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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령, 또 다른 이름 쿠데타

<5.17비상계엄 전국 확대 조치>, 현재까지는 마지막인 계엄령


다짜고짜 군홧발로 집 대문을 박차고 들어온 군인들에 의해 손목에는 수갑을 차고, 두 눈이 가려진 채 들어온 이곳은 어디인 지 짐작도 할 수 없다. 귓속을 파고드는 매타작 소리, 욕설 소리, 흐느낌 소리만이 공포를 가중시킬 뿐인 공간에서 나의 몸뚱이와 몽둥이가 부딪히는 소리가 옆방의 다른 사람들에게 또 다른 절망을 주고 있다. 1980년 5월 17일 밤 죽는 것보다 살아있는 것이 고통스러운 나날이 시작되었지만, 어떠한 치욕을 겪더라도 살아야 했다.


“1980년 5월 18일 0시를 기해 선포된 비상계엄에 따라 18일 새벽부터 정치 활동이 전면 중단되고, 어떠한 정치적 옥내외 집회 및 시위도 금지되었다. 이어 모든 대학에 휴교령을 선포하고 군부대가 진주하였다. 군부는 서울역회군 이후 전국 대학 학생회장단이 모여 있던 이화여자대학교를 급습해서 학생회장단을 전원 체포하여 학생운동 세력을 무력화시키고, 민주화를 요구해온 재야인사와 사회운동세력을 지명수배해 일제 검거하였다. 거기에 이날 새벽 2시경에 무장한 33사단 병력이 국회를 점령하여 사실상 헌정 중단 사태가 발생했다. 이는 헌법에 규정된 국회 통보 절차는 커녕 계엄군을 동원한 국회를 무력화하는 불법조치였다.
동시에 보안사는 비상계엄 하루 전 전군 보안부대 수사과장회의를 소집해 17일에 비상계엄 전국 확대 사실, 검거할 블랙리스트 명단을 통보했다. 신군부를 견제할 수 있던 제도권 정치 세력인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3김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었다. 비상계엄이 확대되기 직전,  보안사는 예비검속을 통해  김대중, 김종필를 비롯한 주요 정치인 26명을 합동수사본부로 불법 연행하고, 학생·정치인·재야인사 2699명을 체포하고,  신민당 총재 김영삼 역시 가택연금 처분내리는 등 탄압을 감행하였다." (12.12, 5.18사건 판결문 중)

“은인자중하던 군부 드디어”,  쿠데타와 함께한 계엄령


1961년 5월 16일 새벽 5시, “친애하는 애국동포 여러분! 은인자중하던 군부는 드디어 금조미명(今朝未明)을 기해서... 대한민국 만세! 궐기군 만세!” 라는 군부독재의 서막을 알리는 내용이 다소 떨리는 듯한 아나운서의 목소리로 라디오를 통해 전국에 퍼져나갔다.

2군 부사령관 박정희 소장 주도의 장교 250여 명과 사병 3,500여 명 정도에 불과한 쿠데타 세력이 한강을 건너 수도 서울의 주요기관들을 점령하면서 국가권력을 장악한 것이다. 이들은 새벽 5시 라디오방송을 통해 군사혁명위원회를 조직하여 이 위원회가 입법·사법·행정의 3권을 통합·장악한다고 선언하고, 6개항의 혁명공약 발표와 함께  '군사혁명'이 성공했다고 발표하였다. 그리고 아침 9시를 기하여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였다.

※ 계엄령의 역사

 <헌법 제77조>와  <계엄법>에 따라 국가비상사태시에서 군사력을 사용하여 사법과 행정을 유지하는 국가긴급권의 하나로 대통령의 고유권한이다. 그 중 비상계엄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해 영장제도,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와 정부와 법원에 대한 특별한 조치를 할 수 있는 제도이다. 

우리나라의 <계엄법>은 1949년 11월 24일 제정되었으나, 정부수립 이후 최초 2회의 계엄령은 일본의 계엄령을 적용해 1948년 10월 22일 여수순천사건 때에 같은 해 11월 17일 제주4.3사건 때에 선포된 바 있다.

이후 우리나라의 계엄법에 의한 계엄은 6.25전쟁동안의 계엄령(1950.7.8~)과 4.19혁명기에 선포된 계엄령(1960.4.19.~7.16.), 5.16군사쿠데타와 함께 계엄령(1961.5.16.~1962.12.5.)이 선포되었다.

1964년에는 굴욕적인 한일회담반대시위를 이유로 계엄령이 (1964.6.3.~1964.7.29.), 1972년에는 10월유신 선포와 함께 계엄령이 선포(1972.10.17.~12.13.) 되었다. 1979년 10월 18일에는 유신체제 반대시위가 격화된 부산, 마산지역을 대상으로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이 계엄령은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저격되면서 10월 27일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으로 확대되었으며, 1980년 5월 17일에는 제주도까지 확대되어 456일 동안 지속되다가 1981년 1월 24일 해제되었다.

2016년 기무사의 계엄령 검토, 다시 떠오르는 일제 예비검속의 기억

2016년 초겨울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인해 전 국민이 “이게 나라냐”라며 거센 분노를 쏟아내고 있을 때, 제1야당 대표가 “계엄령을 준비하고 있다는 정보가 돌고있다.”라는 이야기를 했다. 야당 대표의 이야기를 언론을 통해 접하며 맨 처음 떠오르는 생각은 1980년 5월 17일의 일제 예비검속의 기억과 함께 1990년 폭로된 보안사 민간인 사찰사건의 기억이다. “설마”와 “혹시”가 동시에 머릿속을 엄습하지만, 광장의 집회를 앞에서 이끌었던 분들이 1980년 5월 17일처럼 예비검속의 우선 대상자가 될 수도 있기에, 광장의 텐트를 지키는 분들이 1980년 5월 18일의 고립된 광주처럼 당할 수 있기에 두려움을 간직한 채 광장으로 향했다.


※ 보안사 민간인 사찰사건과 청명계획

1990년 윤석양 이병에 의해 폭로된 보안사령부(현 기무사) 민간인 사찰 사건과 함께 폭로된 청명계획은 보안사령부가 친위쿠데타를 성공시키는 데 방해가 될 만한 반정부인사 목록을 만들고 이들을 개별적으로 사찰해 비상계엄이 선포되는 D-데이 전후로 전원 검거한다는 예비검속 작전명이다. 당시 보안사는 비상계엄에 대비해 각계 주요인사 923명의 인적사항·예상 도주로·예상 은신처·체포조 등이 기재된 청명카드를 작성하고 계엄시 이들을 검거·처벌하기 위한 청명계획을 수립하였으며, 청명카드 작성 작업을 완료한 뒤 1989년 8월 을지훈련 기간에 8개 부대를 선정해 도상훈련까지 실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2018년 여름, 기무사의 계엄 검토 문건이 세상에 나와 계엄령, 쿠데타, 군부, 예비검속, 언론통제, 무력진압 등 대한민국 현대사의 어두운 단어들이 세상을 어지럽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