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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동행_ 이희호
1980년 5월 17일 토요일 밤, 늦은 시간인데 따르릉, 전화벨이 울렸다. 이희호가 전화를 받자 누군가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김대중 선생님 댁이죠?”
이희호가 대답할 사이도 없이 전화 건 사람이 급히 말을 이었다.
“저는 기자입니다. 계엄사가 이화여대에서 대책 회의 중이던 전국 대학생 회장들을 덮쳤습니다. 다들 개머리판에 맞아 피투성이가 된 채로 끌려갔어요. 김대중 선생님도 빨리 피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지금 당장이요. 시간이 없습니다!”
어리둥절한 채 수화기를 내려놓자마자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저는 정보부 직원입니다. 이름을 밝힐 수는 없지만 제 말을 믿어주셔야 합니다. 지금 천지가 개벽했습니다. 김대중 선생님이 위험합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김재규의 총에 죽은 뒤, 헌법정신을 짓밟은 긴급조치가 4년 6개월 만에 사라지고, 남편 김대중의 연금도 226일 만에 풀렸다. 민주주의의 여명이 밝아오는 것 같았다. 감옥과도 같던 동교동 집 대문이 활짝 열리고 경찰이 철수했으며, 매일 수백 명의 방문객이 김대중과 이희호 부부 집으로 밀려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계엄령이 발휘된 상태였고, 연금은 풀렸지만 정치활동이 금지된 상태였으므로 남편은 실질적인 어떤 일도 할 수 없었다.
이희호는 비서를 불러 집 주변을 살펴보게 했다.
“여사님. 이상하네요. 근처 보안등이 다 꺼져 있고, 검은 세단 8대가 집 주변을 에워싸고 있습니다.”
이희호는 곧장 이 상황을 김대중에게 알렸다. 남편은 응접실에서 연신 파이프 담배를 피우며 깊은 고민에 잠겼다. 그렇지 않아도 얼마 전부터 몇몇 지인이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 같으니 미국 대사관으로 피하라는 권고를 받은 터였다.
발소리가 어지럽더니 총을 찬 군인 수십 명이 현관문을 열고 들이닥쳤다. 그들은 다짜고짜 김대중을 향해 총구를 겨눴다. 남편은 총부리에 둘러싸인 채 집을 떠났다. 그날, 민주화운동에 앞장서던 학생 지도부, 종교계 인사들도 모두 잡혀갔다.
며칠 뒤, 마포경찰서에서 나왔다는 경찰들이 이희호와 기사, 집사, 가정부만 남기고 모두 집에서 쫓아냈다. 막내 홍걸의 등하교와 가정부 장보기만 허용되고, 그 외에는 집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갈 수 없었다. 집 주변은 경찰들이 철통같이 에워쌌다. 당연히 신문도 전화도 차단되었다. 이희호는 남편이 어떤 이유로 잡혀간 것인지,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너무 답답했던 이희호는 ‘미국의 소리’ 방송을 틀었다. 결혼 전 미국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귀국한 뒤 이화여대에서 영어강독 강의를 했던 그녀는 영어방송쯤은 얼마든지 들을 수 있었다. 방송을 듣고 난 그녀는 머리를 감싸 쥔 채 기도했다.
“하나님. 핍박받는 광주 사람들과 제 남편을 굽어살펴주옵소서.”
계엄사에 따르면 김대중이 국민을 선동해 광주에서 민중봉기와 국가전복을 꾀했다는 것이었다. 남편은 살아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러나 권력을 잡으려는 전두환의 욕망 때문에 무고한 광주 시민 수백 명이 무고한 목숨을 잃은 것이다.
김대중과 결혼한 이래 평온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결혼을 결심할 때 이희호는 그 사실을 모두 알고 있었다.
김대중과 결혼한 1962년까지 이희호는 YWCA에서 활동한 여성운동가였다. 그녀가 태어난 1922년, 여성의 삶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제대로 교육받지 못하고, 부모의 뜻에 따라 결혼하고, 남편이 첩을 얻어도 인내해야 하는 게 당시 여성들 대부분의 삶이었다. 다행히 그녀는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고, 아들이 더 많은 집의 첫딸이라 귀한 대접을 받고 자랄 수 있었다. 게다가 어머니가 배움에 한이 맺힌 분이라 딸이라도 남자와 똑같이 교육받아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한 덕분에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그녀는 우연히 의사인 큰 오빠가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를 보았다.
