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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결한 영혼, 조영래 변호사
생의 전환점을 가져다준 전태일의 죽음
1970년 11월 13일, 청계천 평화시장 봉제공장에서 일하던 스물두 살의 재단사 전태일이 몸에 석유를 끼얹고 분신자살을 감행했다. 그는 불길 속에서 쉼 없이 외쳐댔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숯처럼 까맣게 된 전태일은 목숨이 꺼져 가는 순간에도 한 손에 근로기준법 책자를 쥐고 있었다. 빈소로 찾아간 조영래는 전태일의 영정 사진을 보며 먹먹한 가슴을 진정시키려 애를 썼다. 전태일의 분신자살은 한국 사회에 노동자의 존엄한 권리문제를 근본적으로 일깨운 일대 사건이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조영래의 삶의 행로에도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1971년 봄, 제13회 사법시험에 합격한 조영래는 사법연수원 생활을 시작하자마자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에 휘말렸다. 그는 장기표와 더불어 이 사건으로 1년 6개월간 감옥 생활을 해야 했다. 형기를 마치고 출옥한 그에게 장기표가 두툼한 노트를 건네주었다.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에게서 받은 전태일이 남긴 일기였다.
“이 결단을 두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망설이고 괴로워했던가? 지금 이 시각 완전에 가까운 결단을 내렸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理想)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전태일이 1970년 8월 9일에 쓴 일기는 자신의 죽음이 암시되어 있었다. 또한 동료 노동자와 끝끝내 함께 하겠다는 의지가 새겨져 있었다. 조영래는 전태일 평전 작업을 시작하던 1974년 4월, 한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민청학련사건의 수배자가 되었다. 장기표와 함께 도망 다녀야 하는 처지가 되었지만 그는 부족한 자료 수집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몰래 이소선 여사를 만나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도피 생활 6년 만인 1976년 초가을, 평전의 초고를 완성했다. 하지만 국내 출판은 엄두도 못 낼 상황이었다. 이 원고는 외국인 신부들의 도움을 입어 현해탄을 건넜다. 1978년 11월, 일본에서 《불이여, 나를 감싸 안아라》라는 제목 아래 ‘어느 한국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라는 부제를 붙인 단행본이 출간되었다. 일본어로 된 전태일 평전이었다.
1983년, 한국의 출판사에서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라는 제목의 책이 출간되었다. 저자 이름 대신 ‘전태일기념관건립위원회’ 엮음으로 된 이 책은 출간 즉시 판매 금지 조치를 당했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읽히는 필독서로 자리 잡았다. 조영래는 이 책의 서두에 “전태일의 몸을 불사른 불꽃은 ‘인간 선언’의 불꽃이었다.”고 썼다. 나아가 “전태일 투쟁은 현실의 질곡 아래 짓눌려 인간다운 삶을 빼앗기고 있었던 모든 민중들, 특히 젊은 노동자들에게 비상한 충격을 주어 빈사상태에 있던 한국 노동운동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고 적었다. 다가올 시대의 변혁을 예언한 서문이었다.
시민공익법률사무소와 망원동수재사건
조영래는 대학원에 진학한 지 12년 만인 1981년 2월 법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사법연수원에도 다시 들어가 2년간의 수습 연수 과정을 마쳤다. 1983년에 변호사가 된 그는 시민들의 아픔에 몸소 귀 기울이자는 취지로 시민공익법률사무소를 열었다. 사무소를 열자 연탄공장 때문에 걸린 진폐증을 호소하는 달동네 주민들이 찾아와 억울함을 호소했다. 조영래는 헌법에 명문화된 환경권을 적용하여 달동네 주민들에게 승소를 안겨주었다. 그는 ‘여성의 스물다섯 살 정년’과 같은 악법을 철폐하는 소송을 진행하는가 하면, 교통사고를 당해 하루아침에 직장에서 쫓겨날 처지에 몰린 전화 교환원의 딱한 처지를 돕는 변론 활동을 벌이는 등 눈 코 뜰 새 없는 나날을 보냈다. 조영래는 수임료가 낮아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형편이 어려운 사람에게는 무료 변론도 서슴지 않았다. 돈 버는 일보다는 그 일이 공익에 적합한가를 먼저 따졌다. 조영래는 이 사무소에 드나드는 가난하고 소외된 서민들의 벗이 되고자 했다. 시민공익법률사무소가 갑자기 바빠지기 시작한 것은 한 해 뒤에 터진 뜻밖의 수재사건 때문이었다.
“하늘이 구멍이 났는가봐. 이러다간 이 일대가 다 잠기게 될 텐데. 큰일이야, 큰일.”
1984년 가을, 서울에 큰 비가 내렸다. 9월 1일부터 집중폭우가 쏟아지자 그전부터 상습 침수 지역이던 망원동 일대가 물바다로 변했다. 현장 상황을 파악하러 망원동에 온 조영래는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엊그제까지 시내버스가 다니던 곳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온 동네가 물속에 잠겨 있었다. 조영래는 물난리가 난 근본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꼼꼼하게 알아보기 시작했다. 현장을 조사하며 수문을 살펴보는 과정에서 배수관로에 문제가 있음을 직감했다. 서점에서 토목학, 수리역학 등 관련 서적을 닥치는 대로 구입해 읽었고 전문가들의 견해에도 귀를 기울였다. 얼마 후, 망원동 수재민들이 시민법률공익사무소에 찾아왔다. 처음에는 수임료 때문에 변호을 맡으려 한다는 오해를 받기도 했었다.
“변호사님, 저희들의 억울한 사정을 좀 들어주십시오.”
