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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민주노조의 전설, 원풍노조가 세운 신기록

유신시대 최강의 노조로 불렸던 원풍모방 노동조합(원풍노조)은 1970년대 민주노조 가운데 하나의 전설, 신화로 불릴 만큼 훌륭한 활동을 전개했던 노조였다. 원풍노조가 1970년대부터 1982년 9.27 이후 해산과 그 이후 원풍동지회에 이르기까지 해온 활동 중에는 한국노동운동사에 최초 또는 최고의 기록을 남긴 일들이 수두룩하다. 여기에 원풍노조가 세운 신기록을 일부 소개한다.

국가보위법이 발동된 상태에서 최초의 대규모 파업을 벌이다.

1972년 8.9사태, 국가비상사태가 선포되고 ‘국가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발동되어 모든 형태의 파업이 불법화된 상태에서 벌어진 최초의 대규모 파업이었다. 

1971년 12월 27일 제정된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은 노동자의 단체교섭과 단체행동을 규제했다. 이를 어길 경우 1년 이상 7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도록 하고 있었다.

우리나라 최초로 노동조합이 회사 운영에 참여하다.

회사가 부도 위기에 처한 1973년에는 노조를 중심으로 수습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도산을 막았다.

또한 1974년에는 노조가 경영에 직접 참여하는 등 한국전쟁 이후 노동조합사에 초유의 사례를 만들며 회사 정상화에 기여했다. 

유신 치하에서 1,400여 노조원들이 구치소 항의방문 시위투쟁을 전개하다.

1975년 3월 10일, 근로자의 날 행사로 운동장에 모인 원풍노조 조합원들은 근로자의 날이라고 나누어준 삼립빵과 수건을 집어던지고 큰 길로 나섰다. 원풍노조 조합원들은 무려 1,400여 명이 대로를 걸어 방용석 지부장이 구속되어 있는 영등포구치소까지 행진했다. 근로자의 날인데 원풍모방 근로자들을 대표한 방용석 지부장이 구속되었으니 근로자 대표를 만나러 간다는 것이다. 서슬 푸른 유신정권 하에서 대학생들이든 노동자들이든 백주대낮에 이렇게 공공연한 조직적 시위를 벌인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다. 

1980년 광주항쟁 당시 노동조합으로는 유일하게 모금운동을 벌여 직접 전달하다.

1980년 5월 말, 원풍모방 노조원 1,700명은 광주희생자들을 위해 이틀에 걸쳐 4백70만원을 모아 6월 초 광주의 윤공희 대주교에게 이를 직접 전달했다. 당시 웬만한 집 몇 채 값이 될 정도로 큰 돈이었다. 모금은 노조 평직원들의 제안으로 노조 집행부의 도움 없이 자발적으로 이루어졌다. 당시의 공포 분위기를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었다. 

원풍노조의 소모임 활동과 체계적인 교육활동은 강력한 민주노조를 만드는 동력이었다. 당시 노조 내에는 7~8명으로 조직된 소모임이 50~60개에 이르러 그 안에서 활동하는 조합원이 400~500명에 달했다. 

조합원들의 복지를 위한 사업도 최강이었다. 협동조합운동으로 조합원들의 생활용품 등을 공동구매했고, 자녀들에게는 장학금을 지급하였다. 회사 안에는 이발소, 미장원, 목욕탕을 지어 조합원들이 무료로 사용했다. 또한 노조원들의 주거안정을 위해 공동주택 구매기금을 마련하기도 했다. 

원풍노조가 세운 신기록들은 이외에도 무궁무진하다.

계엄군도, 노동계 정화조치도 원풍노조를 막지 못하다.

1980년 계엄 하에서 군인들이 원풍노조 간부들을 연행하기 위해 기숙사에 난입하려 하였지만  기숙사들의 강력한 저항에 밀려났다. 원풍노조는 이른바 노동계 정화조치로 삼청교육에 4명의 간부가 끌려갔고, 1982년 9.27사태로 모두 559명이 강제해고되어 단일 기간에 가장 많은 조합원이 해고된 기록을 갖게 되었다. 원풍노조 조합원은 동지회를 결성하고 민주노조 재건기금을 자그만치 4천8백만원을 모아 모임집을 마련하였고, 현재도 수백여 동지들이 모여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

이 글은 『원풍모방 노동운동사』(기획 원풍모방노동운동사발간위원회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정리 김남일, 삶이보이는창, 2010) 에 실린 내용을 발췌하여 구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