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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의 눈물’에 울어버린 구로구청-1987년 구로구청부정투표함사수사건, 그리고 김병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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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제 13대 대통령 선거일이었다.

“말도 마세요. 얼마나 살벌했던지 나중에는 가슴에 붙인 공정감시단 마크까지 다 떼서 호주머니에 넣고 있어야 했을 정도였으니까요. 어떤 사람은 봉고차에 실려 난지도로 보내졌고, 카메라가 박살나기도 했대요.”

공정선거 감시단에서 같이 일하던 후배의 다급한 목소리였다.

“컴퓨터 오퍼레이터 아가씨 한 명이 양심선언을 했다는데 아직 정확한 소식은 모르겠어요.”

“아무튼 빨리 구로구청 쪽으로 오세요! 여긴 지금 부정 투표함 때문에 난리거든요. 경찰이 곧 강제 진입할 거란 소문도 있구요.”

전화를 받고 인철은 한동안 멍하니 서있었다. 이미 선거의 대세는 기울어져 있었다. 지금 와서 무슨 소용이람. 그런다고 저들이 호락호락 넘어가 줄 리가 없지. 그동안 거리에서 직선제 개헌을 외치며 민주화를 위해 싸웠던 나날들이 모두 물거품처럼 허망하게 다가왔다. 그래도 인철은 자기도 모르게 신발을 꿰어차고 밖으로 나왔다. 상황이 궁금하기도 했거니와 패배감에 젖어 마냥 집에만 있을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1987년 12월 16일. 

그날은 제 13대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일이었다. 직선제 개헌을 위한 국민들의 열망과 줄기찬 투쟁의 결과 민정당 후보인 노태우 씨는 지난 6월 29일 전격적으로 이른바 ‘6.29 선언’이라는 것을 했다. 1972년 대통령 박정희가 유신을 선포한 이래 체육관에서 ‘통일주체국민회의’ 라는 허수아비 집단이 모여 얼렁뚱땅 대통령을 뽑는 방식에서 실로 17년 만에 대통령을 내손으로 뽑는 직선제가 채택된 것이었다. 

야당에서는 그동안 민주 진영의 대들보 역할을 했던 김대중 씨와 김영삼 씨가 한 치 양보 없이 출마를 했고, 여당에서는 전두환 현직 대통령과 나란히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노태우 씨가 출마를 하여 건곤일척의 대결을 벌이는 중이었다.

특히 군사정권으로서는 사활이 걸린 싸움이었다. 이 싸움에서 지면 그들은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이었다. 그런 그들과 싸우기 위해 학생과 시민단체들은 선거 부정을 방지하고 공정한 선거가 이뤄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11월 말부터 ‘공정선거감시단’을 꾸려 활동에 들어갔던 것이다. 

그런데 투표가 한참 진행 중인 오전 11시경 이상한 일이 발생하였다. 투표가 끝나야 이동이 가능한 투표함이 구로구청 밖으로 옮겨지는 모습을 한 시민이 발견한 것이다. 그 시민은 주위 사람들에게 부정 투표함이라고 소리쳤고 그 소리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투표함이 실려 있는 봉고차는 과자 상자와 빵 상자로 위장되어 있었고, 그 상자들을 헤집어 보니 문제의 투표함이 나왔다. 그런데다 그런 중요한 이동에 호송 경찰도 없었다.

“부정 선거다!”

“이게 뭐냐? 자유당 시대도 아니고....!”

빵더미 속에 숨긴 부재자 투표함

흥분한 시민들은 오후 1시 30분경 투표 위조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구청 3층에 마련된 선관위 사무실로 몰려갔다. 그곳에서 투표함 1개, 붓 뚜껑 60개, 인주 70개, 정당 대리인 도장, 인주가 묻어 있는 장갑 6켤레, 백지 투표용지 1,500여 매가 발견되었다. 당시 시민들이 이러한 선거 물품이 투표 조작에 사용되었다고 믿었던 근거는 장갑에 묻어 있는 인주가 방금 사용한 듯 선명했기 때문이다.

