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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선사 유령노조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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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선사는 서울 성수동에 위치하여 노트와 앨범을 생산 수출하는 기업이었다. 종업원 1,000명이 넘는 큰 기업으로 노동자들에게 하루 13시간씩이나 노동을 시켰지만 점심식사조차 제공하지 않았다. 도시락을 가져간 노동자들은 식사장소가 따로 없어 먼지가 쌓인 작업장 아무 곳에서나 먹어야 했다. 노동자들은 혹독한 노동에 시달렸지만 몸이 아프다고 연차휴가를 사용하거나 여성노동자들이 생리휴가를 쓰는 것은 꿈에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안전시설이 갖추어 지지 않아 작업 중에 손이 잘려나가는 일이 비일비재했고, 유독한 접착제 사용으로 온 몸에 피부병이 만연해도 작업 환경 개선이나 치료는 없었다. 화장실에 가는 것조차 감시를 받아야 했다. 인선사 노동자들은 이런 비인간적인 노동조건과 처우 개선을 위해 노동조합 결성을 감행했다.

1977년 4월 21일, 노동자들은 전국화학노동조합 인선사 지부를 결성하고 박문담을 지부장으로 선출하였다. 다음날 지부장이 노조 인증 필증을 받기 위해 화학노조에 갔다가 이미 1975년 3월 30일자로 인선사 노조가 설립되어 전국출판노조에 가입되어 있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진상을 확인하자 회사 사장 신덕균과 영업과장 안병국, 출판노조 위원장 이병인 이 셋만이 아는 사실이었다. 지부장은 영업과장이었다. 노동자가 모르는 유령노조가 설립되어 상부 조직에 인증까지 받았던 것이었다.

노조원들은 출판노조에 찾아가 노조의 존재를 몰랐으니 조합비도 낸 바가 없고, 회사간부가 지부장이 될 수 없다고 항의했다. 그러나 출판노조는 지금까지 매달 조합비를 받았고, 조합이 잘 운영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으며, 노동자들이 회사와 지부장과 출판노조를 비난하기 위해 왔다고 오히려 덤터기를 씌우며 공장장이 지부장을 하는 조합도 있으니 문제없다는 어처구니없는 말만 늘어놓았다.

회사는 이미 노동자들의 노조 결성 움직임을 알아차리고 있었다. 사전에 작업변경을 지시하여 노조 결성에 참여한 여성노동자를 남성도 힘들어 하는 운반작업에 투입시키기도 했다. 노조 결성에 참여했던 정복영은 운반작업이 너무 힘들어 2일간 결근계를 제출했으나, 회사는 진단서가 없다는 이유로 받아주지 않고 결근 처리한 후 결근 등의 사유로 정복영을 해고했다. 정복영이 부당해고 사실을 노동청 근로감독관에게 진정을 냈으나 오히려 감독관은 회사편을 들었다. 또한 회사측은 박문담에게 두 개의 노조를 인정할 수 없다며 강제로 사표를 내게 하고, 노조 결성에 참여했던 노동자들을 구타 폭행 해고 전출 등의 방법으로 탄압했다. 

4월 29일, 노동자 10여 명은 인선사노동조합수습대책위원회(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기경진을 위원장으로 선출한 후 호소문을 작성하여 노동청 및 관련단체, 언론기관 등에 보냈다. 대책위원회는 유령노조의 해체 등 5개항의 요구조건이 관철될 때까지 끝까지 투쟁하겠다는 결의를 밝히고 계속 활동을 이어갔다.

1977년 5월 출판노조는 인선사지부를 사고지부로 규정하고 지부대의원대회를 열어 조직 정상화라는 명목으로 유령노조를 인선사의 합법적 노조로 인정하는 절차를 밟았다. 노동자들에게 노조가입원서를 돌리며 "유니온샵이니 빠짐없이 쓰라"고 강요해 813매를 거둬 들여 단체협약을 체결했다고 밝혔다. 또한 인선사 해고자 명단을 공개하고 "이들은 반조직행위를 했으니 출판노조 산하 각지부는 이들의 입사를 받지 않도록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대책위원회는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회에 지원요청을 하고 호소문을 작성하여 각계에 배포하는 등 투쟁을 이어가며 갖은 탄압에도 꺽이지 않았다. 출판노조에 대한 비난 여론이 일어나자 출판노조는 새 집행부를 꾸려 책임을 회피하려 했다. 개편된 집행부 역시 새 유령노조를 추인하고 기경진 등 8명을 해고했다. 공화당 노동위원을 맞고 있던 인선사 사장 신덕균은 유령노조사건으로 회사 이미지가 나빠지자 회사이름을 삼고사로 바꾸었다.

이후 사회선교협의회, 가톨릭노동청년회(JOC)등 사회운동 단체가 중심이 되어 해고자복직운동과 삼고사 상품 불매운동, 삼고사 문제 해결을 위한 기도회 개최 등의 투쟁을 이어나가는 가운데 해고자 전원이 복직될 때까지 회사와의 협상이 계속 진행되었다. 협상과정에서 회사는 협상안 실행을 앞두고 약속을 지키지 않고 기만적인 타협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1978년 1월 28일, 해고자측이 회사에 최후통첩을 보내고 본격적인 투쟁을 예고한 가운데 불매운동이 확산 조짐을 보이자, 삼고사는 사건 발생 1년 2개월 만인 부당해고된 노동자 전원을 복직시켰다. 1978년 6월 해고자들이 복직되었으나 노조 쟁취는 끝내 무산되었고, 유령노조는 그대로 유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