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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민련과 분신정국 - 죽음의 굿판이었나, 희망의 몸부림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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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이럴 수가 있어?”

밖에서 들어온 민수가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손에 꾸깃꾸깃 접은 신문이 들려 있었다.

“왜?”

“글쎄. 이걸 봐! 오늘 짜 조선일보야. 김지하 시인이 쓴 글이 일면에 대문짝만하게 나왔는데, 그 제목이 뭔지 알아? ‘죽음의 굿판 걷어치워라’, 야. 죽음의 굿판....!”

민수가 보란 듯이 신문을 홱 집어던지며 말했다.

“죽음의 굿판?”

“응. 지금 이 분신해서 죽는 젊은이들이 그 사람 눈엔 무슨 굿판이라도 벌이고 있는 것처럼 보인 모양이지? 누군 죽고 싶어서 죽나? 그렇게 온 몸을 던져 희생해 간 사람들의 열정과 순수성을 모욕해도 유분수지. 안 그래?”

“가만있자. 흥분하지 말고.”

윤기는 일단 민수의 흥분을 가라앉혀 놓고 민수가 던져놓은 신문을 집어들었다. 과연 거기엔 김지하 시인이 쓴 글이 대문짝만 하게 실려 있었다. 특유의 짧고 강한 총알같은 문장이었다.

‘젊은 벗들! 나는 너스레를 좋아하지 않는다. 잘라 말하겠다. 지금 곧 죽음의 찬미를 중지하라. 그리고 그 굿판을 당장 걷어치워라. 당신들은 잘못 들어서고 있다. 그것도 크게! (중략)... 당신들은 민중에게서 무엇을 배우고자 외쳤는가? 어떠한 경우에도 포기하지 않는 끈질긴 생명력과 삶의 존중, 삶의 지혜를 놓아두고 도대체 무엇을 배우고자 하는가? (중략)... 부디 자중자애하라, 부디 절망하지 말라. 절망은 폭력과 죽음, 그리고 종말의 서곡이다.’

글을 다 읽고 난 윤기는 한동안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 역시 한 시대를 온몸으로 싸워왔던 시인 중의 하나가 아닌가. 절망적인 박정희의 군사독재에 맞서 홀로 감옥에 십여 년을 갇혀 살면서 생명의 소중함을 깨닫고, 시와 사상으로 이 어둠을 깨쳐나가고자 선구적으로 노력했던 사람이 아닌가. 아직 윤기와 그 또래의 친구들의 가슴 속엔 김지하가 지은 노래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도 너를 잊은 지 너무도 오래....”로 시작되는 ‘타는 목마름으로’ 가 깊이 각인되어 있었다. 그런 그가, 피를 토하듯 ‘오적’을 썼고 스스로 죽음을 넘어 온 그가, 왜 이런 때 이런 글을 쓰게 되었을까.

윤기는 혼자 생각에 잠겼다. 

1991년 4월 26일.

등록금 인상에 반대하는 학원자주화 투쟁에 참여한 명지대 1학년 강경대 군이 백골단 소속 사복경찰의 쇠파이프에 구타당해 사망해버린 끔찍한 사건이 벌어졌다. 

꽃다운 1학년. 풋내 가득한 새내기. 갓 입학하여 수강 신청한 과목들을 들으며 친구들과 좀 더 즐거운 캠퍼스의 낭만을 만끽할 새도 없이, 한 젊음이 야만적인 경찰의 폭력에 맞아죽은 것이다.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던 이한열 열사가 최루탄에 맞아 죽은 지 채 5년도 되지 않은 해였다. 그리고 이 날부터 약 한 달간, 연이어 무려 13명의 꽃다운 목숨이 불꽃과 함께 사라졌던 것이다.

안동대에 다니던 김영균 군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김영균은 90학번, 전교조 1세대다. 고교 시절부터 학내 동아리 활동을 활발하게 펼쳤고 안동대 민속학과에 입학한 뒤에는 민속문화연구회를 꾸려 초대 회장으로 활약했다. 친구들은 말한다. 

"초반에 잘 나가던 아이들은 대개 시간이 지나면 도서관에 처박히는 경우가 많았는데 영균이는 달랐지요. 학생운동 하는 아이들을 보면, 마이크 잡고 선동 잘하는 아이들은 글쓰기나 동아리활동은 잘 못하는 편인데 영균이는 특이하게도 이 둘을 골고루 잘하는 녀석이었지요. 그러나 아무도 그가 분신하리라고는 짐작조차 못 했습니다."