구로구청 마당은 이미 모여든 시민들로 장날처럼 북적거렸다. 담벽에는 부정선거를 폭로하는 대자보가 하얗게 붙어 있었고, 스피커에서는 요란한 소리가 울려나오고 있었다. 마당 구석에는 군데군데 모닥불이 타고 있었다. 한쪽에는 젊은이들이 각목을 들고 삼엄하게 지키는 속에 문제의 부정투표함이 있었다. 빵더미 속에 숨겨서 옮기려고 했던 부재자 투표함이었다. 

그때였다. 누군가가 단상으로 올라와 마이크를 잡았다.

“도대체 이럴 수가 있습니까? 어떻게,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요? 죽 쑤어서 개 준다는 말이 있지만 이게 말이나 되나요? 악몽 같았던 박정희 전두환 시대 지나, 이제 민주 세상 한번 살아보나 했더니 이게…… 이게…….”

아저씨는 흐느꼈다. 단상 아래에 있던 사람들도 모두 마음속으로 흐느꼈다.

연설이 끝나자 아저씨는 ‘목포의 눈물’을 불렀다. 추운 겨울 들판 지나가는 나그네처럼 너도 울고 나도 울었다.

사실 그이라고 하여 남아 있을 이유는 없었다

밤 열시가 넘어가는 데도 사람들은 계속 몰려들고 있었다. 인철은 공정선거감시단 임시 상황실이 마련되어 있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건물 안에도 밖에서와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그날 공정선거감시단은 ‘선거무효’를 선언하고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낯익은 얼굴 하나가 보였다. 아직 인사는 나누지 못했지만, 훤칠한 키에 안경을 쓴 사내. 1974년 민청학련사건 때 서울대 경제학과 일학년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보통군법회의 재판부를 향해 “영광입니다!”라고 말하며 꾸벅 절을 했다는 그 유명한 민주 투사 김병곤이었다. 경남 밀양 출신의 서글서글한 인상이 금세 호감을 주었다.

김병곤은 이제부터 벌어질 참혹한 상황을 너무나 잘 예감하고 있었다. 그는 특유의 또박또박한 경상도 억양의 말투로 그곳에 모여 있던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여러분, 이제 좀 냉정해져야 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긴 거리를 걸어왔지만 지금부터 더 먼 거리를 걸어가야 할 지 모릅니다. 오늘밤 경찰이 대규모로 공격해 올 거라는 이야기가 들립니다. 많은 희생자가 나올 가능성이 있어요. 그래선 안 됩니다. 민주화를 위한 긴 여정엔 여러분의 힘이 여전히 필요할 것입니다. 꼭 있어야할 분을 제외하고는 모두 피해주시기 바랍니다. 부탁드립니다.” 

그의 긴박한 부탁 아닌 부탁에도 불구하고 수천 명의 사람들은 밤늦도록 구청에 남아 있었다. 사실 그이라고 하여 남아있을 이유는 없었다. 더구나 듣기로는 감옥에서 출소한지 얼마되지 않아 몸 상태도 그리 좋지 않다고 했다.

대한민국 서울 구로구청에서 지옥같은 일이 벌어져

드디어 그날 18일 밤 12시경, 김병곤의 예측대로 경찰의 진압작전이 시작되었다. 4,000여 명의 경찰은 먼저 무자비하게 다연발탄을 발사하여 사람들을 건물 속으로 몰아넣었다. 그러고 나서 밀폐된 공간에다 계속 최루탄을 쏘아대고 쇠파이프를 휘두르며 진입하였다. 한순간에 건물 안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옥상의 기왓장이 튀고, 사람들이 뛰어내렸다. 막 대통령 선거가 끝난 한밤, 대한민국 서울 구로구청에서 지옥 같은 풍경이 벌어졌던 것이다.

당시 학생 신분으로 공정감시단의 일원으로 일하다가 그날 구로구청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던 강미란 씨(87학번)는 훗날 이렇게 증언했다.

“삽시간에 전쟁터로 변해버리던 그 아수라장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저는 마당에서 건물 5층까지 뛰었고 제 등 뒤로 따라붙던 수많은 사람들의 거친 숨소리와 메아리처럼 울리던 백골단의 발소리를 기억합니다. 하얗게 안개처럼 깔리던 최루탄 연기와 옥상에서 기왓장을 뜯어 던지는 소리와 의자를 집어던지는 소리. 비명을 지르며 누군가 떨어지는 소리. 창밖에서 강당 안으로 쏟아지던 지랄탄. 소방호수를 뜯어 우리에게 뿌리며 달려들던 경찰과 질펀하게 무릎까지 찬 구정물속에서 머리를 처박고 줄줄이 끌려가던 많은 사람들 ……, 허리를 발로 차고 등을 방패로 찍으며 퍼붓던 말들. ‘빨갱이년들, 이년들이 더 독해……, 꼭 이런데서 밤새고 말이야……, 이것들 처녀 맞아?…….’ 내지르며 낄낄거리던 그 목소리, 목소리……, 요즘도 가끔 그 목소리가 꿈속을 헤집고 다녀요.

