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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의 반격 또는 한여름 밤의 꿈: 학원안정법

경향신문의 천기누설

1980년 광주학살을 통한 집권이후 계속 전두환 정권을 괴롭히던 학생운동을 뿌리 채 뽑아 다시는 대학가에 발붙이지 못하게 하겠다는 전두환의 꿈이 1985년 7월 25일 경향신문에 의해 세상에 드러났다. 그리고 8월 6일 손제석 당시 문교부장관은 「학원안정법」 제정과 관련한 기자회견을 갖고 '학원안정법을 제정 좌경의식화 활동과 학원소요의 배후조종행위를 엄중히 다스려 학내외에 걸친 좌경혁명사상의 확산을 봉쇄하겠다.'고 정부의 입장을 밝혔다. 

학원안정법 제정 추진
정부는 대학가가 일부소수과격학생들의 좌경화한 폭력소요로 대다수 학생들의 면학분위기를 해치고 있는 사태에 단호히 대처하기 위해 정치적 목적을 띤 일체의 과격한 학내외 집회와 시위를 규제하는 것 등을 골자로한 학원안정법 제정을 신중히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25일 알려졌다. 이와관련 민정당은 이날 상오 긴급간부회의를 열고 법 제정에 따른 문제를 협의했다. (경향신문, 1985년 7월 25일)

제정 시도의 배경

박철언 회고록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2005년)
 미 문화원이 점거당한 다음날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 간부회의에서 장세동 안기부장은 “주요 보안 목표에 대한 공격이 있을 때에는 총살을 해서라도 저지해야 한다”며 흥분했다.(미 문화원 점거 농성사건이 터진 건 장세동이 경호실장에서 안기부장으로 옮긴 지 석 달밖에 안됐을 때였다.) 그리고 6월 5일 농성학생들의 배후세력인 삼민투위와 전학련에 대한 전면수사 방침을 결정하면서 필요하다면 8월 15일경 임시국회를 열어 ‘학원정상화 임시조치법안’을 단독 통과시키겠다는 것이 장 부장의 결심이었고, 안기부에서 법안 시안을 준비하던 6월 말까지만 해도 정부와 민정당은 물론 청와대 수석들도 진행 상황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또 7월 5일엔 임시조치법안에 대한 대통령의 추가 지시가 내려왔는데, 첫째 교육 중 단식·탈출·집단행동에 대한 벌칙을 강화하고, 둘째 내무반별로 10∼20명을 수용하여 훈련시키고, 셋째 오지의 감호소를 활용하라는 것 등이었다 한다.

허문도 청와대 정무수석 발언(동아일보 정치부장의 취재 수첩)
지금 대학에 만연되어가고 있는 좌경화의 바람은 상상 이상으로 거세다. 민주화를 부르짖고, 공산당이라는 말을 표면에 안 꺼내고 있지만 이들 좌경학생들은 이 사회체제 즉 국가를 뒤엎으려는 생각을 하고 있으며 의식화를 통해 조직세력으로 번져나가고 있다. 정부가 파악하고 있는 좌경화 학생들의 수는 전국에서 약 5만 명에 이른 것으로 본다. 「레닌」이 혁명 당시 공산당은 전 소련 인구의 3%에 불과했다는 역사를 볼 때 이 숫자는 무서운 것이다. 물론 모두(5만 명)가 철저히 좌경했다고는 안 보지만 그 숫자와 세력은 점점 짙게 넓게 펴져간다고 보아야 한다.
2,3년 뒤면 공산화를 싫어하는 국민이면 모두가 “아차”하겠지만 그때는 이미 늦다. 정부는 뻔히 알면서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최근 美 레이건 대통령의 측근이 다녀갔는데 필리핀의 경우 NPA(신인민군)지지 세력이 40% 정도 번져 제2의 월남화가 멀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고 하더라.
이 법이 자칫 정치적 차원에서 오해될 소지도 있으나 이것은 절대 정치 게임이 아니며 국가차원에서 생각해야 한다.
아들, 딸이 좌경화되지 않도록 해달라는 학부모의 호소가 많다. 국회의원들에게 진정도 많이 해온다. 이런 법이 생겨 학원문제가 해결되어야 평화적 정권교체도 평탄하게 이룰 수 있다. 정권교체를 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시켜 놓아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 때에 나라를 망쳤다는 소리를 들을 수 없다.

전개 과정 

□ 동경 이종찬 회고록
‘학원안정법’이라는 이름의 법안 시안이 내손에 들어왔다. 학생 약 5000명을 수용해 순화한다는 안이었다. 허문도 청와대 정무수석은 일본에서도 1969년 ‘대학의 운영에 관한 임시조치법’ 형태로 법을 만든 적이 있었다고 힘주어 말했다. 나부터 이해가 가지 않았다. 도대체 민주주의를 한다는 나라에서 비상시도 아니고 평상시에 강제수용소가 가능하겠는가?
1차 당정협의가 있었다. 당에서는 이한동 사무총장과 내가 참여했고, 정부에서는 장세동 안기부장과 허 수석이 나왔다. 그날은 정부 측의 일방적인 설명만 들었고 이 법이 자칫 정치범수용소나 삼청교육대 같은 인상을 줘서는 안 된다는 정도의 대화만 오갔다. (중략) 7월 26일 장 부장과 허 수석이 재차 연락을 해왔다. 이한동 총장과 나, 그리고 이번에는 현홍주 실장까지 함께 만났다. 정부 측은 몹시 서두르는 태도였다. 문제 학생들을 수용할 시설이나 교육내용은 준비가 끝나 있었다. 입법만 되면 즉시 행동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 법을 계속 의원입법으로 해 달라는 게 나의 비위를 거슬렀다. (동아일보 [憧憬 동경 이종찬 회고록]〈22〉학원안정법 파동, 2015년 1월 17일)