5천여 가구 2만여 주민이 벌떼같이 일어나 서울지구 국가배상심의회에 배상 신청서를 제출했다. 조영래는 홍성우, 박원순 등 동료 변호사들과 더불어 변론팀을 구성해 서울시를 상대로 치열하게 맞서 나갔다. 마침내 1990년 7월 24일, 대법원이 서울시의 상고허가 신청을 기각함으로써 사건이 종결되었다. 조영래는 망원동 수재민들을 원고로 하여 5년 10개월간의 법정 공방 끝에 시민들에게 승소의 기쁨을 안겨다주었다. 이 소송은 한국 사법사상 최초의 대규모 집단소송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사건 판결 면에서도 거대한 행정 조직에 맞서 힘없는 시민들이 승리했다는 놀라운 성과와 의의를 지니고 있다.
천인공노할 부천서성고문사건
1986년 6월초, 부천경찰서 지하 조사실에서 입에 담기 조차 힘든 추악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주민등록증을 위조한 너는 불순분자가 틀림없다. 5.3인천 관련자를 불어라!”
“모릅니다.”
“모른다고? 다른 여자애들도 발가벗겨서 책상 위에 올려놓으니 다 불더라. 네년이 얼마나 버티나 보자.”
취조실에서 조사를 받고 있는 사람은 23살의 대학생 권인숙이었다. 서울대 의류학과에 다니다가 학생운동으로 제적당한 뒤, 부천공단의 한 회사에 위장취업 했다가 붙잡혀 온 터였다. 문귀동은 권인숙의 바지를 벗기고 중요 부위를 만지는 등 노골적으로 성추행을 했다. 권인숙은 극도의 불안감과 공포감 속에서 수치심에 떨어야 했다.
공안 당국은 한 해 전인 5월 3일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는 대대적인 시위의 주모자를 잡기 위해 혈안이 된 상태였다. 마침 그때 체포된 권인숙을 상대로 한 건을 올리고자 전대미문의 성고문을 자행하기에 이른 것이다.
“나는 인간이기를 포기했다. 이토록 철저하게 모욕당하다니...”
권인숙은 훗날 수기 《하나의 벽을 넘어서》에서 그날의 고통을 이렇게 묘사했다. 유치장에 있던 동료들은 권인숙이 털어놓은 끔찍한 성고문 사실을 듣고 치를 떨었다. 이 일은 면회를 통해 곧 외부로 알려졌다. 7월 1일, 권인숙을 면담한 변호사가 정법회의 변호사들에게 보고를 했고 신속히 대책위원회가 꾸려졌다. 대책위는 이돈명 홍성우 조준희 황인철 등 네 명을 지휘부로 두고 조영래 이상수 김상철 박원순 등을 실무 변호사로 구성했다. 이튿날인 7월 2일, 조영래는 선배인 홍성우 변호사와 더불어 권인숙을 면담했다.
“문귀동은 저를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았어요.”
권인숙은 수치스러움을 무릅쓰고 진실을 이야기해 주었다. 조영래는 그 용기에 감탄하면서도 민주화운동의 의지를 꺾기 위해 신성해야 할 성마저 고문의 도구로 사용하는 독재정권의 추악함에 들끓는 분노를 느꼈다. 다음날 조영래는 문귀동 경장을 강제추행 혐의로 검찰에 고소했다.
10월 3일 첫 공판이 열렸다. 조영래는 재판 당일 새벽녘까지 심혈을 기울여 썼던 변론요지서를 작성했다.
“권양-우리가 그 이름을 부르기를 삼가지 않으면 안 되게 된 이 사람은 누구인가? 온 국민이 그 이름은 모르는 채, 그 성만으로 알고 있는 이름 없는 유명인사, 얼굴 없는 우상이 되어버린 이 처녀는 누구인가?(중략) 우리의 권양, 온 국민의 가슴속 깊은 곳에 은밀하고 고귀한 희망으로 자리 잡은 우리의 권양은, 즉각 석방되어야 합니다.”
변론요지가 발표되는 동안 법정은 눈물바다가 되었다. 피고인으로 법정에 선 권인숙을 비롯해 변호인과 방청객들도 모두 어깨를 들썩이며 울었다. 1987년 7월 8일, 권인숙이 석방되었지만 문귀동에 대한 심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재판이 지속되는 동안 박종철고문치사사건이 터졌고, 민주화를 열망하는 시위는 날이 갈수록 확산되었다. 이 과정에서 조영래를 비롯한 변호인단의 법정 공방은 더욱 치열해졌다.
1988년 4월 9일 문귀동이 구속되었고, 7월 23일 징역 5년형이 선고되었다. 1990년 1월, 법원은 “국가는 권인숙에게 성고문 사건으로 인한 위자료로 금 4천만원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 사건은 공권력의 추악함을 온 천하에 알림으로써 독재정권에 치명타를 가한 법정 소송의 승리였다. 무엇보다도, 지극한 용기를 내어 새로운 세상을 열어젖힌 한 여성의 진정한 승리이기도 했다. 조영래가 혼신의 힘을 기울여 변론했던 부천서성고문사건은 최루탄이 난무하는 1987년 6월의 거리에서 잊지 못할 빛나는 궤적을 그려주었다.
1990년 가을, 조영래는 폐암 선고를 받고 병석에 누웠다. 마지막 가는 그의 모습을 보기 위해 청계피복노조의 민종덕이 찾아왔다. “이제 평전에 조영래 변호사님 이름을 넣어도 되겠습니까?” 그의 간곡한 말에 조영래는 힘겹게 미소 지었다. 말없는 동의였다. 출판사는 곧 《전태일 평전》이라는 제목을 붙여 개정판 작업에 들어갔다. 그는 끝내 개정 증보판을 못 보고 만 4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조영래는 그가 쓴 《전태일 평전》은 사람들의 뇌리에서 청죽처럼 더욱 푸르게 되살아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