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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무님, 총무님, 우리들의 총무님_ 김한림

1974년 8월 3일, 비상고등군법회의장. 재판정의 문이 열리자 흰 한복을 입은 학생들이 포승줄에 묶인 채 줄지어 나왔다. 방청석을 가득 메운 허름한 옷차림의 사람들이 울음을 터뜨리며 자식들의 이름을 목 놓아 부르기 시작했다.

  “아이고, 철아!”

  “근일아! 근일아!”

통곡하는 방청객들 사이에 한 여인이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미동도 없이 끌려 나온 학생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푸른 죄수복을 입은 여학생 하나가 보였다. 긴 머리를 단정하게 땋아내린 여학생은 한림의 막내딸, 김윤이었다. 감옥에서 몇 달이나 고생했지만 윤은 어머니를 발견하자 환하게 웃었다. 한림도 미소를 지으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해 3월 28일, 서강대 학생이던 윤은 여느 때처럼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베이지색 트렌치코트 차림으로 집을 나서던 윤이 갑자기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몇 발짝 돌아와 배웅하던 한림에게 손을 내밀었다.

  “엄마. 악수.”

  “뜬금없이 악수는 무슨...”

그러면서도 한림은 딸의 손을 맞잡았다. 딸은 어려서부터 심장병을 앓느라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했다. 학교도 못 가고 친구들과 어울리지도 못한 윤은 늘 책을 좋아했다. 덕분에 서강대에 입학했다. 그래도 한림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서강대 근처로 집을 옮긴 것도 윤을 위해서였다. 대학에 입학한 뒤로 다행히 건강이 많이 좋아지긴 했지만 한림은 늘 윤의 건강이 염려되었다. 

  “엄마. 나 다녀올게.”

가볍게 돌아선 윤이 총총 골목길을 달려 나갔다. 문을 닫으려던 한림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왜 악수를 한 것일까? 유신반대 데모라도 하려는 것일까? 1972년 10월 박정희 정권이 유신헌법을 공표한 뒤 세상이 뒤숭숭했다. 박정권은 초헌법적인 긴급조치를 발동하여 국회를 해산하고 정치활동을 금지하는 동시에 전국적인 비상계엄령을 선포한 뒤, 유신헌법을 통과시켰다. 그 뒤로 대학가에선 연일 유신헌법에 반대하는 시위가 끊이지 않는 터였다. 유신반대 데모만 해도 최고 15년 형을 받을 수 있는 시절이었다. 한림은 설령 윤이 데모에 나선다고 해도 이해할 수 있었다. 

유신반대운동이라면 한림이 더 선배였다. 한림은 4·19혁명 후 치러진 선거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된 윤보선의 아내 공덕귀 여사와 가까운 사이였다. 윤보선은 박정희가 주도한 5·16군사 쿠데타로 자리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박정희 정권이 굴욕적인 한일협정을 맺으려 하자 한림은 윤보선을 설득해 한일회담반대투쟁에 동참하게 만들었다.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한림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당시 한일회담반대투쟁의 주도 인물이었던 장준하와 백기완 정도만 한림에 대해 아는 정도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림을 교사려니 생각했다. 한림은 앞에 나서지 않은 채 사람이 필요하면 사람을 구해오고 돈이 필요하면 돈을 구해오는, 말 그대로 민주화운동에 없으면 안 되는 사람이었다. 

우리나라가 반드시 민주화되어야 한다고 믿는 한림이지만 딸 윤만은 다치지 않기를 바랐다. 가급적이면 이 역사의 광풍을 피해 가기 바랐다. 그날, 악수를 하고 집을 나선 윤은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그렇게 헤어진 딸을 몇 달 만에 군사 법정에서 만난 것이다.

학생들의 시위가 예년보다 심해지자 박정희 정권은 1974년 4월 3일, 유신헌법 비판에 대해 최고 15년 형을 내릴 수 있는 이전의 긴급조치와 달리 사형까지 선고할 수 있는 긴급조치 4호를 선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은 4월 3일을 기해 전국적으로 시위를 전개하기로 했고, 미리 이 상황을 파악한 박정권은 학생들을 대대적으로 검거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민청학련사건이었다. 박정권은 학생들이 공산정권 수립을 위해 폭력혁명을 일으킨 것이라 주장했지만 사실 학생들은 유신헌법을 반대하고 민주주의의 회복을 주장했을 뿐이었다. 민청학련이라는 거창한 이름이 붙었지만 사실 학생들은 제대로 된 조직조차 없었다. 그저 시위에 사용할 전단에 아무 명칭이 없으면 이상하니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이라는 이름을 붙이면 어떻겠냐는 아이디어에 따라 붙인 이름일 뿐이었다.

그날 법정에서 민청학련을 배후조종했다는 이유로 인혁당 관계자 8명에게 사형이 선고되었고, 민청학련 관계자인 김지하, 이철 등 학생 7명에게도 사형이 선고되었다. 나머지는 무기, 20년 형, 15년 형이었다. 윤은 여학생이라는 이유로 7년 형을 받았다. 선고가 떨어지자 한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사형선고 받은 다른 학생들 보기가 미안하오. 죽이든 살리든 다 같이 하시오!”

