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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권 독립 선언 또는 사법파동
<사법권 독립 선언서>
1971.7.28. 제1차 사법파동 당시 내가 쓴 <사법부의 독립을 침해하는 사례>
7.30. 대법원장 면담 시 이 문서에 따라 말씀 드리고 건의.
후일 <사법권 독립 선언서>로 불리게 되었다.
이 문서로 인해 1973.3.23. 유신헌법에 의한 법관 재임명에서 탈락 해직판사가 되었다.
내 인생의 운명을 확 갈라버린 종이 두 쪽이다.
“대법원장을 면담하러 가는 데, 면담에 참석하는 판사들이 어떤 내용을 이야기할 지 아무도 준비를 안 한거야. 그래서 선친께서 당시 서울형사지방법원 용지에 '사법부의 독립을 침해하는 사례'라는 제하의 두 쪽 분량의 건의서를 작성하여 대법원장에게 제출했지. 이 건의문 전문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나중에 '사법권 독립 선언서'라고 불린거야.” (고 최영도 변호사의 유족이 전해주는 사법권 독립 선언서의 내력)
사법파동이란 1971년 7월과 8월에 걸친 현직 부장판사 등에 대한 검찰의 영장신청, 이에 반발한 판사들의 집단사표와 검찰의 사법권 침해에 대한 폭로, 그리고 대법원 판사들을 포함한 독립선언 등 연이어 발생한 일련의 사건들을 총칭하는 것이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한국민주화운동사1, 584쪽)
배경: 1970년 국정감사에서 ‘사법부가 세속화되었다“라는 지적에 자극을 받아 1971년 초부터 권력과 청탁을 배제하는 자체 정화운동을 추진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였으나, 검찰로 대표되는 권위주의 정권은 사법부의 독립성을 지키려는 법관들의 노력을 무시하고 사법부를 권력의 하수인으로 이용하려고 하였다.
발단: 1971년 7월 28일 서울지검 공안부가 출장체재비 수뢰 혐의로 서울형사지방법원 판사 두 명에 대하여 구속영장을 신청한데서 비롯되어, 서울형사지방법원 소속 판사 42명 중 37명이 영장신청을 공안사건 무죄판결에 대한 보복조치라고 보고 “이러한 분위기에서는 공정한 재판을 할 수 없다”며 집단사표를 제출하였다.
전개: 대법원장이 사태수습에 나섰고 검찰이 영장신청을 보류하면서 수습되는 듯 보였으나, 서울민사지방법원 판사들이 7월 30일 전격적으로 집단사표를 제출하면서 더욱 심각한 양상으로 진행되었다. 판사들의 동조 사표 제출은 서울가정법원, 대구지법, 청주지법 등으로 확대되었고, 부산, 대구지법 등 대도시 판사들도 동조 움직임을 보였다. 대한변호사협회는 사법권 옹호운동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7월 31일 현재 사표를 낸 판사는 모두 100명인데 이는 전체 법관(415명)의 4분의 1에 달하였다.
결말: 당시 대통령 박정희가 검찰에 판사독직사건을 더 이상 수사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리며 사건이 확대되는 것을 차단하였고, 검찰이 사건을 불기소하고 일방적인 휴전을 선포했다. 판사들은 이에 대하여 여러 차례 사후 방안을 논의하였으나 대안을 찾지 못하였다. 8월 27일 민복기 대법원장이 재경 법관 전체회의를 소집하여 사표 철회을 호소하였고, 이 회의를 계기로 판사들은 사의를 철회하고 법정에 복귀하였다.
아쉬움: 사법권의 각종 침해를 배제하고 사법부의 독립을 유지하고자 하는 판사들의 시도가 그 목표 달성을 위해 더 강력한 투쟁을 전개했더라면, ‘사법부 독립’이라는 민주화 과제에 대한 일정 정도의 진척을 이루었더라면, 유신헌법 이후 사법부 파동을 주도했던 판사들이 해직되지도 않았을 거고, 시국관련 재판에서 이른 바 정찰제 판결이 그렇게 쉽게 이루어지지는 않았을 텐데...
다시 2018년 여름에 사법파동을 기억하며: 삼권분립이라는 헌법의 기본가치 조차도 지키지 못 하시는 분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권력과 거래했다는 <사법농단 사태> 의혹과 관련된 보도를 접하면서, 1971년 여름에 부당한 권력에 맞서 판사직을 던졌던 분들의 용기를 다시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