그해 5월 1일, 12시 20분께 '고 강경대 열사 추모 및 강온통치 분쇄를 위한 범안동대인 결의대회' 도중 김영균은 분신했다. 동료들은 김영균이 제 몸에 불을 붙이고 '공안 통치 분쇄, 노태우 정권 타도'를 외쳤을 때도 그가 누구인지 가늠하지 못했다 한다. 김영균은 이튿날 경북대 부속병원 화상병동에서 숨을 거두었다. 만 19세 6개월, 그는 스무 살을 채우지 못하고 짧았던 이승에서의 삶을 마감했다. 

그의 부친은 서울시의 고위 공무원이었다. 유족은 김영균을 화장해 유골을 금강에 뿌렸고, 학생들과 재야는 안동대 뒷산에 그의 영혼을 묻었다. 그러나 사태는 장례로 끝나지 않았다. 당국은 '분신 배후'를 조작하려다 여의치 않자, 조직 사건으로 엮어 선배인 박명배를 비롯한 10여 명의 학생을 구속했던 것이다. 이들은 이후 여러 달 동안 수감되었다가 대부분 집행유예로 석방되었다. 

“희망이 있는 싸움은 행복하여라.”

김영균 열사 추모사업회 누리집에 있는 구호다. 김영균뿐 아니라 당시 그들 벗들이 모두 즐겨 외었다는 구호다. '희망이 있는 싸움'이란 무엇일까. 김영균은 결국 그 희망을 위해 몸을 던진 것일까.

분신정국의 대미를 장식했던 것은 당시 전민련(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사회부장 김기설의 죽음이었다. 5월 8일 아침 8시, 아침 해가 막 떠오를 무렵 김기설이 서강대 5층 옥상에서 온몸에 불을 붙인 채 떨어졌던 것이다. 하지만 당국은 그의 죽음을 곧 이른바 ‘유서대필사건’으로 몰아나갔다. 친구였던 강기훈이 그의 유서를 대신 써주었다는 것이다. 국과수의 필적 감정 결과가 그 증거였다. 최근에 국과수의 필적 감정이 엉터리였다는 것이 밝혀지긴 했지만 당시엔 보수 언론의 지원을 입은 검찰의 대대적인 공세 앞에 그 숱한 죽음이 일시에 희극으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자발적 숭고한 죽음이 아닌 ‘죽음을 부추기는 어둠의 세력’에 의해 만들어진 우울하고, 타의적 죽음.... 박홍 총장 같은 이의 입에서 죽음의 배후에 누군가가 있다는 식의 엽기적인 발언이 쏟아져 나왔다. 

세상에! 

유서대필이라니?

기발하다면 정말 기발하고, 괴이하다면 정말 괴이한 일이었다.

도대체 그런 기발하고 괴이한 발상은 어디에서, 누구 머리에서 나왔을까?

사실이면 사실인대로 괴이했고,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인 것처럼 조작했다면 그 역시 괴이하다 못해 소름끼치는 일이었다. 당연히 검찰은 사실로 몰아갔다. 법원도 그들 편이 되어 주었다. 보수언론과 보수 진영은 물을 만난 고기 격이었다. 

그런 판에 조선일보 일면에 대문짝만 크기로 민주운동의 대선배격인 김지하가 ‘죽음의 굿판 걷어치워라’라는 뒤통수를 한 대 갈기는 듯한 글을 썼으니 민수가 흥분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어떤 사람도 자기 목숨을 걸고 도박을 하진 않는 법이야.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면 한 방울의 피에도 망설이는 게 인간이지. 아무리 지고지선한 이념과 목표가 있다 하여도 그것을 위해 자신의 신체 일부를 포기하는 일도 결코 쉽지 않아. 그런데 그들의 희생이 왜 일어날 수밖에 없었나를 묻기 전에 그들의 죽음을 질타하는 게 과연 옳은 일일까? 그러면 임진왜란 때 자기 몸과 가족의 평안을 다 버리고 의병에 나서 장렬히 죽었던 사람, 일제 때 독립 운동을 하다 죽은 안중근 의사 같은 사람도 그의 논리에 의하면 죽음의 굿판을 벌인 사람들일까?”

“그런 뜻은 아니겠지. 나 역시 김지하 시인이 이런 때에 그런 말을, 더구나 모든 것을 왜곡해 보도하기 바쁜 보수언론을 통해 했다는 건 쉽게 수긍이 가진 않아. 하지만 나는 그의 글에 젊은 후배들의 희생을 아파하며 이런 방식의 싸움으론 되지 않는다는 뼈아픈 충정이 담겨 있다고 봐. 그리고 어떻든 생명의 소중함에 대해 일깨워주는 측면도 있고 말이야.”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도 마!”

