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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 선 어머니들
그날 밤 윤이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더러 외박을 하는 날이 있긴 했지만 아침에 윤이가 청한 악수가 유난히 마음에 걸려 김한림은 간절히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한시바삐 이 독재의 칼바람이 지나가게 해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우리 자식들이 자유를 만끽하며 저희들의 삶을 즐기게 해주십시오.”
둘째 딸 김윤은 선천적으로 심장판막증이 있었다. 1년에 40일을 결석을 할 정도로 병약했고 약을 거르면 안 되는 아이였다. 하지만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윤이는 돌아오지 않았다. 김한림이 딸의 소식을 들은 것은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후였다. 1974년 3월28일 서강대에서 있었던 유신헌법 및 대통령 긴급조치 철폐를 위한 성토대회에서 윤이 선언문을 낭독했다고 한다. 그런데 선언문을 낭독하기도 전에 경찰들이 들이닥쳤고 이후로 윤이를 본 사람이 없다고 했다. 한림이 딸을 찾아 경찰서로 학교로 백방으로 뛰어다니던 4월 3일, 긴급조치 4호가 선포되었다. 박정희 정권은 주요 대학들이 모여 유신과 폭압적인 긴급조치에 저항하기 위해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이하 민청학련)이름으로 민중민족민주선언 성명서를 낸 것을 빌미로 정부를 전복하고 폭력혁명을 일으킬 목적이 있다는 죄를 날조하여 학계 종교계의 인사들을 대대적으로 잡아들였다.
한림은 윤이가 경찰서에 잡혀갔다는 소식을 듣고도 열흘이 지나서야 서대문 교도소에서 윤이를 만날 수 있었다. 면회실에서 사색이 다 된 어머니를 본 윤은 밝게 웃어보였다.
“엄마, 나 괜찮아요. 여학생이라고 고문도 안하고 많이 봐줬어요.”
민청학련 관련자 1천여 명 중에는 여학생이 몇 명 안 되었다.
“약도 못 먹고 몸은 괜찮아?”
“감옥체질인가? 하나도 안 아파요. 방바닥에 깔린 다다미를 우연히 들췄는데 거기서 성경 구절이 적힌 카드가 나왔어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엄마, 나는 이곳에 와서 진정 하느님을 만난 것 같아요. 내 걱정은 하지 말아요.”
“네가 하느님의 옳은 길을 걷는다면 엄마는 무엇이든 받아들일 거야. 엄마 걱정은 하지 마라.”
한림은 딸을 믿었다. 그리고 이미 기독교여전도회 총무로 활동하면서 반민주, 반인권적 상황에 대해 잘 알고 있는 터였다. 그로부터 몇 달 뒤에 있었던 선고공판에서 이철을 비롯해 8명이 사형선고를 받았고, 윤은 데모 한 번 했다는 이유로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 그러자 한복차림으로 단아하게 재판정을 지켜보던 김한림은 소리쳤다.
“사형선고를 받은 다른 학생들 보기 미안하다. 죽이든 살리든 다 같이 하시오!”
정의와 진실이 권력에 의해 처참히 짓밟히는 상황이라면 차라리 내 딸도 같이 죽이라는 한림의 처절한 외침은 사형선고를 받은 8명에게 커다란 위안이 되었다. 너희들이 옳다고 믿고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으니 절대로 절망하지 말고 지지말라는 힘찬 격려의 함성이었다.
긴급조치4호가 발동되면서 대학생들과 민주인사들이 대거 구속되자, 1974년 7월 허병섭 목사의 제안으로 김상근, 이해동을 비롯해 감리교, 예수교장로회, 기독교장로회 젊은 목회자들이 중심이 되어 서울기독교회관에서 ‘구속된 자들과 함께 드리는 목요 정기 기도회’를 열기 시작했다. 가톨릭에서도 구속자와 가족들을 위한 지원을 하며 전진상교육관에서 명동성당 기도회를 열었다. 그러자 구속자 가족들이 모여들기 했고 점차 모임으로 발전하여 구속자가족협의회(구가협)가 탄생했다.
초대회장에는 윤보선 전 대통령의 부인 공덕귀, 총무에 김한림이 선출되었다. 이후 공덕귀는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김지하의 어머니 정금성과 함께 ‘반유신투쟁의 여걸 3총사’로 불리며 박용길, 이희호, 이종옥, 박영숙 등 구속된 재야인사의 부인들과 함께 투쟁의 현장을 누비며 남편이 혹은 자식들이 가는 길에 함께했다.
