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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마, 여기가 어딘 줄 알아?"_ 무법자의 폭력이 춤추던 보안사 서빙고 분실
“아이쿠쿠~ 나 죽네, 사람 죽어요! 제발...”
어디선가 들려오는 비명소리.
문학평론가 김병걸 선생의 소리이다. 나이 이미 칠순에 가까운 노인이지만 그런 것 따위에 상관할 그들이 아니었다. 오로지 폭력만이 춤을 추고, 오로지 폭력만이 대화를 하는 야수와 같은 짐승의 세계였다.
몸무게 50킬로그램을 겨우 넘길까 말까 한 작은 몸피의 연약한 노인이었지만, 야수의 눈에는 그저 군홧발 아래의 먹잇감이었을 뿐이다. 낙엽처럼 뒹구는 그의 몸 위에 수많은 매질이 오갔고 혼절하기를 몇 번. 온몸은 퍼렇다 못해 꺼멓게 피멍꽃으로 덮인지 오래였다.
김병걸 선생뿐만 아니었다. 함께 연행되어 온 백기완, 최열, 임채정, 최민화, 박종렬 등 문화예술인과 사회운동가, 종교인, 정치인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무자비한 군홧발과 뭉둥이질에 실신을 거듭하기 일쑤였다. 나이도, 사회적 명망도 상관이 없었다.
그들에게서 손톱만 한 존경심이나 예의를 기대하기란 어려웠다.
1979년 11월. 그들은 YWCA위장결혼식사건에 연루되어 끌려온 민주 인사들이었다. 독재자였던 대통령 박정희가 죽자, 계엄령 해제와 조속한 민주화를 요구하는 집회를 열었는데 그것이 화근이었다.
독재자는 죽었지만 그가 길러놓은 맹목적인 충복들은 무서운 이빨을 드러내고, 복수의 칼날을 엉뚱하게 민주 인사들에게 퍼붓고 있었다.
“야 이 새끼들, 여기가 어딘 줄 알아? 김재규도 여기서 피똥 싸고 벌벌 기어서 나갔어! 김종필이도 살려달라고 엉엉 울더라고. 좋아, 오늘이 니들 제삿날인 줄 알아!”
건강한 사내들은 미친 듯이 날뛰며 외쳤다.
맷집 좋은 백기완도 몇 번 까무러쳤다가 일어났다. 그런 상황 속에서 까무러치지 않는 사람이 오히려 이상했을 정도였다. 죽음의 공포가 흰색 건물 주위를 싸늘하게 감싸고 있었다.
전직 상관이자 한때는 수많은 부하를 호령하던 장군들도 일단 이곳에 들어오는 순간, 일개 하사관이었을 ‘기관원’들의 밥이었다. 그들 위엔 오직 한 사람, 박정희와 전두환 같은 독재자가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그들을 길들이고 만든 자들이 바로 1인 권력자들이었다.
서울 중심부 용산역에서 멀지 않은 곳. 서빙고역 앞 교차로에서 크라운호텔 쪽으로 가다 언덕길 위 높다란 돌담이 감싸고 있는 그곳이 바로 이 나라를 무법천지로 만들고, 국민과 법 위에 군림하던 군사정권의 야수들이 살고 있던 곳이었다.
어떻게 그런 괴물 같은 곳이 탄생하게 되었을까?
그곳은 일제 강점기에서 막 벗어났던 해방정국부터 시작되었다. 해방이 되자 이승만 정권은 민족주의자와 독립운동가들을 딛고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친일 경찰과 친일 헌병대 출신으로 구성된 이른바 ‘특무부대’를 만들었다. 방첩을 표방했지만 사실은 이승만에게 반대하는 세력들을 사찰하고 탄압하기 위한 일종의 친위부대였던 셈이다.
