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바로가기주메뉴 바로가기

글자 크기 조절

약자들의 편에 서서 - 조지 오글 목사

미국인 감리교 목사 조지 오글(George E. Ogle, 한국이름 오명걸)은 1954년에 연합감리교회 선교사로 한국에 들어와 20년간 한국 도시산업선교회를 일궈오면서 노동자의 권리와 노동법에 기반한 교육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서울대학교 교수로 재직 당시 조작된 인혁당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은 이들을 위해 싸우다 1974년 12월 14일에 추방당했다.

오글 목사는 한국에 오기 전 워커 프리스트(worker priest, 노동 사제)에 대해 공부하면서 스스로가 그런 사람이 되기로 결심하였다. 그에게는 산업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노동자야말로 예수가 생존하던 시기 예수가 함께 했던 어부나 양치기와 다름없었다. 그리고 한국은 막 도시화와 산업화가 진행되던 시기였다. 그는 1960년도에 공장들이 밀집해 있던 인천으로 파송되었다. 당시 한국 산업노동자의 1/3 정도는 16세에서 25세 사이의 어린 여성들이었다. 1961년에 산업전도위원회를 조직하고 산업선교를 하고자 뜻을 가진 이들에게 먼저 공장으로 들어가 노동을 할 것을 권유했다.

인천에 머물렀던 1960년부터 1965년까지 비록 그는 공장에 노동자로 들어갈 수는 없었지만 공장 노동자들과 그들의 가족들을 대상으로 활동했다. 공장이라는 공동체가 가져다주는 문제인 임금문제와 안전문제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해결할 수는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1960년대 중반부터 그는 하나의 대안으로 노동조합을 만들기 위한 교육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산업선교를 하면서 느낀 점은 노동조합이 잘 돼야 민주주의도 발전한다는 사실이었다.

1969년 삼선개헌 이후 무렵부터 박정희 정권은 노골적으로 노사관계에 개입했으며 중앙정보부의 활동도 심해졌다. 이전 같으면 비교적 자유롭게 공장 출입도 하며 노동자들과 만났지만 점점 분위기가 험악해지고 억압적으로 바뀌어 유신시대로 넘어 오면서 산업선교는 위축되고 활동이 약화되었으며 때에 따라 전면 중단되기도 했다. 그래서 1973년 가을학기부터 다음 해인 1974년까지 서울대 상대에서 노사관계와 노동시장 관련 강의를 했다. 하지만 학생들의 유신반대투쟁과 휴교 등으로 정작 수업은 거의 하지 못했다.

이런 억압적인 사회분위기 속에서 교회가 가난한 사람들 편에 서야한다는 이야기를 한국교회가 아직 하지 못할 때 오글 목사는 말과 행동으로 이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산업선교는 중앙정보부 요원들의 활동과 감언이설에 의해, 적지 않은 보수적인 교회로부터 ‘빨갱이’들의 행동으로 인식되었다. 교회의 지원도 당연히 줄거나 중단되었다. 그가 보기에 한국교회는 여전히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이 크지 않았다. 하지만 1960년대부터 서서히 일기 시작한 가난한 이들에 대한 교회의 관심은 1970년대에 와서 이론화되어 민중신학이 태동하는 밑바탕이 되었다. 거기에 오글 목사가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인천에서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산업선교를 했던 것과 같은 맥락으로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 대한 그의 관심은 자연히 인혁당사건으로 이어졌다. 정부에서 인혁당사건을 공산주의와 연계시켰기 때문에 아무도 그 사건과 사건 관련자들에 대해 언급조차 꺼렸던 게 당시의 살벌했던 분위기였다.

1974년부터 매주 목요일이면 종로5가 기독교회관 2층 강당에서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한 목요기도회가 열렸는데, 인혁당사건을 기도의 제목으로 추가하게 한 이가 바로 오글 목사였다. 그리고 인혁당사건이 조작되었다는 사실을 가장 먼저 폭로한 이도 그였다. 

인혁당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은 우홍선을 민간법정에 설 수 있도록 재심요구를 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그의 부인이 오글 목사에게 간곡히 부탁했다. 그는 “저는 정치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영향력이 없기 때문에 아무 것도 약속드릴 수는 없지만 제가 그 일을 조사는 해 보겠습니다”라고 주저하며 내뱉은 말로 인해 그의 인생이 영원히 바뀌었다고 후일  술회했다. 

1974년 10월의 첫 번째 목요기도회에서 그는 기독교 구속자들 뿐 아니라 유죄판결을 받은 비기독교인 8명에 대해서 말하고 기도했다. 사복경찰들이 사방에 깔려 있었다.