무엇보다 그들에게 주어진 소중한 임무는 억울하게 구속된 자식들을 눈앞에 두고도 껴안지 못하는 가족들에게 위안이 되고 그 고통을 함께 하는 일이었다. 도시로 자식을 보내놓고 그것이 한없이 자랑스러워 힘든 삶도 거뜬히 이겨낼 수 있었던 시골의 부모님들이 어느 날 갑자기 접한 자식들의 감옥살이는 억장이 무너질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런 가족들에게 자식들이 추구하는 세상이 무엇인지 알려주고 보듬어 주며 손을 잡아주는 것은 더없이 소중한 일이었다. 누구보다 내 자식을 믿으며 살아왔던 부모들은 그렇게 한걸음 한걸음씩 투쟁의 전선에 나서게 되었다.
구속자 가족들은 재판정에 다함께 몰려가 갇혀있는 피고들에게 큰 힘을 주었고, 옥중서신, 성명서, 호소문 등을 치마 속에 넣어가지고 다니며 만나는 사람들에게 마다 전달하였다. 그리고 언론이 권력의 하수인 노릇을 하던 시절에 전국의 교도소 소식과 노동자들의 투쟁 소식 그리고 눈물겨운 이야기 등을 전하며 스스로 언론이 되어갔다. 그리고 자기 자식이 출소를 해도 그 일을 그치지 않고 계속 해나갔다.
1985년 12월 12일, 구가협은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이하 민가협)으로 계승되었다. 1985년은 서울미문화원점거농성사건과 구로동맹파업 등으로 구속된 학생, 청년, 노동자들이 급증한 해였다. 그런 상황에서 구속학생학부모협의회, 구속노동자가족협의회, 청년민주인사가족협의회, 장기수가족협의회 등을 통합하여 민가협을 탄생시킨 것이다.
민가협 운동의 산증인인 임기란 전 상임의장은 막내아들 박신철이 감옥에 들락거리기 전까지는 그저 평범한 어머니였다. 어느 날 귀가하지 않는 아들을 찾아 길거리를 헤매다가 유치장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간 그곳에는 아이들을 찾아 헤매던 많은 어머니들이 있었다. 그이가 인권운동의 대모로 불리며 길 위에 나서게 된 날의 시작이었다.
“우리 아들 재판 때보니까 경찰이 물속에 15번을 집어넣었다고 합디다. 어떤 애들은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가서 전기 고문당하고 구정물 속에 쳐넣어지고, 그런 얘기를 듣고 어떻게 나혼자 따뜻한 방안에 앉아만 있어요?”
박신철은 풀려난 뒤 다시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임기란은 언제 다시 감옥에 갈지 모를 아들 걱정에 민가협을 그만둘 수가 없었다. 더구나 눈물을 흘리며 찾아오는 구속자 어머니들을 차마 외면할 수도 없었다. 현재 민가협의 상임의장을 맡고 있는 조순덕 어머니도 그들 중 한 명이었다. 1996년 학생회장을 하던 아들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수배됐을 당시 아들로부터 ‘탑골공원에서 매주 목요일 2시에 집회를 하니 찾아가 보라’는 쪽지를 받았다. 두려운 마음으로 찾아간 그곳에는 잘못된 정권에 절대로 자식들을 빼앗기지 않겠다는 결기 가득한 어머니들이 모여 있었다. 그 뒤 20년의 세월을 그들과 함께 구속자의 어머니로 양심수의 어머니로 살았다.
민가협 어머니들은 구속자 가족이라는 틀을 넘어서 인권이 침해되는 곳에는 언제든 달려가 앞장서 싸웠다. 집회, 농성, 시위 현장의 맨 앞을 든든하게 지켰고, 시위도중 경찰에 끌려가는 학생들을 구출했다. 교도소에서 인권침해 사건 발생하면 교도소 앞에서 농성을 벌이며 책임자 처벌과 재발 방지를 다짐 받곤 했다. 시국사건 재판 때마다 방청하며 권력의 하수인 노릇을 하는 재판부에 함성으로 질타를 하는 등 투쟁의 전면에 나서며 구속이 되기도 했다.
어머니들은 어느 날 사라진 사랑하는 자식들의 뒤를 쫓아가다 맞닥뜨리게 된 진실을 외면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길에 혼자 서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역사의 다리를 놓는데 작은 힘을 보태게 되었다.
양심수 석방을 외치며 국가보안법 등 민주주의와 인권에 역행하는 대표적인 악법철폐를 위해 부단한 활동을 이어온 민가협은 민간정부 하에서도 인권침해의 사건들이 여전히 이어지자 1993년 9월부터 매주 목요일 ‘양심수 석방과 국가보안법 철폐를 위한 목요집회’를 시작해 현재까지 천회를 훌쩍 넘기며 이어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