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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 광주를 품은 청년, 김의기

삼엄한 언론 통제에 가려진 ‘1980년 오월 광주’

1980년 5월 광주에서 수많은 시민들이 무참하게 희생될 때 국내 언론은 계엄당국의 사전 검열로 이를 보도하지 못했다. 10.26 직후부터 시행된 언론통제는 ‘서울의 봄’ 과 함께 그 지침이 강화되었고, 계엄당국은 외신기자들이 송고하는 원고까지 검열했다. 계엄군이 광주항쟁이 시작되고 보도금지 조치를 내렸지만 전국 곳곳에서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21일 보도금지가 해제되면서 언론은 ‘광주’를 언급했지만 삼엄한 언론통제 속에서 광주의 진실은 알려지지 않았다. 5공화국 전 기간에 걸쳐서 공권력과 제도 언론은 광주항쟁을 '혼란' 또는 ‘사태’로 폄하하고 왜곡했다. 프랑스, 독일, 미국 등의 외신에서 광주의 참상을 보도했지만, 이 또한 소수의 사람들만 알았을 뿐 대부분의 시민들에게는 전달되지 않았다.

동포여,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광주의 진실이 은폐되고 있을 때, 이를 알리기 위해 서울의 한 건물 옥상에서 자신의 몸을 던진 학생이 있다. 1980년 5월을 보았던 김의기이다.

김의기는 1959년 경상북도 영주의 농촌에서 4남 2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영리했던 그는 중학교 때 서울로 유학해 배명중학교, 배명고등학교를 나와 1976년 서강대 무역학과에 진학했던 집안의 자랑이었다. 대학생이 된 후에는 교내에서 근대사 연구모임을 주도했고, 1979년 2월 기독교 대한 감리회 청년회 전국연합회 농촌분과위원장을 맡았다. 1980년 2월, 그는 한국기독청년협의회 농촌분과위원장이 되어 전남지방의 농촌과 서울을 왕래하며 농촌문제를 정리하고 농촌 활동 자료집 발간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가 대학에 들어와 특히 관심을 가졌던 부분은 농촌이었다. 매년 여름과 겨울만 되면 농촌 봉사를 떠나 농민들이 안고 있는 문제를 발굴하기 위해 힘썼고 이를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자주 그는 농촌에 가서 농사를 지으며 그들의 권리를 찾아주어야겠다고 했으며..”(중략)

농촌문제에 관심을 갖던 그는 1980년 5월 계엄군의 광주시민 학살을 접하고도 침묵해야 하는 시대의 비극에 항의했다. 1980년 5월 30일 오후 5시 10분, 김의기는 종로 5가 기독교회관 옥상에서 떨어졌다. 당시 기독교회관 주변은 ‘5.17비상계엄’으로 무장군인 수송차 2대가 정문 앞을 지키고 있었고, 무장군인들이 회관 앞에 상주하고 있었다. 김의기는 바로 그 수송차 사이에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졌다.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부분들이 있다. 그가 유인물을 뿌리다가 경찰에 밀려 떨어졌다는 설과 유인물을 작성만 하고 실제로 뿌리지는 못하고, 5월 30일 어느 교회의  사람에게 준  후 옥상에서 몸을 던졌다는 설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가 죽음까지 각오하고 '동포에게 드리는 글'을 작성하여 많은 시민들에게 광주의 참상을 알리고자 했다는 것이다.

피를 부르는 미친 군화발 소리가 우리가 고요히 잠들려는 우리의 안방까지 스며들어 우리의 가슴팍과 머리를 짓이겨 놓으려고 하는 지금, 동포여, 무엇을 하고 있는가?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보이지 않는 공포가 우리를 짓눌러 우리의 숨통을 막아 버리고 우리의 눈과 귀를 막아 우리를 번득이는 총칼의 위협 아래 끌려 다니는 노예로 만들고 있는 지금, 동포여, 무엇을 하고 있는가?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무참한 살육으로 수많은 선량한 민주시민들의 뜨거운 피를 오월의 하늘 아래 뿌리게 한 남도의 공기가 유신잔당들의 악랄한 언론탄압으로 왜곡과 거짓과 악의에 찬 허위선전으로 분칠해지고 있는 것을 보는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중략)

김의기를 추모하다

 1980년 6월 2일 서울대학병원 영결식장에서 김의기의 영결 예배가 거행되었고, 그의 시신은 경기도 일산 기독교 공원묘지에 묻혔다. 그리고 2000년 정부로부터 5.18민주화운동 희생자로 인정받아 그 해 5월 5.18묘역으로 이장되었다.

그가 죽음을 선택하면서까지  밝히고자 했던 광주의 진실은  많은 시민들을 거리에 나서게 했고, 1980년대 민주화운동의 뿌리가 되어 마침내 1987년 6월민주항쟁으로 이어졌다. 

1988년 5월 30일 서강대 교내 로욜라동상 앞 의기촌에서 '김의기열사 8주기 추모식 및 추모비 제막식'이 열렸고 서강대는 1990년 2월 故김의기에게 명예졸업장을 수여했다.

서강대 총학생회는 매년 5월 '의기제'를 개최하여 김의기의 정신을 기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