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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발족-민주화의 새벽을 연 사제 공동체

1974년 9월 26일, 명동성당에서는 황민성 주교의 집전으로 ‘순교자 찬미 기도회’가 열렸다. 이날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사제단)은 지학순 주교의 석방을 요구하고 유신체제의 철폐를 요구하는 내용의 시국선언을 발표했다.

“민주제도는 정치 질서에 있어서 국가 공동체가 그 본연의 사명을 완수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정치 제도임을 우리는 믿는다. 교회는 이와 같은 인간의 존엄성과 소명, 그의 생존권리, 기본권을 선포하고 일깨우고 수호할 권리와 의무를 가진다. 그러기에 교회는 이 기본권이 짓밟히고 침해당할 때면, 언제 어디서나 피해자나 가해자가 누구이든 그의 편에 서서 그를 대변하면서 유린당한 그의 권리를 회복해주기 위하여, 그를 거슬러 항변하고 저항하고 투쟁할 권리와 의무를 가진다.”

기도회가 끝난 뒤 40여 명의 사제단과 300여 명의 수녀들은 명동 한복판으로 나아가 “민주헌정 회복하라!”고 쓰인 플래카드를 들고 가두시위를 벌였다.

“어? 신부님들이 시위에 나섰네?”

“수녀님들의 행렬 좀 봐. 끝도 없네, 그려.”

이 진기한 장면을 지켜보던 시민들은 혹은 감탄하며, 혹은 눈물을 흘리며 성호를 그었다. 그때, 누군가가 플래카드에 적힌 문구를 외치기 시작했다.

“민주헌정 회복하라!”

그러자, 모여선 시민들이 따라서 외쳤다.

“민주헌정 회복하라!”

시민들의 외침은 우렁찬 함성이 되어 명동 번화가에 가득 울렸다. 어느 사이에 전투경찰들이 명동 거리를 막아선 채 공격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길거리엔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감돌았다. 하지만 사제들은 동요하지 않은 채 수녀들과 더불어 명동파출소까지 행진을 계속했다.

“막아!”

파출소 근처에 진을 치고 있던 전투경찰들 사이에서 지휘관이 날카롭게 외쳤다. 이 명령을 신호삼아 전투경찰들이 우르르 몰려와 신부와 수녀들 사이를 갈라놓았다. 그리고는 강압적으로 시위를 해산시켰다.

“놔라!”

시위를 해산시키는 과정에서 신현봉 신부의 노한 고함 소리가 들렸다. 그가 온몸을 버티며 필사적으로 항거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전투경찰들은 그의 팔을 양쪽에서 꽉 끼고서 닭장차 안으로 거칠게 밀어 넣었다.

이 땅에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이름이 출현하는 순간의 모습은 시작부터 고난으로 점철된 것이었다. 한 시대가 질곡 속에 갇혀 있을 때, 신앙의 힘은 그 어떤 총칼보다 강한 힘을 발휘하곤 한다. 1970년대 초반, 출구조차 보이지 않는 캄캄한 암흑 속에서 가톨릭 사제들이 민주화를 향한 기나긴 여정에 들어선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원주교구장 지학순 주교를 탄압한 박 정권에 대한 거룩한 분노에서부터 비롯되었다.

1972년 가을 유신체제를 출범시킨 박정희는 영구집권을 탄탄히 다지기 위해 1974년 1월 8일 오후 5시를 기해 긴급조치 1호를 발표했다. 이 소식에 흥분한 각 대학의 학생들이 동아리방에 삼삼오오 둘러앉아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 유신헌법에 대한 논의조차 금지한다고?”

“무슨 왕정시대도 아니고, 이게 무슨 억지소리야?”

“이 상황을 방치한다면 앞으로 이 나라의 민주주의는 영영 사라지고 말 거야.”

“지금이야말로 유신반대운동을 전개할 때가 아닌가?”

대학생들은 단순히 구호를 외치는 선에서 그치지 말고 시위를 통해 단결된 힘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이구동성으로 주장했다. 그러던 차에 3월 4일 한신대 학생회가 구국성명을 발표했고, 3월 21일 경북대학 학생들이 〈반독재 민주 구국선언문〉을 채택했다. 3월 28일에는 서강대생들이, 4월 1일에는 연세대생들이 시위를 벌였다. 대학생들의 시위는 이제 막 요원의 불처럼 번져나갈 기세였다.

하지만 학생들의 조직은 말처럼 일사불란하게 갖춰지지 않았고, 행동 통일의 합의 또한 아직 이뤄지지 않았다. 오직 정의를 향한 뜨거운 마음만 앞서 있을 뿐이었다. 이들의 움직임을 면밀히 주시하고 있던 중앙정보부는 학생운동에 쐐기를 박을 무서운 흉계를 꾸미고 있었다.

