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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을 위한 행진곡 이야기

광주항쟁의 빛, 윤상원

어둠이 밀려오고 있었다. 진군해 오는 계엄군처럼 망설임 없이, 가난한 예술의 도시 광주를 뒤덮어 오고 있었다. 한 줄기 작은 빛은 오로지 전남도청에만 남아, 서서히 꺼져가고 있었다. 연민의 시간이었다. 서른 살의 청년 하나가 한 무리 고등학생들과 여대생들 앞에 서서 말하고 있었다. 시민투쟁위원회 대변인 윤상원이었다. 짙은 눈썹 아래 깊고 큰 눈이 인상적인 곱슬머리의 미남이었다. 

“이제 여러분은 집에 돌아가십시오. 가서 여러분이 겪은 일을 사람들에게 전하십시오. 여러분은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았습니다. 우리들의 항쟁을 잊지 말고 후세에도 이어가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는 패배할 것입니다. 그러나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 것입니다. 계엄군이 밀려오기 전에 어서들 도청에서 떠나기 바랍니다.”

여기저기서 흐느끼는 소리가 났다. 나가지 않겠다고 울부짖는 고등학생도 있고, 말없이 고개를 숙인 채 빠져나가는 학생도 있었다. 윤상원은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돌아섰다.

외국인 취재기자들이 시민투쟁위원회 대변인을 찾고 있었다. 마지막 기자회견이었다. 윤상원은 그들 앞에서도 같은 말을 했다. 

“우리는 오늘 여기서 패배하지만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 것입니다.” 

<르몽드> 기자가 물었다.

“협상의 여지는 없습니까?”

윤상원은 또박또박 말했다.

“계엄군에게 무기를 반납하자는 사람들이 있긴 합니다. 하지만 그건 일방적인 투항일 따름입니다. 계엄군의 보복은 불을 보듯 뻔합니다. 일부 수습위원들이 군과 협상 중입니다만 성과는 전혀 없습니다. 계엄군은 무조건 무기반납만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협박만 일삼는 그들과 무슨 협상을 할 수 있겠습니까?”

도청과 주변 건물에 배치된 저항군은 150여 명밖에 되지 않았다. 무장헬기에 탱크와 장갑차까지 갖춘 병력의 상대가 될 수는 없었다. <볼티모어 선> 기자가 물었다.

“우리 같은 외부인의 눈으로 볼 때, 계엄군은 시내로 진격해서 광주를 탈환할 수 있는 압도적인 화력이 갖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대학생 투사들의 무장은 계엄군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데, 저항하다 죽을 각오가 되어 있습니까, 아니면 항복할 겁니까?”

외신기자들은 그를 ‘매우 인상 깊은 눈빛을 가진 젊은이'라 쓰고 있었다.

윤상원은 그 인상 깊은 눈으로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엷은 미소를 띤 채 짧게 답했다.

“우리는 최후까지 싸울 것입니다.”

기자회견이 끝나고, 외국인 기자들마저 빠져나간 도청에는 시신 썩는 악취와 향 연기만 자욱이 깔려 있었다. 열흘째 거의 잠을 못 잔 남은 사람들은 죽음의 향기에 취한 듯 소총을 껴안고 의자에 기대거나 책상에 엎드려 선잠에 빠져들었다.

죽음은 밤의 어둠이 걷히기 전에 이들을 덮쳤다. 1980년 5월 27일 새벽이었다. 도청 건물 2층 민원실에 남아있던 윤상원은 복부에 총을 맞고 그 자리에서 숨졌다. 

들불야학의 꽃 박기순

1978년 12월 25일, 성탄절 오후였다. 광주시 변두리 야산에서 이십대 초반의 남녀 몇몇이 땔나무를 하고 있었다. 들불야학에서 공부하는 노동자들과, 강학이라 불리던 대학생 강사들이었다. 남자 강학 하나가 자른 나무들을 끌어 모으며 물었다.

“기순 누나! 상원 형 방에서 밤샘토론을 했다면서요? 좋은 이야기들이 좀 나왔어요?”

이틀 전, 윤상원의 시민아파트 자취방에서 야학운동의 장기적인 전망이라는 주제로 열린 작은 토론회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누나라 불린 23살의 여자 강학 박기순은 이마의 땀방울을 닦으며 말했다.

“지식인의 허위의식을 극복하고 기득권을 포기해야 한다는 얘기들을 나눴지. 민주화운동은 말이나 글이 아니라, 관념이 아니라, 현장성 있는 행동이 중요하다는 결론!”

“지루했겠네요?”

후배의 말에 박기순은 한바탕 소리 내어 웃으며 등을 가볍게 때렸다. 유난히 맑은 웃음소리였다. 

전남 보성의 가난한 농가에서 7남매 중 막내딸로 태어난 박기순은 노동자, 농민에 대한 애정이 깊었던 따뜻한 마음의 처녀였다. 전남대 국사교육과 3학년 재학 중이던 이 해 봄부터 광천공단 노동자들을 위한 야학 준비에 앞장서고 있었다. 마침 6월 29일 전남대에서 벌어진 민주화시위에서 마이크를 잡았다가 강제로 휴학을 당하는 바람에 더욱 야학 개설에 매진할 수 있었다. 광천공단 근처에 있는 광천동 천주교회의 교리실을 빌리고 들불야학이라는 이름도 그녀가 지었다.

또한 10월부터는 광천공단의 동신강건사에 취업해 노동자 생활을 하고 있었다. 노동자들의 삶은 어디에서나 척박했다. 박기순도 다른 여성노동자들과 똑같이 장시간의 고된 노동에 시달리면서도 밤이면 야학당에서 공부를 가르치고 함께 이야기 나누는 것을 행복해 했다.