민수가 듣기 싫다는 듯이 빽 큰소리를 질렀다.

“옛말에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는 말이 있어. 그가 만일 올바른 정신을 가지고 있다면 백골단의 쇠파이프에 맞아죽은 강경대나 김귀정에 대해서 먼저 애도를 하고 분노하는 게 순서 아닐까. 이제 봐봐. 김지하의 글로 저쪽은 천군만마를 얻은 기세로 칼을 휘둘러댈 테니 말이야.”

불행히도 민수의 예감은 그대로 적중하였다.

김기설의 죽음을 ‘유서대필사건’이라는 엽기적 사건으로 물꼬를 돌려놓은 노태우 정권은 정원식 총리서리가 외국어대 강의를 나갔다가 학생들에게 밀가루 세례를 받은 것을 계기로 대대적인 탄압에 나섰다. 연이은 분신으로 최대의 위기를 맞았던 정권이 반전의 기회를 잡았던 것이다. 

세월이 흘렀다. 

김지하는 어떤 대담에서 그때를 회고하며 젊은 후배들에게 용서를 빌었다.

“지난 십년은 참으로 덧없는 세월이었어요. 돌아간 분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쓰라립니다. 편치 않는 마음으로 인해 젊은 영혼들의 환상이 며칠 씩 나타나 뜬 눈으로 밤을 지샌 적도 있어요. 말썽 많은 조선일보라는 매체를 선택한 것도 잘 한 것 같지 않고....”

그리고 그때 지었던 조시를 읽어주었다.

스물이면 

나 또한 잘못 갔으리
가 뉘우쳤으리
품안에 와 있어라 
옛 휘파람 불어주리니... (끝)

덧붙이는 글: 위의 김지하와 나(김영현)의 대담은 계간 ‘실천문학’에 게재되었다. 

그리고 이른바 유서대필사건에 대해서는, 2007년 11월 13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원회)가 ‘강기훈 유서대필 의혹사건 진실규명 조사보고서’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진실화해위원회에서 당시 국과수가 감정한 문건들에 대하여 3개 사설감정기관에 각각 의뢰한 필적감정에 의하면 종전 국과수 필적감정과는 정반대로 「유서」와 강기훈의 필적은 상이하다는 일치된 결과가 나왔고, 또한 당시 감정을 하지 않은 강기훈의 필적들과 「유서」를 국과수 및 7개 사설감정원에 각각 감정을 의뢰한 결과, 강기훈의 필적은 「유서」와 ‘상이하다’는 일치된 감정결과가 나왔다. 또한 새로이 발견된 김기설의 필적으로 인정되는 「전대협노트」및 「낙서장」에 대하여 국과수 및 7개 사설감정원에 각각 감정을 의뢰한 결과, 김기설의 필적과 「유서」는 ‘동일하다’는 일치된 감정결과가 나왔다.

강기훈의 필적과 유서의 필적이 다르므로 강기훈이 김기설의 유서를 작성한 것으로 볼 수 없다. 또한 진실화해위원회의 감정결과에 의하면 김기설의 필적과 유서의 필적이 동일하며, 경험칙상 타인의 유서를 대필한다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임에 비추어 김기설이 자신의 유서를 작성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어 ’그러므로 국가는 확정판결에 대하여 피해자와 그 가족의 피해와 명예를 회복시키기 위해 형사소송법이 정한 바에 따라 재심 등 상응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필요하다. 국가는 종전 국과수의 필적감정, 기소 및 유죄판결에 대하여 피해자와 그 가족에게 사과하고 화해를 이루는 적절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진실화해위원회의 재심권고 결정에 따라 2012년 재심이 개시되었으며, 2014년 2월 13일 재심 판결에서 서울고등법원은 당시 검찰이 제시한 필적 감정이 신빙성이 없으며, 유서 대필 및 자살 방조에 대해 무혐의·무죄로 재판결하였다. 이에 검찰이 판결에 불복하여 대법원에 상고하였고 2015년 5월14일 대법원은 검찰의 상고를 기각하고 재심에서 강기훈의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글 김영현(소설가)
1984년 창작과비평사 <깊은 강은 멀리 흐른다>로 등단, 소설집 <깊은 강은 멀리 흐른다>, <해남 가는 길>, <내 마음의 망명정부>, 장편 <풋사랑>, 시집 <겨울 바다>, <남해 엽서>등이 있다. 제23회 한국창작문학상 수상, 실천문학사 편집장 역임, 한신대 명지대 등에서 강의하다가 현재는 양평에서 창작과 공부에만 열중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