4월 3일, 유신정권의 폭압성에 저항하는 일부 대학생들이 시위를 벌이며 〈민중 ․ 민족 ․ 민주선언〉이라는 제목의 전단지를 뿌렸다. 전단지에는 유신반대 투쟁의 대오에 모든 학우와 전 시민이 단결하고 궐기해 달라는 간곡한 호소가 적혀 있었다.

“바야흐로 민권 승리의 새날이 밝아오고 있다. 공포와 착취, 결핍과 빈곤에서 허덕이던 민중은 이제 절망과 압제의 쇠사슬을 끊고 또다시 거리로 나섰다.”

1974년 4월 3일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의 이름으로 전단지가 발표된 이후 유신정권은 이를 유신반대투쟁 세력에 철퇴를 가하는 호재로 이용했다. 이때, 민청학련 주모자로 사법 당국에 체포된 김지하는 군법회의에서 대통령 긴급조치 4호 위반,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 선동죄 등의 죄목으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중앙정보부는 실체도 없는 인혁당과 민청학련을 교묘히 짜맞추어 “불온분자들이 국가를 전복하기 위해 암약한 사건”으로 부풀려 어마어마한 용공사건으로 둔갑시켰다.

박 정권은 긴급조치 4호 발령 이후 유신반대 투쟁을 벌이던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잡아갔다. 학생, 종교인, 학계 인사 등 민주주의를 주장하거나 연구했다는 이유만으로 끌려간 사람들의 수가 무려 1,024명에 달했다. 사법 당국은 그들에게 터무니없게도 국가 반란 혐의를 뒤집어씌웠다. 공산 혁명, 무력 혁명을 도모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된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이들 가운데 203명이 국가보안법 위반, 국가내란 예비음모, 긴급조치 위반 혐의가 씌워졌다. 긴급조치 4호는 이들 관련자에게 최고 사형까지 내릴 수 있는 규정을 담고 있어서 민청학련 관련자들 모두가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이 사건은 국내외적으로 커다란 파장을 몰고 왔다. 해외에서는 ‘김지하를 구원하는 국제위원회’가 결성되어 한국 정부를 압박했다. 프랑스의 사르트르와 시몬 보부아르, 미국의 노엄 촘스키, 일본의 존경받는 종교 지도자들 및 저명한 작가와 평론가 등이 서명한 석방 호소문을 발표하면서 국제적인 석방운동을 벌여나갔다.

국내에서는 가톨릭 원주교구의 지학순 주교가 김지하 석방운동에 앞장섰다. 중앙정보부는 이를 기화로 7월 6일 김포공항에서 지학순 주교를 강제 연행해 강도 높은 조사를 한 뒤 7월 10일에 풀어주었다.

1974년 7월 15일, 지학순 주교는 닷새 동안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조사받았던 내용과 연관된 성명을 발표했다.

“가) 현 정부는 부정부패가 많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반대하고, 나) 민주국가에서는 삼권이 분리되어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현 체제는 삼권이 한 사람의 손에 장악되어 있는 체제이기 때문에 반대하고, 다) 1인의 장기집권을 반대하며, 라) 가끔 인간의 기본권에 침해를 당하기 때문에 반대한다.”

이 성명이 발표된 뒤 사법 당국은 지학순 주교에게 주거제한 조치를 내렸다. 7월 23일, 지학순 주교는 이에 굴하지 않고 〈양심선언〉을 발표했다.

“소위 유신헌법이라는 것은 1972년 1월 17일에 민주헌정을 배신적으로 파괴하고 국민의 의도와는 아무런 관계없이 폭력과 공갈과 국민투표라는 사기극에 의하여 조작된 것이기 때문에 무효이고 진리에 반대되는 것이다.”

지학순 주교는 〈양심선언〉의 첫머리에서부터 유신정권을 무효라고 선언했다. 그는 “본인이 위반했다고 기소된 소위 대통령 긴급조치 제1호, 제4호는 우리나라의 오랜 역사상 가장 참혹한 인권 유린의 하나이다.”라며 “유신헌법의 개정을 청원하거나 건의하는 것을 금하는 것 자체가 불법”임을 당당하게 지적했다. 이 강도 높은 비판에 당황한 중앙정보부는 명동성당 미사를 집전하고 나오던 지학순 주교를 체포해 남산 중앙정보부로 끌고 갔다.

주교가 구속당하는 초유의 긴급한 사태에 전 세계 천주교회는 크게 놀랐다. 프랑스와 벨기에 대사는 이 일로 당시 김동조 외무장관을 방문해 지학순 주교와 민청학련 관련자들의 선처를 바란다는 의견을 전달했다.

7월 25일, 주교회의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지학순 주교에 대한 대책이 논의되었고, 주교단의 성명이 발표되었다. 이날 명동성당에서는 벨기에 대사, 프랑스 대사가 참석한 가운데 시국미사가 개최되었다. 8월 6일에는 교황청에서도 공식 견해를 표명하기에 이르렀다.

