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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이 곧 역사다
사료관에 소장되어 있는 사료 중에는 살아생전 리영희 선생이 기증한 사료가 있다. 선생은 ‘개인이 곧 역사’인 경우에 해당하는 삶을 살아온 사람이다. 2007년 봄, 리영희 선생이 전화를 하셔서 기증의사를 밝히면서 절차에 따라 수집작업이 진행되었다. 2008년 초에 선생이 <민주화운동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에 보낼 자신의 몇몇 신상자료를 사료관에 기증했으니 찾아달라고 연락을 하셨다. 조사하는 과정에서 상고이유서를 비롯하여 옥중에서 어머니 영전에 드리는 눈물에 얼룩진 편지 등 귀중한 사료들이 새삼스런 발견으로 다가왔다.
그의 적지 않은 법정자료들은 그대로 한국 민주주의의 수난사를 의미한다. 리영희 선생의 표현에 따르자면 ‘반문화적 권력의 박해’에 대한 확실한 물증이 바로 여기 소개하는 사료들이다.
민주화운동 관련 사료들이 그렇듯이 리영희 선생의 그것이야말로 한 때 이 나라의 권력층과 그들이 만들어 낸 체제에 길들여진 사람들의 편견의 역사이기도 하려니와, 리영희 선생의 파란 많은 사회적 행적의 증언인 셈이다.
리영희 선생에 대해 새삼 소개한다는 것은 객쩍은 일이다. 그는 평생을 언론인과 학자로서 살았다. 사람들은 그를 ‘행동하는 지성’ 또는 한 단어로 뭉뚱그려 ‘자유인’이라 일컫기도 한다. 그러고 보니 <자유인>은 그가 1990년 출간한 책의 제목이기도 하다.
그는 사표 없는 시대의 진정한 스승이었으며, 모두가 숨죽이고 자신의 생존만을 지키기에도 어려운 시대에 그가 쓴 기사 한 줄과 그의 책 원고 한 획 한 획은 그대로 살아있는 사자의 포효였고 한 시대의 우뚝 선 좌표였다.
그가 쓴 많은 책들은 반공법의 법망에 1차적으로 포획되었다.
그는 우리가 친미와 반공으로 세뇌 받고 무장되었을 때, 그리하여 지금은 더 이상 사용하지 않거나 존재하지 않는 이름인 ‘중공’이나 ‘월맹’을 타도해야 할 원수 정도로 생각하고 있을 때 <8억인과의 대화>나 <전환시대의 논리>로 우리 사고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일으키게 했다.
그가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초청으로 독일에 잠시 거주할 때가 57세였다. 당시 하이델베르크의 네카 강변 ‘철학자의 길’이라 불리는 풍광 좋은 그의 거처에 유학생들과 지인들이 찾아와 함께 술도 마시고 여행도 다녔다고 한다. 그에게는 혹 그때가 잠시 다가온 인생에서의 호시절이 아니었을까. 4년 후인 그는 환갑을 앞두고 또다시 구속되는 수모를 겪는다. 한겨레신문 창간기념으로 북한취재단 방북을 기획했다는 이유였다.
필경 그의 사주엔 입옥살(入獄煞)이 단단히 끼었던지, 이미 조선일보 정치부 기자였던 36살인 1964년에 필화사건(내용인즉 ‘유엔총회 남북한 동시 초청안’이란 지극히 사실적인 기사 때문이었다!)으로 구속되는 것을 필두로 그 후 끊임없이 교도소행과 언론사로부터의 강제해직 및 교수직 강제해직을 번갈아 당했다. 1977년엔 그의 책 <전환시대의 논리> <우상과 이성> <8억인과의 대화>로 구속 기소되어 징역형 2년을 선고받는다. 물론 반공법 위반이었다.
독재정권 시절 권력자들이 저지른 현대판 분서갱유에 의해 무수한 책들이 이른바 판금도서목록에 오르는데 박정희 때의 대표적인 판금도서의 제일 앞에 그의 책과 이름이 적혀있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지만, 지식인들은 책을 읽으며 그들이 꿈꾸는 민주주의의 세상과 만난다. 또한 그들은 올바르고 균형 잡힌 지적 인식욕에 늘 목말라했다. 그래서 몰래 숨죽이며 판금된 책을 구해 읽으면서 인식의 지평을 넓혀갔던 것이다. 편견의 장막을 걷어버리는데 그의 글만큼 명확한 근거와 진실만이 가질 수 있는 도도함에 견줄 만한 게 드물던 시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