법의 내용

□ 허문도 청와대 정무수석 발언(동아일보 정치부장의 취재 수첩) 
지금의 법(주로 집시법)으로는 데모를 하고 돌을 던지고 기물을 부수는 행동으로 나오는 학생과 노동자를 처벌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진짜 좌경학생들은 위법을 안 하고 법을 피할 방법을 교묘히 알고 있다. 데모를 하고 민주화를 외치는 학생들은 오히려 순수하다. 의식화해가는 조직의 핵심체를 부술 길이 없다. 번연히 보이면서도 어떻게 할 길이 없다. 이런 학생들을 일반 학생들과 차단하기 위해 법이 필요하다. 법의 내용은 아직 성안단계여서 결정된 바 없다. 다만 좌경학생들을 분리수용해서 세뇌, 역세뇌를 시켜 안전히 안심이 되면 다시 학교로 돌려보내려는 것이다. (그러면서 소련의 전범자 다루기와 형무소의 세뇌 전략을 예로 들었음) 지금 식으로 1,2회 형무소에 두어 보았자 영웅만 만들고 효과가 없으며 세력만 늘어난다. 완전히 뿌리 뽑을 수 있는 방법이 있어야 한다. 법은 그런 내용으로 만들 것이다.  

<정부 발표 시안 주요 골자>
문교부(현재 교육부)에 학생선도교육위원회(사법 기능을 갖는 초법적 기구)를 설치하여 좌경의식을 가진 학생들(국가보안법 위반 학생뿐 아니라 전두환 정권에 반대하는 집회 시위 참여자)에게 선도 교육(대상 학생을 일정장소에 수용하여 좌경의식화를 역의식화하는 사상 이념 교육과 ‘심신 단련’과 ‘현장 학습’을 병행하는 교육)을 실시하고 학원소요를 자율적으로 예방 수습하는 차원에서 각 학교의 총학장들(교수들에게 연대책임을 부여함으로서 교수를 민주화운동의 탄압도구로 활용)에게 소요단체(학생이 과반수 이상인 모든 조직을 포함함으로서 청년단체, 인권단체, 종교단체까지 가능하며)를 폐쇄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

법의 말로

1986년 8월 6일 학원안정법 시안이 보도되자 다음날부터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은 「학원안정법저지 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당시 재야운동단체의 총집결체인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은「학원안정법은 긴급조치의 재판이 될 것이다.」라는 유인물을 내고, 김수환 추기경이 이원홍 당시 문공부장관을 만나 학원안정법 반대 의사를 최고 권력자에게 전달해달라고 요청하면서 학원안정법 반대 운동이 시작되었다. 이후 방학 중인 전국 대학가에서 학원안정법 반대 투쟁이 벌어지고, 민통련을 비롯한 재야 39개 단체가 「학원안정법반대투쟁전국위원회」를 구성하고 무기한 농성에 들어가면서 반대 투쟁은 격화되었다. 야당은 물론 정부 여당 안에서 학원안정법 반대 분위기가 커져나가자, 정부 여당은 8월 17일 청와대에서 당정회의를 열고 8월 국회에서 강행처리하기로 한 법안을 9월 이후 처리하기로 하면서 사실상 입법시도가 좌절되었다.

학원안정법의 부모 형제

 1960년대 학원보호법(안)
5.16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 정권이 1964년 한일회담을 추진하자 대학가 등에서 반대운동이 전국적으로 벌어졌다. 박정희 정권은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집회·시위의 자유, 언론·출판의 자유를 제약했고 각 대학은 휴교에 들어갔다. 이런 공포분위기 속에서 시위 관련 학생들에 대한 체포와 처벌이 이뤄졌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한일회담반대투쟁의 진원지인 대학에서 저항의 싹을 완전히 도려내기 위해서 '학원보호법' 제정을 시도하였다. 7월 29일 비상계엄을 해제하자마자 공화당은 '학원보호법'을 국회에 제출했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기본이자 헌법이 보장하는 정치와 사상의 자유를 통째로 부정했던 통제 시도는 여론의 역풍을 맞으면서 사라졌다.
 
□ 1960년대 말 일본의 대학 운영에 관한 임시조치법
1960년대 말 일본에서 안보 투쟁이 격화되고, 대학 내 부정 문제 등으로 학생 시위가 거세가 일어나자, 일본정부는 대학 내 분쟁에 대한 대책으로 유사시 교육부 명령으로 대학 전체의 업무를 중단시킬 수 있는 “대학 운영에 관한 임시조치법”을 제정하였고 이에 따라 1969년 8월부터는 대부분의 대학에 경찰 기동대가 출동할 수 있게 되었다. 전두환 정권 당시 정무수석이었던 허문도가 조선일보 동경특파원으로 근무하면서 알게 된 이 법을 기초로 학원안정법 제정을 추진하였다는 주장도 있다.
 
□ 1970년대 긴급조치 9호
유신독재가 갈수록 기승을 부리고 그에 대한 저항도 갈수록 치열해가던 1975년 5월 13일 개헌논의 금지, 학원탄압을 골자로 하는 긴급조치 9호가 발표되었다. 긴급조치 9호를 통해 박정희 정권은 특정 발언이나 표현이 실제 유언비어 여부와 상관없이 권력자의 의사에 따라 영장 없이 체포 구금할 수 있고, 언론 봉쇄로 인해 누가 그러한 부당한 처우를 받게 되었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됨으로 박정희 정권은 무소불위의 절대반지를 가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