그렇지 않아도 친일 행각으로 해방 조국의 무서운 심판을 기다리던 자들에게 하늘에서 내린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독립운동가를 잡아 고문하던 고등 경찰과 헌병대 출신들이 일약 반공을 표방한 이승만 정권의 애국자로 둔갑했다.
일제 강점기 헌병 출신으로 악랄하기로 소문났던 김창룡이 특무부대장이 되었다. 그는 친일의 죄과를 덮고 출세의 길로 가기 위해 이승만에게 맹목적인 충성을 바쳤다.
친일분자인 그들이 내세울 수 있는 슬로건은 오로지 ‘반공’밖에는 없었다. 그들은 ‘반공’의 깃발 아래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했고, 일제 강점기 때부터 익혀둔 고문과 폭력의 기술을 최대한 발휘했다. 그리고 이승만 정권은 그것을 최대한 활용했다.
그때부터 군인들에 의한 군대 사찰, 정치 사찰, 민간인 사찰이라는 보안사 군사 권력이 거대한 괴물로 태어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5·16군사쿠데타로 군인들이 이제 공식적으로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나자 특무대는 다시 방첩부대로 명칭을 변경하였다가 다시 육군보안사령부를 거쳐 국군보안사령부(보안사)로 거듭 상승하게 되었다. 그리고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이 군 내부를 감시하고, 나아가 사회 전반을 감시하는 도구로 중앙정보부와 함께 막강한 권력을 부여했다. 지역 보안부대장인 대령이 별 세 개인 군단장에 맞먹는 세력을 가지도록 한 것이다.
그곳을 보금자리로 해서 탄생한 것이 바로 1980년대 전두환 신군부였다. 전두환 신군부는 그야말로 보안사가 만들어낸 보안사 권력이었다. 차기 정권을 기획하고, 정당을 만들고, 헌법을 만들고, 두 명의 대한민국 대통령과 참모총장, 정보부장, 국회의원들을 만들어냈다. 그야말로 보안사 천국이 된 것이다.
그곳 출신인 누군가는 말했다.
“일단 명령만 떨어지면 인륜을 무시한 행동까지도 서슴없이 할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생리다.”
그리고 누구에게도 노출되기를 꺼리는 것처럼 높은 담장에 싸인 채 서울 한복판 서빙고에 자리하고 있었다.
군인들이 운영하는 군인들의 기관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오로지 충성과 그에 대한 보상으로 주어지는 진급, 그리고 포상밖에 관심이 없었다. 국가니 민족이니 반공이니 애국이니 하는 것은 그냥 거추장스러운 장식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끊임없이 ‘간첩 사건’을 조작하고 만들어내지 않을 수 없었다.
재일교포 3세로 모국에 와서 연세대학교 대학원에 다니고 있던 김병진 씨도 그런 경우 중의 하나였다. 퇴근길에 느닷없이 보안사 요원에 의해 끌려가 서빙고호텔에서 온갖 고문과 고초를 당한 다음, 그들의 강요로 프락치 아닌 프락치 생활을 해야 했다. 그리고 그는 나중에 자신이 직접 경험했던 일이나 그곳에서 보았던 일들을 기록으로 남겼다.
김병진 씨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천인공노할 짓을 서슴지 않았던 자들이 훈장을 받고, 포상금을 나누고, 해외여행을 다녀오고, 지금은 정년퇴직을 하여 나라에서 주는 연금으로 호의호식하며 살고 있는데, 그 피해자와 가족들은 인생이 파괴되고 고문 후유증과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괴로워하고 주위의 눈총까지 받으며 살아야 하는 비참한 현실 앞에서 우리는 결코 과거사 청산이 끝났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악명 높았던 보안사 서빙고 분실은 1990년 윤석양 이병의 양심선언 이후 영원히 폐쇄되었다. 국군보안사령부는 세월호 유가족 사찰, 박근혜 정부의 계엄령 준비 계획 등으로 만신창이 되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군사안보지원사령부로 새롭게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 상처는 여전히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