“아버지, 계집아이를 전문학교 공부를 시켜서 뭐 하시려고...”
그녀는 계집아이라는 말에 모멸감을 느꼈다. 그때 그녀는 미국 유학까지 꼭 다녀오겠다는 결심을 했고, 스스로와의 약속을 지켰다. 유학을 다녀온 그녀는 이화여대 교수가 될 수 있는 기회를 버리고 YWCA 총무직을 선택했다. 다들 교수가 되라고 조언했지만 그녀는 사람들에게 직접 헌신하고 싶었다.
YWCA에서 그녀는 여성의 인권을 위해 법률상담소를 운영하는 등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여성운동을 펼쳐나갔다. 그러던 터에 느닷없이 아직 국회의원도 되지 못한 데다 박정희 정권의 반대편에 선 정치 지망생, 게다가 늙은 어머니에 아이가 둘이나 딸린 가난한 홀아비 김대중과 결혼을 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가족은 물론 친지, 여성계 선후배들, YWCA 관계자들, 모두가 결사반대했다. 이화여대 스승은 이렇게 말하며 그녀의 결혼을 만류했다.
“너는 부드러운 성격에 강한 책임감으로 좋은 사회운동가가 될 자질을 타고났어. 다들 너에 대한 기대가 얼마나 큰 줄 알아? 김대중 씨와 결혼하면 우리는 여성 지도자로 대성할 재목을 잃게 되는 거야.”
“선생님. 김대중 씨는 제가 도와야 할 사람입니다.”
이희호는 김대중의 비범함을 일찌감치 알아차렸고, 그의 아름다운 꿈이 꿈으로 끝나지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가 꿈을 이뤄나갈 수 있도록 평생 도울 결심이었다. 민주주의를 주장한 김대중은 박 정권에 의해 납치를 당하기도 하고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모두의 생각대로 김대중과 함께 한 세월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이희호는 흔들리지 않았다. 독재정권의 억압과 탄압이 강하면 강할수록 남편의 꿈이 옳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김대중은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상황에서도 절대 자신의 꿈을 버리지 않는 대쪽 같은 사람이었다.
1980년 9월, 김대중은 군사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김대중과 함께 민주화운동에 앞장 섰던 수많은 사람들도 감옥에 갇혔다. 이희호는 남편이 사형선고를 받는 법정에도 나가지 못했다. 경찰들이 지키고 있어 집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갈 수 없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김대중이 내란음모죄로 사형을 선고받았다는 뉴스는 전 세계로 전해졌다. 미국과 유럽 등지의 정치지도자들로부터 응원과 성금이 쏟아졌다. 어느 날, 이희호는 미국 교회여성연합회 총무 도로시 와그너 여사로부터 국제전화를 받았다.
“당신은 외롭지 않다. 미국 교회의 여성들이 당신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 하나님이 당신들을 반드시 지켜주실 것이다.”
정치경력의 대부분이 가택연금, 감옥, 해외망명, 암살위협, 고문 등으로 점철되었던 김대중은 숱한 죽음의 고비를 넘고 긴 인고의 시간을 거쳐 1998년, 마침내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62년부터 그와 함께 한 아내이자 정치적 동지였던 이희호는 영부인이 되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희호를 영부인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그녀는 영부인이기 이전에 뛰어난 여성운동가였고, 김대중의 정치적 동지였다. 그래서 두 사람을 잘 아는 한 지인은 ‘김대중 정권 지분의 40퍼센트는 이 여사의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희호는 김대중이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매일 철학적, 신학적 논쟁거리, 투쟁에 대한 격려를 담은 편지를 보냈을 뿐만 아니라 아무리 힘든 상황에서도 김대중의 행보에 동행했으며 때로는 먼저 힘을 내 격려했다. 그녀는 단순한 아내, 단순한 영부인이 아니라 김대중의 완벽한 정치적 동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