한림의 외침에 법정에 있던 사람들 모두 깜짝 놀랐다. 한림의 말은 자기 자식에게도 사형을 선고하라는 의미였다. 옳고 그름을 따질 겨를도 없이 자식 걱정에 눈물만 쏟던 방청객의 부모들은 내 자식도 같이 죽이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 어리둥절했고, 죄인이 되어 법정에 서 있는 학생들은 자신들의 길이 옳다고 박수를 보내주는 한림의 말에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그들은 외롭기만 한 싸움을 하는 게 아니었다. 세상에는 한림처럼 민주화운동에 앞장선 자신들을 이해하고 격려해주는 사람도 있었다. 윤 역시 그런 한림을 보며, 역시 우리 엄마야, 배시시 웃음을 빼물었다.

민청학련사건으로 203명의 학생들이 구속되자 가족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발만 동동 굴렀다. 자기 자식이 어느 경찰서, 어느 교도소에 있는지도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경찰에서는 누가 잡혀 왔는지도 가족들에게 말해주지 않았다. 게다가 신문에서는 민청학련이 국가전복을 꾀한 반국가단체라 떠들어대고, 가족들은 속이 타들어 갔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자식은 자식이었다. 어디 있는지, 죽었는지 살았는지 생사라도 알아야 했다. 

어느 날, 민청학련사건의 주동자로 사형을 선고받고 나중 유명한 시인이 된 김지하의 어머니가 기독교회관 301호 문을 벌컥 열고 들어섰다. 기장여신도회 사무실이었다. 기장여신도회는 당시로서는 드물게 사회정의나 인권, 민주화에 관심을 가진 여성단체였다.

  “여보시오. 당신들은 무얼 하시오? 죄 없는 우리 아들들이 빨갱이로 몰려 죽게 생겼는데... 제발 우리 좀 도와주시오.”

그날 이후 기장여신도회 사무실은 구속자 가족들의 방이 되었다. 지방에 있는 구속자 가족들은 서울에 오면 가장 먼저 들러 짐을 맡기고, 다른 가족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세상에서는 빨갱이 가족이라 수군거리고 말도 하려 하지 않았지만, 이곳에서만큼은 속 시원하게 대화할 수 있었다. 

구속자 가족들은 차츰 구속된 자식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찾기 시작했다. 민청학련사건이 조작이라는 것을 알리는 게 무엇보다 제일 중요했다.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가족도 있었다. 너무 먼 시골에 살거나 형편이 어려워 그토록 그리운 자식 면회 한 번 못 가는 부모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 모든 자리에 한림이 있었다. 한림은 서울 지리를 잘 모르는 구속자 가족을 교도소까지 직접 안내했다. 개중에는 한글을 몰라 접견서를 작성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걸 대필하는 것도 한림의 몫이었다. 

면회실에서 순서를 기다리는 동안 어머니는 옷고름으로 연신 눈물을 찍어내며 한탄했다.

  “우리 아들이 한 번도 일등을 놓친 적이 없는 우등생이라 난중에 큰일 헐 인재라고 칭찬이 자자했는디... 우리 집안 기둥이 요로크롬 죄인이 되부렀으니 워째야 쓸랑가, 참말로 억장이 무너지요.”

한림은 눈물 젖은 어머니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어머니, 아드님은 죄인이 아닙니다. 나라와 정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영웅입니다.”

그제야 어머니는 눈물을 뚝 그쳤다.

  “그랑께 시방 우리 아들이 바른 말허는 충신이다, 그 말이지라?”

한림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들 중에는 영치금이라는 것도 몰라 빈손으로 오는 경우가 허다했다. 감옥밥은 허술해서 영치금이라도 줘야 뭐라도 사 먹을 수 있고, 두터운 솜옷이라도 넣어줘야 겨울을 그럭저럭 날 수 있었다. 한림은 가난한 부모를 대신해 영치금을 넣어주기도 하고, 솜옷이나 읽을 책을 넣어주기도 했다. 

사형선고를 받고 빨갱이로 몰려 생계가 막막하게 된 인혁당 가족들을 챙기는 것도 한림의 몫이었다. 어머니의 따스한 손길이 필요한 자리에는 어김없이 한림이 있었다.

얼마 뒤 민청학련 관계자 가족들이 정식으로 구속자가족협의회를 만들었다. 당시 한국교회여성연합회 인권위원장이던 공덕귀가 초대 회장을, 연세대 구속학생 김학민의 아버지 김윤식이 부회장직을 맡았다. 한림은 총무였다. 민주화될 때까지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 수많은 사람들이 구속되었고, 구속자 가족들은 자식들을 뒷바라지하고 그 뜻을 널리 알리기 위해 구속자가족협의회를 새로 만들거나 유지했다. 거기서도 한림은 늘 총무였다. 한림은 평생 총무 이상을 해본 적이 없다. 

1963년 한일회담반대투쟁 때부터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한림은 언제나 뒷줄에 서 있었다. 민주화운동을 제법 했다는 사람조차 김한림의 이름을 잘 알지 못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한림은 언제나 총무를 자처했다. 회장으로 나서라는 말에는 한사코 손사래를 쳤다. 한림이 원한 것은 명예나 박수가 아니었다. 한림은 어머니였고, 그 어머니의 손길처럼 세상의 구석구석, 남이 돌아보지 않는 곳을 돌아보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정지아(소설가)
1965년 전남 구례 출생.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박사. 1990년 실천문학에서 장편소설 "빨치산의 딸" 출간. 창비에서 소설집 "행복", "봄빛" 출간. 은행나무에서 소설집 "숲의 대화" 출간. 이효석 문학상, 김유정 문학상 등을 수상하였으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