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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도 없는 원혼이여 천년을 두고 울어주리라.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피학살자의 수는 남한에서만 최소 수십만 명에서 1백만 명에 달한다. 1950년 6월에서 8월 사이 형무소에서의 정치범 학살, 국민보도연맹 가입자에 대한 학살, 부역혐의자와 점령지역 거주자에 대한 집단 학살, 토벌을 빌미로 산간지역에서 벌어진 마을 주민들에 대한 학살 등이 대표적이다.
피학살자들은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온갖 잔인한 방법으로 죽임을 당했다. 피학살자와 유족들은 차마 표현하지 못할 능욕을 당하기도 했으며, 씨를 말려 후환을 없애야 한다며 일가족을 몰살시킨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간신히 살아남은 유족들은 이승만 정권으로부터 ‘빨갱이 가족’으로 몰려 감시와 통제를 받는 등 많은 불이익을 받아야 했다.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자 그동안 억눌렸던 목소리가 곳곳에서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한국전쟁 전후로 전국에서 발생한 민간인 학살 사건 관련자들을 처벌하고 명예회복을 시켜달라는 요구가 빗발쳤다. 그간 공포정치에 억눌려 피해 사실을 입 밖에 꺼내지도 못했던 피학살자 유족들은 각 지역마다 유족회를 결성하고 진상규명 운동에 나섰다. 경남의 거창, 동래, 진영, 마산, 창원, 김해, 금창, 밀양, 함양, 충무, 경북의 대구, 경주, 경산, 문경 등지에서 피학살자 유족회가 결성되었고, 1960년 6월 16일에는 경북을 포괄하는 경북지구피학살자유족연합회가 결성되었다.
1960년 10월 20일에는 서울 종로의 전 자유당 중앙당부 회의실에서 전국의 시군 유족회 대표 50여 명이 모여 전국피학살자유족회를 결성했다. 유족회는 '무덤도 없는 원혼이여 천년을 두고 울어주리라', '조국의 산천도 고발하고 푸른 별도 증언한다' 등을 구호로 정했다. 유족회는 자체적으로 피해신고를 받고, 유골을 발굴하여 합동묘역을 조성하고 지역별로 합동위령제를 지내는 등 추모활동을 했다. 또한 학살을 자행한 사람들을 직접 법원에 고소하여 처벌을 요구하는 한편, 대통령과 국무총리, 국회와 정부 각 기관 등에 청원 진정서를 제출하는 등 관련자 처벌과 진상규명을 촉구했다.
1961년 5.16군사쿠데타가 일어나자 모든 것이 다시 중지되었다. 각 지역에 세워졌던 피학살자 합동 분묘는 파헤쳐지고 위령비는 정으로 쪼아지거나 산산조각이 난 채 땅 속에 묻혔다. 진상규명활동을 벌이던 유족회 간부들은 ‘용공분자’로 몰려 구속되었고, 유가족들은 연좌제에 묶여 다시 감시와 통제를 받아야 했다.
1987년 6월항쟁 이후, 민주주의 공간이 서서히 열리면서 깊이 묻혀있었던 민간인 학살문제가 그동안 강요되었던 기나긴 침묵을 뚫고 다시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1989년부터 거창 유족들은 해마다 위령제를 지냈고, 1999년에는 미군에 의해 노근리 주민 200여 명이 학살당한 사건의 진상이 AP통신을 통해 폭로되어 국제적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2000년 9월 7일, 5.16군사쿠데타 이후 활동이 중지되었던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 전국유족협의회가 재결성되었다. 2009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국가에 대해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에 대한 배보상, 유해발굴과 안장, 과거사연구재단설립 등을 권고했다.
2018년 2월,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 조사단’은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충남 아산지역에서 800여 명의 민간인학살에 대한 유해발굴을 진행하였다. 2018년 4월, 배방읍 중리의 유해 발굴 현장에서는 208구의 유해와 60여 개의 비녀가 나왔다. 유해는 어린아이를 포함한 미성년 58명을 비롯하여 여성과 노인이 대다수였다.
현재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과 유해발굴은 계속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