여기에 든든한 지원군으로 나서준 이가 7살 많은 학교 선배 윤상원이었다. 전남대 정치외교학과 재학 중에 민청학련사건으로 14년 형을 선고받았다가 특사로 석방된 이력이 있는 그는 원칙적이고도 열정적인 사람이었다. 윤상원은 졸업 후 서울에서 은행원으로 근무하다가 ‘우리의 교육지표 사건’ 이후 사표를 내고 광주로 내려와 광천공단에 노동자로 취업하고 박기순의 권유로 들불야학 강사를 맡고 있었다. 시민아파트에 얻은 윤상원의 사글셋방은 들불야학의 본부가 되었다. 그 비좁은 방에 스무 명이 넘게 모여 학습하고 밥을 해먹으며 모든 일을 함께상의했다. 박기순의 맑은 웃음소리와 윤상원의 그윽한 눈빛은 너무나 잘 어울렸다. 

“어서들 와, 들아가자!”

박기순의 외침에 야학생들과 강학들은 제각기 들고 온 나무를 리어카에 쌓았다. 영하의 산허리를 헤매며 해온 나무는 모두에게 따뜻한 성탄절 저녁을 선사해 주었다. 

며칠째 거의 잠을 못잔 박기순은 다음날인 12월 26일에도 밤 10까지 야학에서 노동자들을 가르치고 오빠의 집에 있던 자기 방에 들어가 깊은 잠에 빠졌다. 그리고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방문 틈으로 스며든 연탄가스에 중독된 것이다.

박기순의 죽음은 광주지역 민주화운동권에 큰 슬픔을 안겨주었다. 장례식에 모인 많은 사람들은 가수 김민기가 선창하는 <상록수>를 따라 부르며, 비바람 불고 눈보라 쳐도 저 들판의 소나무처럼 푸르렀던 그녀의 삶을 애도했다.

빛의 결혼식


윤상원이 사망한 지 2년이 되어가던 1982년 2월 20일. 군사독재의 폭압처럼 매서운 겨울바람에 흙도 공기도 얼어붙은 듯 추운 날이었다. 광주항쟁으로 사망한 이들이 묻힌 망월동 공동묘지에서는 특이한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박기순과 윤상원의 영혼결혼식이었다. 

결혼식장에는 신방에 쓸 이불이며 옷가지가 두 영혼을 위해 마련되었다. 여느 결혼식처럼 친지와 벗들은 축의금을 내고 인사를 주고받았다. 

양가의 가족친지를 비롯한 참석자들이 눈물로 지켜보는 가운데 진행된 영혼의 결혼식은 노래극 <빛의 결혼식>으로 절정을 이뤘다. 특히 맨 뒷부분에 나온 <임을 위한 행진곡>은 비장하면서도 쉽게 따라 부를 수 있는 곡으로 참석자들의 기억에 남았다.

패배할 줄을 알면서도 끝까지 싸웠던 광주항쟁의 주인공들을 기리는 노래극 <빛의 결혼식>은 언론도 출판도 통제된 1981년 봄, 문화행사를 통해 광주항쟁의 진상을 알리자는 뜻으로 뭉친 광주지역 문화인들에 의해 창작되었다. 

마지막을 장식한 <임을 위한 행진곡>은 윤상원과 박기순으로 상징되는 주인공 남녀가 영혼결혼식이 끝나고 자신들의 죽음 때문에 슬퍼하고 괴로워하는 산 자들을 격려하고 투쟁을 독려하는 내용으로 살아남은 이들에게 남기는 유언과도 같은 노래였다.

먼저 간 투사들의 분에 겨운 사연들이

이슬처럼 맺히고 어디선가 흐느끼는 소리 들리리니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싸움은 용감했어도 깃발은 찢어져

세월은 흘러가도

굽이치는 강물은 안다.... <묏비나리 중>

노랫말을 고민하던 중 백기완이 광주항쟁을 소재로 쓴 장편 서사시 <묏비나리>에서 찾아낸 구절을 인용하고 소설가 황석영이 가사를 다듬었다. 곡은 당시 전남대 경영학과에 재학 중이던 김종률이 썼다. 

경찰의 감시를 피해 황석영의 집 밀폐된 골방에서 이동식 카세트 녹음기를 이용해 조악하게 녹음된 노래극은 이날 영혼결혼식에서 처음 공개되었다. 이후 녹음테이프에 복사되거나 악보만으로, 혹은 구전으로 전국으로 번져 나가 민주화운동권에서 제2의 애국가처럼 불리게 된다.

오랫동안 재야에서 불리던 ‘묏비나리’는 1990년 시집 ‘젊은 날’에 실림으로써 정식 출판물로 수록되었고, ‘임을 위한 행진곡’도 1991년 ‘노래를 찾는 사람들’ 3집 음반에 공식적으로 실리면서 ‘불법’ 딱지도 떼게 되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빛의 결혼식> 이후 민주화운동의 현장에서 시작과 끝을 알리는 노래로, 각종 집회에서는 시민들과 소통하는 노래로 불려지고 있다. 나아가 중국, 대만, 홍콩, 말레이지아, 태국, 캄보디아 등지에서도 현지어로 번안되어 불리고 있다. 수출된 운동가요가 된 것이다. 2015년 여름 오사카에서 열린 ‘광주 5·18민주화 투쟁 35주년 기념집회’에 참석한 수백 명의 일본 철도노동자들이 합창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박기순과 윤상원의 유해는 1997년 5월, 광주 망월동에 새로 조성된 5.18 국립묘지에 합장되었다. 

글 안재성

1989년 장편소설 <파업>으로 전태일문학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이후 대표작으로 <사랑의 조건>, <황금이삭>, <경성트로이카>, <연안행>,등의 장편소설과 <이현상 평전>, <박헌영 평전> 등의 인물평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