때리고 맞고 쓰러지는 그 몇 시간이 지나고 잠잠해질 무렵 저는 5층 강당 피아노 밑에 숨어 있다가 한 백골단에게 발견됩니다. 외계인같이 생긴 마스크 속에서 반짝 빛나는 눈. 그런데 그는 나를 못 본 척하고 슬며시 등을 돌립니다. 그러나 곧 다른 백골단이 발견합니다. 질질 끌려나와 본보기로 지근지근 밟힙니다. 좀 더 합리적인 방식으로 의혹을 해결할 수도 있었을 텐데, 애초에 합법적인 선거운동을 했더라면 의혹도 없었을 텐데, 불법을 저지르던 사람들이 오히려 시민들을 폭도로 몰아 폭력을 휘두르는 현실. 너무 끔찍했습니다.”

이날 연행된 사람만 1,050명, 그 가운데 구속된 사람이 105명이었다. 인철도 그 중의 한 명이 되었다. 물론 그곳에 남아 끝까지 항쟁을 주도했던 김병곤도 끼어 있었다. 그는 태연 한 척 나머지 사람들을 향해 일부러 미소를 지었지만 백골단의 무자비한 폭행에 여기저기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것이 그의 마지막 길이 될 줄이야.

백골단의 무차별 폭력행사로 심한 구타를 당해 몸이 망가진 채 옥살이를 하던 그는 끝내 불치의 병을 얻어 민주화된 세상을 채 보지 못하고 1990년 12월 6일, 눈을 감았다.

울먹이며 목포의 눈물을 부른 아저씨는 어떻게 되었을까?

지금은 같은 고인이 된 김근태는 생전에 후배인 김병곤을 회고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지금도 어쩌다가 잡지나 신문에서 김병곤의 사진과 마주치게 되면, 나는 상당히 긴장을 하게 됩니다. 흘끔 쳐다보고 딴청을 부리다가 또 쳐다보고, 그러다가 시선을 돌리는 것이지요. 그의 안경 너머 그 시선과 마주치는 것이 정말 고통스럽습니다.” 

그리고 또 말했다.

“그가 용기 있는 사람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지요. 이제는 거의 신비가 되어 있는 ‘사형을 받아서 영광입니다.’라는 말 속에서 지금도 그의 담대함과 용기의 힘찬 꿈틀거림이 느껴질 것만 같습니다. 교도관들의 한결같은 증언에 따르면, 일단 사형 선고를 받으면 그 누구든지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의자에 풀썩 주저앉아 멍한 상태에 빠진다고 합니다. 그리고 많은 경우 픽 하고 옆으로 쓰러지기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김병곤 동지는 그 아득함과 답답함을 딛고 일어서 그렇게 맞서 외쳤던 것입니다. ‘용기’ 이외에 어떤 말로 이것을 지칭할 수 있겠습니까.”

그날 그곳에서 울먹이며 ‘목포의 눈물’을 부른 아저씨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때 초등학생이라던 딸애랑 민주화된 세상을 기뻐하며 행복하게 살고 있을까?

20년이 지난 지금도 인철은 촛불 시위라도 벌어지는 날이면 혹시라도 그 속에 그때 아저씨의 딸이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자기도 모르게 돌아보곤 한다.

김영현(소설가)
1984년 창작과비평사 <깊은 강은 멀리 흐른다>로 등단, 소설집 <깊은 강은 멀리 흐른다>, <해남 가는 길>, <내 마음의 망명정부>, 장편 <풋사랑>, 시집 <겨울 바다>, <남해 엽서>등이 있다. 제23회 한국창작문학상 수상, 실천문학사 편집장 역임, 한신대 명지대 등에서 강의하다가 현재는 양평에서 창작과 공부에만 열중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