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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광주! - 광주비디오 제작이야기
1980년 5월, 프랑스의 공영 지상파 방송 F2와 독일 공영 ARD는 거의 열흘 동안이나 톱뉴스로 자기네들로부터 멀리 떨어진 아시아의 끄트머리 광주라는 생소한 이름의 도시에서 벌어진 대한민국 군인들의 무자비한 살육과 그에 맞선 시민들의 항쟁을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전두환 신군부의 잔혹한 진압 광경은 그곳의 시청자들에게 이렇게 묻게 했다. “도대체 광주사람들은 그 나라의 이교도들인가 아니면 소수민족인가?” 후일 두고두고 회자되는 이 말은 참으로 ‘광주사람들’을 포함한 대한민국 사람 모두를 오랫동안 부끄럽게 했다. 서양에서는 전쟁이라는 예외적인 상황을 제외하고 과거 이교도들에게 가했던 종교탄압이나 유대인 혹은 집시와 같은 소수민족에 대한 집단학살이 아니고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 개화된 문명의 시대에 광주라는 곳에서 발생했던 것이다. 프랑스나 독일 등 대부분의 유럽인들은 발칵 뒤집혔다. 하물며 같은 피를 나눈 해외동포들의 슬픔과 분노와 부끄러움은 시간이 갈수록 더해 갔다.
그런데 미국은 경우가 조금 달랐다. 계엄군의 광주로의 이동과 발포 등 그 책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이유에서 인지, 광주의 사태를 대하는 미국정부나 언론의 태도는 소극적이었다. 신문이나 방송에서도 많이 다루지 않았다. 인터넷으로 전 세계의 소식을 실시간으로 공유할 수 있는 지금과 달리 그때는 텔레비전과 라디오, 신문이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시대였다. 기밀문서 공개법에 따라 후일 밝혀진 ‘체로키 문서’에 따르면 당시 미국 대통령과 국무부 장차관, 주한미국대사 등은 1980년 5월 21일에 계엄군이 전남도청 앞에서 집단발포를 감행한 뒤 긴급국가안보회의를 열어 후속조처를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들은 이에 앞서 공수특전단의 광주 투입을 사전에 알았으며, 진압군으로 광주에 투입된 국군 20사단의 이동을 승인했던 것이다. 당시 미국 정부의 이런 입장을 당연히 모르고 있던 많은 이들은 미국의 태도에 실망했다.
그러한 정황 속에 제네바에서 세계기독교교회협의회(WCC) 활동을 하다가 때마침 뉴욕으로 온 박상증 목사는 광주항쟁에 대한 사실을 제대로 알리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하다고 생각했다. 객관적이고도 효과적으로 광주를 알리는 데 비디오만큼 생생하게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전달할 수 있는 결정적인 것은 없을 것이라 판단했다. 박 목사는 재미교포 민승연 씨 등과 비디오를 제작하기로 결심했다. 물론 기존의 방송매체들이 방영했거나 방영을 위해 수집한 영상들을 모아서 편집하는 것이다. 외국인들을 위해선 영문으로 그리고 한국인들을 위해서는 한글판으로 만들어 미주를 비롯한 해외와 국내에 발송하여 광주학살의 진상을 알리고 싶었다. 광주항쟁이 북한의 공작이나 사주에 의한 것이라거나 일부 폭도들에 의한 난동이라는 독재정권과 일부 언론의 왜곡과 폄하로부터 벗어난 객관적 사실을 알리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했다. 심지어는 ‘북한군 600여 명이 광주에 잠입해 폭동을 조종했다.’는 일부 극우세력의 선동적인 주장이 떠돌아다니는 실정이었다. 그래서 아무도 광주에서 일어난 일을 선뜻 입에 담지 못했다. 언론은 권력에 의해 재갈이 물린 상태였으니 광주의 진실이 알려지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살육의 광풍을 맨몸으로 맞선 광주에서의 처절한 항쟁이 끝난 그해 여름, 살아남은 자는 살아남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슬픔과 괴로움의 무게를 견디기 어려웠다. 광주에서 벌어진 희대의 비극을 제대로 알려냄으로써 분노를 조직화하며 광주에서의 항쟁정신과 투쟁과정에서 광주사람들이 보여줬던 빛나는 대동정신에 공감하고 연대하는 이들을 만들어내는 일이야말로 목숨으로 지켜내려 했던 민주주의에 대한 최소한의 의무이자 예의였다. 그것은 조국을 떠나 머나먼 이국땅에서 그나마 할 수 있는 일이었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다. 비록 독재에 맞서 생명을 바쳐 직접적으로 싸우지는 못하지만 이 또한 군사독재정권과 싸우는 일이었다. 생각이 이에 미치자 서둘러 뜻을 함께하는 이들과 일에 착수했다. 영상매체를 제작하거나 편집하는 일에 당연히 문외한이었지만 정의의 하느님이 함께할 것이라 굳게 믿고 기도하는 심정으로 작업을 시작했다.
먼저 조지 오글 목사나 메리놀 선교회의 제임스 시노트 신부 등과 긴밀히 상의하며 제작 방식을 고민했다.
오글 목사는 일본 쪽에서 제작된 비디오를 갖고 와서 보여주었다.
