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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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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 그 날을 기록해 보지 않겠능가? 

광주천변에는 아직 늦여름이 남아 있었다. 멀리 무등산 정상은 단풍으로 덮여가고 뚝방 곳곳에 가을꽃들이 피어나고 있었지만 버드나무며 벚나무들은 칙칙해진 녹음을 벗지 못하고 있었다.

“미행하는 차 없능가?”

삼십대 초반의 운전사는 연신 백미러를 살펴보며 천천히 하천변 도로를 따라 트럭을 몰았다. 광주항쟁 때 시민군 지도부로 활동하다 감옥살이를 했던 정상용이었다.

“예. 없는 것 같습니다.”

여러 살 젊은 동행자도 긴장을 풀지 않고 답했다. 역시 광주항쟁 때 시민군으로 활동하다 감옥살이를 하고 나와 복교한 전남대생 이재의였다. 정상용은 단도입적으로 말했다.

“자네, 오월항쟁 기록을 정리해보지 않겠능가? 그동안 우리가 모은 자료로 백서를 출간하려는디, 자네가 글 좀 쓴다며?”

“그 날의 이야기를 합법적으로 출간하는 게 가능합니까?”

“절대 불가제. 아무리 비밀리에 집필을 해도 들통이 날 테니 3년에서 5년은 감방살이를 해야 할 거여. 고문당해 죽을 수도 있고. 어째, 할 수 있것능가?”

갑작스런 제의에 이재의는 선뜻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피로 얼룩졌던 그날들이 떠올랐다. 이제 검붉은 핏자국들은 지워졌으나 사람들 마음속의 공포와 분노는 조금도 씻기지 않은 1984년 10월 초였다. 금남로에 흐르던 핏물이 가슴에 차올라 숨을 틀어막는 기분이었다. 이재의가 확답을 못하자 정상용은 트럭을 세워 내려주며 말했다.

“잘 생각해 보고 각오가 서면 답해 주게. 기다리겠네.”

천변을 따라 집으로 걷는 이재의의 눈에 점점이 핀 가을꽃들이 들어왔다. 소슬한 바람에 흔들리는 붉은 코스모스만 보아도, 핏덩이처럼 검붉은 맨드라미만 마주쳐도 그날의 피가 연상되었다. 계엄군에게 당했던 끔찍한 고문과 모욕적인 기합과 구타가 떠올랐다. 더구나 얼마 후면 결혼식을 올릴 몸이었다. 하지만 고민은 오래 가지 않았다. 길바닥에 뒹굴던 젊은 주검들의 기억이 두려움을 덮어 버렸다.

이틀 후, 정상용을 찾아간 이재의는 흔쾌히 말했다.

“해보겠습니다. 설마 죽이기야 하겠습니까?”

정상용은 활짝 웃으며 그의 손을 움켜쥐었다.

“고맙네. 살아남은 우리가 이 일도 안하면 먼저 가신 동지들을 어찌 보것능가? 고맙네.”

 통곡으로 쓴 <광주백서>

창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는 울먹이기 시작했다.

“총을 쏠 수가 없드라고. 물체가 아무것도 보이지를 않는 거여. 계엄군이 전기를 다 꺼버렸응께. 사방에서 총탄이 날아와 여기저기 쓰러져 오는데 우리는 어디로 쏴야할지…”

경찰 몰래 시민군 출신들을 면담하는 중이었다. 울지 않고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계엄군 놈들이 소리치는 것이여. 방 안에 있는 폭도들 전부 총을 버려라, 일곱 셀 동안 안 나오면 수류탄을 던진다고 말이여. 열도 아니고 일곱이여. 죽일 놈들! 죽일 놈들…”

동료의 시신을 넘어 양손을 들고 나가는 장면에서 그는 기어이 통곡을 터뜨리고 말았다. 수첩에 받아 적던 이재의도 참지 못하고 눈물을 닦았다.

광주항쟁에 관한 기록이 시작된 것은 1980년 11월부터였다. 감옥살이를 하고 나온 전남대 출신 조봉훈, 정용화 등이 앞장섰다. 이듬해 여름까지 항쟁 당시의 성명서와 병원 진료 기록, 구속자들에 대한 공소장과 판결문 등의 관련자료를 수집하였다. 전남대 인근 신안동에 있던 조봉훈의 자취방이 비밀 본부였다. 서울 외국어대 재학중 시위로 수배되어 있던 소준섭이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기록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 과정에서 관련인사들을 비밀리에 만나 인터뷰를 해 각종 소문과 진위 여부를 객관적으로 분별하였다. 기록의 진실성을 담보하고자 함이었다.

도중에 유인물 살포사건으로 10여 명이 구속되는 등 우여곡절을 격는 속에서도 이들의 작업은 1982년 <광주백서>라는 제목의 42쪽짜리 짧은 팸플릿으로 발간되어 광주항쟁의 진상을 전국적으로 알리는 역할을 했다. 인천 구월동에 있던 김근태의 아파트가 근거지가 되었다.

본격적인 백서작업은 구속자들이 석방된 1984년 가을부터 재개되었다. 정상용의 의뢰를 받은 이재의는 광주고 동창생인 조양훈에게 공동작업을 제안하고 전용호 등 전남대 후배들을 가담시켜 1985년 1월부터 본격적으로 작업을 시작했다. <광주백서> 작업자들이 이전에 수집한 자료들도 모두 넘겨받았다. 둘 다 갓 결혼한 이재의와 조양훈의 신혼방이 작업실이었다.