“예수님은 우리들의 형제자매들 중 가장 보잘것없고 약한 자를 통해 우리에게 오십니다. 감옥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가장 혹독한 형을 받은 여덟 사람이 있습니다. 증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들이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우리들 중 가장 약한 자로서 예수의 형제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의 생명과 영혼을 위해 기도해야만 합니다. 그들은 사형을 받을 만한 죄를 짓지 않았을 겁니다.” 

기도회를 마친 다음날 그는 중정 요원들에 의해 집에서 연행되었다. 20시간 동안 남산의 중앙정보부에서 받은 조사의 내용은 첫째, 당신은 공산주의자인가와 둘째, 당신은 공산주의자들을 위해 기도했다. 왜 그랬는지 고백하라는 것이었다.

그 후 오글 목사는 1974년 11월 인혁당 관련자들의 부인 이야기를 <뉴욕타임즈> 기자에게 했다. 그것이 기사화되어 반향이 크자 당황한 당국은 오글 목사를 추방하기로 결정했다. 명동성당에서 열린 인권회복기도회에 가다가 체포된 그는 12월 14일 아침 출입국관리소로 끌려가 공산주의자들을 위해 일했다는 혐의로 조사를 받고 같은 날 자신의 나라인 미국으로 추방당했다. 

경찰이 그를 지프차에 태워 김포공항으로 데려가고 있을 때, 누군가 손을 뻗어 그의 손에 작은 금반지를 쥐어주었다. 그것을 약지에 끼었을 때 그의 눈은 눈물로 가득했다. 우홍선의 부인에게서 온 것이었다. 그때 그녀는 그가 돈도 없고 갈 곳도 없이 일본 또는 미국 어딘가에 버려질지 모른다고 걱정했던 것이다. 그는 우홍선이 아내의 품으로 돌아오면 그녀에게 반지를 돌려주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우홍선은 돌아오지 못했고 반지도 돌려주지 못했다.

20년간 한국에서의 선교생활을 강제 종료당한 그는 비행기 트랩에 오르며 한국말로 “대한민국 만세, 하나님과 함께!”라고 외쳤다. 그를 태운 대한항공 002호기가 태평양 위로 빠져나와 간식이 제공되었을 때, 한 여승무원이 그의 앞에 식판을 놓고는 무릎에 엽서 한 장을 슬며시 떨어뜨리고 아무 말 없이 서둘러 갔다. 그 엽서를 읽었다. 

“오글 목사님, 안녕히 가십시오. 저는 한 젊은이입니다. (제 이름을 쓸 수 없습니다.) 저희 대부분은 목사님께서 저희 나라의 진정한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일하셨다는 것을 압니다. 저희 마음도 목사님과 함께 울고 있습니다. 목사님의 이름은 역사에 남을 것입니다. 상황은 변할 것이며 머지않아 목사님께서는 일을 계속하기 위해 한국으로 초청될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제발 건강하십시오.” 그는 울기 시작했다. 그것이 눈물로 가득 찬 그 긴 하루의 마지막 순간이었다.

이듬해인 1975년 4월, 오글 목사는 그가 강의하던 미국 에모리 신학대학의 도서관에서 인혁당 관련자들의 처형소식을 전해 들었다. 깊은 슬픔과 회한이 밀려왔고 이어서 분노가 뒤따랐다. 지난날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자신에게 조용히 입 다물 것을 요구하면서, 그러면 그와 감옥에 갇힌 이들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했던 말이 생각났다. 혹시 자기 자신 때문에 이들이 처형된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미치자 그는 한동안 몹시 괴로웠다. 그는 미국으로 추방된 뒤에도 인혁당사건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미의회 청문회에 나가 인혁당사건의 진상에 대해 증언했고 미국 전역을 돌며 한국의 인권 실태를 알리는 활동을 이어나갔다.

후일 정권이 바뀌고 그는 한국에 올 수 있었다. 1989년에 책 <기적의 가운데>(The Center for Miracle)를 내려고 한국에 온 그가 한국이 국제화된 이 현실에서 노동자들이 강한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면 다시 독재국가가 될 가능성도 있을 것이며 적어도 재벌에 맞선 힘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노동조합이 알아야 한다고 했던 말은 지금도 여전히 의미있게 들린다.

글  어수갑
독일 유학 시절 동포운동단체인 재유럽민족민주운동협의회 총무부장과 한/독판 월간 <민주조국>/ 편집인 거쳐 귀국 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수석연구원 등 역임. 저서로는 <베를린에서 18년 동안 부치지 못한 편지/휴머니스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