“이 재판이 공정한 해결에 도달하기를 바란다.”

사태가 이러함에도 한국교회 주교단은 공식 입장을 밝히지 않은 채 머뭇거리고만 있었다. 상황이 답보 상태에 빠져 있을 무렵, 신현봉 신부가 지학순 주교의 석방운동에 맨 먼저 뛰어들었다. 그가 전국을 돌면서 지학순 주교 석방운동에 동참해 달라고 호소하자, 최기식 신부를 비롯한 사제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여기에 함세웅, 김택암, 양홍, 오태순, 안충석, 장덕필 신부 등이 가세하자 단단한 결속력이 생겼다. 그들은 로마 울바노 신학교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사제들이 한 덩어리가 되어 지학순 주교 석방을 위한 시국기도회를 전국 단위로 연달아 개최되자 동조자는 더욱 늘어났다. 인천교구의 김병상 · 황상근 신부, 전주교구의 문정현 신부, 수원교구의 장덕호 신부, 대전교구의 이계창 신부, 부산교구의 송기인 신부, 안동교구의 류강하 · 정호경 신부 등이 가세하면서 사제단의 규모는 더욱 커졌다.

주교회의에서 사제들은 지학순 주교를 구속한 박 정권에 대항하기로 결의했다. 지금껏 미사와 강론에만 치중하던 가톨릭이 지학순 주교의 구속을 계기로 민주화운동의 대의에 동참하게 된 것이다. 이제 가톨릭 내부의 민주화 의지는 아무리 강한 탄압이 와도 물러서지 않을 만큼 강한 열기로 타오르고 있었다.

1974년 8월 9일 비상보통군법회의 검찰부는 지학순 주교에게 민청학련 배후지원 혐의로 징역 15년을 구형했다. 8월 12일 열린 3차 공판에서도 검찰은 지학순 주교에게 같은 형량을 구형하는 등 완강한 모습을 보였다.

1974년 9월 22일, 원주교구와 전국 교구 여러 사제들이 행동을 개시해 나갔다. 사제단은 ‘신구교 합동기도회’를 개최하면서 유신철폐 운동과 민주헌정 회복을 위한 모든 사제들의 일치단결을 외쳤다. 

9월 23일, 원주에서 성직자 세미나가 열렸다. 이 세미나에는 300여 명의 사제들이 참석해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결성에 합의했다. 이튿날, 다시 모인 사제단은 앞으로 인권회복과 민주회복을 위한 기도회를 중단 없이 개최해 나갈 것을 결의한 뒤 가두시위에 나섰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일원이 된 젊은 신부 수백 명은 이날 원주시청까지 거리 행진을 벌였고 시청 로터리에서 시내를 두루 돌며 시위에 나섰다.

1974년 9월 26일, 천주교 박해가 있던 옛 명례방 터 위에 세워진 명동성당에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첫 번째 성명서 격인 ‘제1시국선언’을 발표하고 사제단 발족을 공식화했다. 기도회가 끝난 뒤 사제단과 수녀들은 대대적인 명동시위에 나섰다. 사제단은 이후 사회정의가 곤두박질칠 때마다 시국미사와 거리 시위를 통해 유신정권과의 강고한 싸움을 벌여 나갔다. 자유가 벼랑 끝에 내몰리고 인권이 땅바닥에 내팽개쳐지던 때,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가난하고 억눌린 자들의 편이 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민주주의를 위한 싸움은 비단 유신체제에서뿐만이 아니라 5공 시대에도 변함없이 이어져 암울한 시대를 밝히는 횃불이 되었다. 사제단은 노동자들의 권익 옹호와 통일운동을 아울러 벌여나갔으며, 표현의 자유와 민권 신장을 위해 발 벗고 나섰다. 특히, 1987년 벽두에 벌어진 ‘박종철고문치사사건’의 배후를 밝히면서 6월항쟁을 승리로 이끄는 견인차 역할을 담당했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군사독재와 맞서 의로운 싸움을 수행하면서 우리 사회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훌륭히 해냈다. 독한 최루탄 가스가 난무해도 끄떡 않고 민중들을 감싸안듯 굳건히 서 있던 명동성당과 더불어, 사제단의 활약은 5공 정권을 끝끝내 물리친 민주화의 상징으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글 박선욱(시인, 평전작가)
1959년 나주 출생. 1982년 시 〈누이야〉외 3편으로 제1회 실천문학상을 수상하며 등단했으며 이후 대표작으로 《그때 이후》《다시 불러보는 벗들》《세상의 출구》 등의 시집과 《채광석 평전》《윤이상 평전》《김대중 평전》《황병기 평전》 등의 인물평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