목표는 그 해 5월 18일에 책을 내는 것이었다. 작업은 신속하게 체계적으로 진행되었다. 자료를 검토하는 과정에서 나온 핵심인물 40여 명을 면담하여 이재의가 연필로 이를 정리하면 최동술이 타이핑을 했다. 조양훈은 날짜별로 시민군과 계엄군의 대치 상황을 지도로 그려냈다. 서울대 상대 출신으로 <알기 쉬운 한국경제>를 낸 임상택은 인세의 일부를 활동비로 지원하고 있었다.

“기운 내십시오. 우리의 투쟁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겁니다.”

긴 시간 면담을 마친 이재의 일행은 고문후유증으로 거동이 불편한 그가 경찰에 재연행되지 않도록 백서에는 가명을 쓰겠다고 약속한 후 그 집을 나왔다. 밖에는 여전히 눈이 쏟아지고 있었다.

 기억의 전쟁

대학가 술집은 밤이 오기도 전부터 복작거렸다. 한 탁자에서 벌어진 논쟁도 이미 술에 취해 있었다.

“광주사태는 간첩들이 배후조정해서 일어난 거 아이가? 김대중이 북괴하고 내통해서 폭동을 일으켰다카드라.”

광주항쟁 당시 초등학생들이던 경상도 출신 신입생들의 방담이었다. 다른 학생도 말했다.

“근데 와 엉뚱하게 살인마 전두환과 노태우를 처단하라카노? 대통령한테 대머리니 노가리라 카는 것도 영 듣기 거북하드라.”

한 학생만 아까부터 아무 말도 않고 있었다. 그는 먼저 일어나며 입을 열었다.

“먼가 이유가 있으니까 그러는 거 아이겠나? 내는 먼저 간데이.”

비틀거리며 정류장으로 향하던 그는 문득 작은 책방 앞에 멈춰 섰다. 5월 들어 계속되는 반정부시위에 대한 궁금증을 참을 수 없었다.

“저, 광주사태에 대해 알고 싶은데요, 좋은 책 좀 없습니꺼?”

젊은 서점 주인은 엷은 미소를 띤 채 그를 살펴보더니 서가 안쪽에서 시커먼 표지의 책을 한 권을 꺼내왔다. 전남사회운동연합 편, 황석영 기록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라는 긴 제목이었다.

“이 한 권이면 광주에서 벌어진 일을 다 알 수 있어요. 사진집도 있는데 다음에 와서 사가요.”

석 달 만에 완성된 백서의 초고는 원고지로 수 천 장 분량이나 되고 중복된 부분이나 허술한 문장이 많았다. 이름이 알려진 작가가 한 권으로 정서해 출간하는 게 좋겠다는 의견들이 나왔다.

처음부터 이 작업에 관여해온 김근태, 신동수, 정상용, 채광석 등은 소설가 황석영에게 정서를 부탁했고 풀빛출판사 대표 나병식이 출간을 자청했다. 다른 저명작가들이나 출판사가 거절한 상황에서 두 사람의 용기는 대단한 것이었다. 제목은 문병란의 시 ‘부활의 노래’에서 따왔다.

예상대로, 책은 나오자마자 1만부가 압수되고 나병식이 구속되는 등 극심한 탄압을 받았다. 그러나 전국의 서점가와 학생운동, 노동운동권에서 비밀리에 대대적으로 판매가 이뤄져 당시 유행하던 ‘지하 베스트셀러’의 하나가 되었다. ‘너머너머’라는 약칭으로 불리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의 대성공은 광주항쟁을 둘러싼 기억의 전쟁에서 승리했음을 의미했다.

전철역 입구에는 전경과 형사들이 불심검문을 하고 있었다. 무작위로 젊은이들을 붙잡아 ‘검문 좀 하겠다’는 한 마디만 하고는 마음대로 가방을 뒤져 사회과학 서적이나 유인물이 나오면 곧바로 끌고 가는 것이었다. 놀란 그는 새 책이 든 가방을 움켜쥐고 뒷골목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날 밤, 그는 몇 번이나 책을 덮어야 했다. 공수부대와 계엄군의 잔혹한 살인 장면들 때문이었다. 초등학생이던 당시의 정치상황에 대해 전혀 모르는 데다 보통 사람들이 잘 쓰지 않는 운동권식 사투리도 자꾸 독서를 막았다. 그러나 이내 다시 펼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동안 자신이 가지고 있던 상식들과 싸우기 시작했다. 남녀 젊은이들이 총과 대검에 살상되는 장면에서는 분노로 눈물을 흘렸다. 시민군이 도청을 점령하는 장면에서는 환희에 차서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광주사태’는 ‘광주항쟁’으로 그의 마음속에서 바뀌어 가고 있었다.

얼마 후 그는 학생회 간부에 당선되어 가두시위를 주도하다가 감옥까지 가게 된다. 석방 후에도 민주화운동에 젊음을 바친다. 그것은 온전히 ‘너머 너머’의 힘이었다.

글 안재성

1989년 장편소설 <파업>으로 전태일문학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이후 대표작으로 <사랑의 조건>, <황금이삭>, <경성트로이카>, <연안행>,등의 장편소설과 <이현상 평전>, <박헌영 평전> 등의 인물평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