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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0민주항쟁, 같은 기록 그러나 다른 기록
2.7 박종철군 국민추도회
1987년 1월 14일 서울대생 박종철이 치안본부 대공수사단(옛 남영동대공분실/ 현 민주인권기념관)에 연행되어 조사받던 중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에 대학생들은 17일부터 24일까지 ‘박종철군 추모제’를 지내고 진상규명을 요구했으며, 종교계와 사회단체는 시국을 개탄하며 본격적인 대응에 나섰다. 사회단체와 재야 그리고 야당 등은 준비위원회를 결성하였고, 2월 7일 명동성당에서 ‘고 박종철군 국민추도회’를 열기로 했다.
경찰은 국민추도회를 원천봉쇄하기 위해 명동성당 일대는 물론 학생과 시민이 모일만한 장소들에서 검문·검색을 했다. 철통 봉쇄를 했지만, 명동성당에서는 800여 명이 모여 국민추도회를 열었다.
여기 1987년 2월 7일 추도회 당시에 생산된 동일한 내용의 두 개의 기록이 있다. 기증자와 표제가 동일한데, 과연 같은 기록일까?
"사랑하는 박종철 군이여, 이 시대 이 땅에 사는 우리 모두가 사랑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고, 박종철 군을 추도하는 이 식전에서 우리는 그대의 아버님이 그대의 마지막 육신을 얼어붙은 강위 찬바람 속에 보내면서 "아부지는 할 말이 없데이"라고 절규했듯이, 그대의 참혹한 죽음의 소식이 충격속에 온 국민이 말을 잃었듯이 아직도 우리는 그대의 영혼과 그대의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을 위로할 한조각의 말조차 찾지 못하고 있읍니다.... "
같은 기록, 그러나 다른 기록
두 기록은 기증자도 같고 표제도 완전히 동일한데, 왜 다른 사료번호로 관리되고 있을까?
출처와 내용이 동일하기 때문에 일부 '같은 기록'이라 볼 수 있지만 조금만 자세히 보면 이는 엄연히 '다른 기록'이다.
1987년 1월, 박종철 군의 죽음과 경찰의 고문 치사 조작 은폐에 많은 국민들이 분노했고 거리로 나왔다. 고 박종철군 국민추도회 준비위원회는 1987년 2월 7일을 국민추도일로 선포하였고, 두 기록은 모두 이 날 오후 2시에 명동성당에서 개최된 고 박종철 군 국민추도회에서 낭독할 추도사로 쓰기 위해 생산된 기록이다.
손으로 쓴 첫번째 기록을 타자기로 타이핑 한 것이 두번째 기록이다. 첫번째 기록은 대충 봐서는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휘갈겨 썼다. 하지만 고 박종철군을 추모하기 위해 적절한 어휘, 표현 등을 고민한 흔적이 글에 고스란히 남아있어 글쓴이의 정성과 시대의 아픔이 전해진다. 이에 비해 두번째 기록은 잘 정리된 글의 정제된 힘이 느껴지고, 추도식에 참여한 많은 사람들 손에 전달되어 읽혀졌을 것으로 보인다. 동일한 내용을 담은 것으로 보이는 두 기록은 각자의 의미를 지닌 다른 기록인 것이다.
매뉴스크립트 기록과 생산자
두 기록을 설명하고 있는 사료정보를 유심히 보면 기증자는 같지만, 생산자가 다름을 알 수 있다.
첫번째 기록의 생산자는 이 기록을 작성한 기증자이기도 한 '김도현 선생'이다. 김도현 선생은 민주화추진협의회의 주간으로 활동하면서 박종철군 국민추도회 준비위원이기도 했다.
그리고 두번째 기록의 생산자는 우리나라 제 14대(김영삼), 15대(김대중) 대통령이었던 '김대중, 김영삼'으로 표기되어 있다. 이들은 당시 민추협 공동의장이었으며, 국민추도회에서 일곱번째 연사로 위의 기록을 바탕으로 추도사를 한다. 두 기록의 생산자를 다르게 표기한 이유이다.
다시 표제가 같은 두개의 기록이 있다.
"이 정부는 고 박종철군을 고문 살인하고 그 범인마저 은폐 조작하였으며, 온 국민과 함께 약속한 민주개헌을 얼토당토 않는 이유를 달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독재헌법의 옹호와 이에 따른 독재권력자끼리 정부이양을 선언하고 행동으로 굳혀가고 있읍니다."
위의 두 개의 기록은 또 무엇을 담고 있을까? 그에 대한 고민은 각자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