국 자치경영 두 달만인 8월 6일, 회사 측은 2차 폐업공고를 붙였고, 길거리에 나앉게 된 여성들은 신민당사 농성이라는 최후의 수단을 선택하게 된 것이다.

3. 야당 총재면 다야?

대부분 20대 초중반인 YH 여성노동자들이 신민당사에 들어간 것은 1979년 8월 9일 아침이었다. 허울 좋은 경제개발에 도취되어 종신대통령을 꿈꾸고 있던 박정희는 즉각 진압명령을 하달했다. 노동자들이 점거에 들어간 직후부터 경찰은 1천여 병력을 동원해 신민당사를 완전 포위하고 작전개시 신호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시시각각 위협이 다가오고 있던 이튿날 밤 11시, 농성장은 울음바다가 되었다. 흥분한 노동자 몇이 어깨 높이의 창틀에 올라가 천장을 잡고 서서 투신하겠다고 울부짖기 시작한 것이다. 

“경찰은 물러가라! 아니면 이대로 다 함께 뛰어내릴 거야!”

수면부족과 허기에 지친 시멘트 바닥의 노동자들도 다 같이 죽자고 통곡했다. 노조집행부는 함께 울면서 호소했다.

“제발 창틀에서 내려와! 살아서 우리 뜻을 전해야지, 죽으면 무슨 소용이 있어?”

신민당 총재 김영삼도 목이 메어 애절하게 달랬다.

“참고 견뎌 문제를 해결해야지,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경찰은 절대 야당 당사에 못 들어 옵니다. 우리를 믿고 내려오시오!”

마침 주차장에 대기하고 있던 20여 대의 경찰버스가 차례로 빠져나가는 게 보였다. 안심한 집행부와 국회의원들은 창틀에 올라간 여성들을 한 사람씩 강제로 끌어내렸다. 흥분을 가라앉힌 노동자들은 국회의원들의 거듭된 약속을 믿고 불을 끄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경찰병력은 오히려 더 증강되고 있었다. 이에 항의하는 과정에서 김영삼 총재가 경찰간부의 뺨을 때리는 일이 벌어졌다. 이는 진압의 좋은 명분이 되었다. 새벽 두 시경, 조용한 신민당사에 요란한 벨소리가 울렸다. 시경국장의 전화였다.

“야! 김총재 바꿔! 총재면 다야?”

시경국장이 거칠게 욕설을 퍼붓더니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동시에 어둡고 고요한 밤거리에 차량의 경적소리가 길게 세 번 울렸다. 101호 진압작전의 신호였다.

작전은 무자비하고도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이 빨갱이년들 다 죽여!”

강당에 뛰어올라간 수백 명의 기동대는 비명을 지르며 울부짖는 여성들을 곤봉으로 두들기고 한 사람에 4명씩 달려들어 사지를 들어 계단으로 끌어내렸다. 여성들의 등과 머리가 계단에 쿵쿵 부딪혔지만 개의치 않았다. 반항하면 그 자리에서 군화발로 걷어차고 짓밟아 기진시켜 질질 끌고 내려갔다.

당황한 일부 여성들은 창문을 주먹으로 깨고 뛰어내리려 했으나 무차별 난타를 당한 채 끌려 나갔다. 깨진 유리병을 주워 동맥을 끊으려던 몇몇 여성들도 집단구타를 당해 거의 기절한 상태로 끌려 내려가 철망 두른 경찰버스에 던져졌다. 여성들은 유리창을 깨고 창틀에 매달려 울부짖었다.

국회의원과 기자들도 무참히 짓밟혔다. 쇠파이프를 든 장발의 사복청년들은 화분과 전화기들을 던지며 국회의원들을 구석에 몰아넣고 차려 자세를 시킨 다음 하나씩 불러 집중 구타했다. 신문기자들도 주먹과 발길질은 물론, 무전기와 곤봉으로 십여 분씩 두들겨 맞았다. 여러 명의 국회의원과 신문기자들이 코뼈가 부러지고 피투성이가 되어 얼굴을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인근 녹십자 병원은 밀려드는 부상자로 응급실이 넘쳐 다른 병원으로 이송해야 할 지경이 되었다. 실로 박정희가 내세운 한국적 민주주의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참담한 시간이었다.

4. 김경숙, 민주주의의 봄을 부르다

김경숙이 발견된 곳은 신민당사 뒷편 지하실 입구 시멘트 바닥이었다. 가냘프게 숨을 쉬던 그녀는 녹십자병원으로 옮겨졌으나 곧 숨지고 말았다. 

전남 광산군에서 빈농의 딸로 태어나 초등학교만 마치고 15살 때부터 공장생활을 하던 그녀는 타고난 이타심과 정의감으로 동료들의 사랑을 받아 20살에 노조대의원이 되면서 세상의 진실에 눈을 떴다. 노동자가 고생하고 못 사는 것이 자신이 게을러서가 아니라 군사정권으로부터 일방적으로 보호받아온 자본가의 전횡 때문임을 안 그녀는 농성과정에서도 누구보다 열심히 싸웠지만 강제해산 과정에서 추락해 끝내 사망했다. 죽기 4일전, 김경숙은 고향의 어머니에게 마지막 편지를 쓴다.

보고 싶은 엄마. 우리들을 버리고 간 사장이나 미국에 살고 있는 장용호처럼 모든 사장들은 자기만 잘 살면 돈 없는 우리들쯤이야 자기들 맘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보지요? 하지만 돈 없는 사람들은 착한 마음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정의롭게 살아야 하고요. 그래야 저 나쁜 사장들과 다를 테니까요.

착한 마음을 지니고 정의롭게 살고자 했던 한 처녀의 소박한 꿈은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는 무책임한 기업주와 분배보다 성장이라는 강박에 사로잡힌 독재자에 의해 무참히 짓밟히고 말았다. 그러나 그녀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다. 나이 어린 여공들에 대한 폭력과 죽음은 독재의 공포에 움츠려 있던 수많은 지식인, 학생, 종교인들에 분노의 용기를 불러일으킨다. 게다가 박정희 정권은 당사를 제공했다는 이유로 신민당 김영삼 총재를 제명함으로서 부산과 마산의 대규모 항의시위를 자초한다. 그리고 이는 정권의 내부분열을 일으켜 대통령이 중앙정보부장의 총에 맞아 죽는 사태로 치닫는다. 박정희 대통령이 죽은 것은 YH사건이 일어난 지 두 달만이었다. 힘없는 여공들의 눈물과 김경숙의 죽음은 18년 군사독재를 종식시키고 민주화의 봄을 부르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참고자료 


1. / YH노동조합,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 엮음/ 형성사/ 1984

2. <김경숙>/ 박영희 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3

3. <불꽃이여 이 어둠을 밝혀라>/ 이태호 저/ 돌베개/ 1984

글 안재성(소설가, 평전작가)
1989년 장편소설 <파업>으로 전태일문학상 수상하며 등단했으며 이후 대표작으로 <사랑의 조건> <황금이삭> <경성트로이카> <연안행> 등의 장편소설과 <이현상평전> <박헌영평전> <이관술> 등의 인물평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