당시 미국이나 일본 독일 등의 교포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입수한 비디오를 동포들과 유학생 사회에서 방영하며 공분을 나누고 있었다.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선총련) 쪽에서 발 빠르게 제작한 비디오가 눈뜨고 쳐다보기 힘든 처참하고 생생한 장면을 가감 없이 보여주어서 동포들과의 회합에서 상영되곤 했는데, 박 목사는 그걸 사용했다가는 오히려 ‘북한의 대리인’으로 오해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시노트 신부는 “내가 영국 BBC가 촬영한 영상을 들고 다니면서 전두환 정권 규탄을 했잖아. 그런데 BBC 에이전트가 저작물 무단사용이라며 날 고소했지. 하지만 법원은 상업용도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며 봐줬지. 그러니 차라리 CBS 영상을 사용하는 게 어떤가?”고 제안하기도 했다. 그의 말에 용기를 얻은 박 목사는 독일 ARD의 지역방송인 북부독일방송 NDR의 외신기자 위르겐 힌츠페터가 직접 광주로 가서 항쟁과 학살의 생생한 장면을 찍어 방영했던 것과 전체 원본 등을 구했다. 그리고 일본의 NHK, 미국의 NBC에서 제작 보관한 영상들도 구해 모았다.
비디오 제작을 책임질 위원회는 외과의 김마태 박사, 구춘회(North America Coalition for Human Rights in Korea), 김윤철 사장, 박상증 목사 등 뉴욕 거주 한국인 민주인사들로 구성되었고, 사무실은 민주동지회 뉴욕사무실(UN Plaza N.Y.)을 이용했다.
또 후일 뉴욕한인회 회장을 역임했던 재미교포 민승연도 마침 ABC TV에 근무하고 있던 강석희를 통해 그 방송국의 테이프를 입수했고, CBS의 자료 등도 구했다. 그러나 두 방송국의 분량을 모두 합해도 20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민승연은 후일 국내 인터뷰를 통해 당시 자료를 구하는 일은 미국 내에서 불법이고 분위기도 좋지 않아서 “언제 해코지를 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생명보험을 들 정도”였다고 전한다.
그들은 우여곡절 끝에 편집을 맡아줄 이를 찾았다. 베트남전 고엽제 후유증 환자들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한 바 있던 여성이었다. 그녀는 뉴욕에서 활동하는 유명한 한국인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에게 이일을 맡기면 어떻겠냐고 제의했다. 그녀의 제안을 받고 몇 차례 백남준에게 메시지를 보냈으나 답이 없었다. 결국 그녀가 직접 도와주기로 했다. 그녀는 거의 무료로 편집을 해주었다. 밤새 비디오를 보며 편집을 하던 그녀는 우느라 눈이 퉁퉁 부었다. “이걸 보니 너무 가슴이 아프다. 이걸 편집한 것만으로도 내겐 큰 영광이다.”고 했다. 그녀의 연대는 작업을 하던 이들에게 큰 힘이 되었고 격려가 되었다. 시나리오는 동아일보 기자 출신인 심재선이 쓰기로 했다. 당시 상업용 스튜디오 사용료는 시간당 320달러였다. 수소문 끝에 주정부와 연방정부의 도움으로 시간당 5달러에 사용할 수 있는 스튜디오를 찾았다. 김마태 박사가 필요한 자금을 댔고, 회계는 김윤철 장로가 맡았다. 박 목사는 틈틈이 영상 제작과 관련한 책을 읽으며 일주일에 2~3번 스튜디오에서 작업을 한 결과 6개월 만인 1981년 부활주일 새벽에 33분짜리 비디오가 완성되었다. 완성본을 복사하여 미국 내를 포함하여 한국, 일본, 독일, 오스트리아, 캐나다 등의 주요 언론사에 보냈다.
드디어 광주항쟁이 일어난 지 1년이 되던 1981년 5월 18일, 뉴욕 리버사이드교회에서 ‘광주의거 1주년 추모대회’가 열렸다. 480석의 좌석에 7백여 명의 교포가 입추의 여지없이 들어찬 가운데 「오 광주!」가 상영되었다. “우리 먼저 분명히 해두자. 1980년 그 5월, 총을 든 광주의거의 주역들은 애국가를 소리 높여 부르던 대한민국의 선량한 국민이었다.”라고 남자 성우의 내레이션이 끝나면 이어서 시위 군중들의 애국가가 흘러나오며 비디오는 시작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화면을 가득 채운 끔찍하고 잔인하게 짓뭉개진 시신들의 모습을 끝까지 제대로 본 청중들은 아무도 없었다. 교회 안은 온통 흐느낌으로 울음바다가 되었다. 교민들의 요구로 연속 3번이나 상영되었다. 추모행사를 마치자마자 비치되었던 비디오는 순식간에 판매되어 동이 났다. 그 후 매년 광주를 기념하는 추모행사 때 「오 광주!」는 판매되었고, 수익금은 현지에서의 민주화운동과 광주항쟁유가족 돕기에 쓰였다. 교포신문에 광고를 내어 일반인들에게 배송료만 받고 발송한 분량이 4천 개가 넘었다.
이렇게 제작된 비디오의 원본은 관례상 북미비디오협회에 보관되었으며, 후일 2008년이 되어서야 제작자인 박 목사의 요청에 따라 한국의 국사편찬위원회로 이송되었다. 비디오테이프 「오 광주!」의 제작과 상영은 1987년 5월에 천주교 광주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정평위)가 만든 비디오테이프 「5월 그날이 다시오면」이 광주가톨릭센터 등 몇 군데서 상영되기 시작한 것보다 6년 앞선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