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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조치 9호를 농락한 3인방

1978년 6월 16일 다짜고짜 경찰에 연행된 이광희는 의아했다. 경찰서에 갈 죄를 저지른 기억이 없을 뿐 아니라 공범으로 체포된 박재순이나 김주영과 함께 무슨 일을 도모한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뭔가 큰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뭘까?’

자신이 뒤집어쓸지 모를 죄에 대한 두려움보다 무슨 오해가 있었는지 호기심이 더 컸던 그는 경찰 조사를 받으면서 경악했다. 오해는커녕 자신이 다른 사람까지 감옥에 가게 할 중죄를 저지른 주범이라는 걸 안 것이다. 

1심 재판부는 이광희에게는 징역 3년에 자격정지 3년을 선고했다. 박재순·김주영도 징역 1년에 자격정지 1년을 각각 받았다. 물론 학교에서도 제적됐다. 앞날이 창창한 세 명의 대학생을 감방의 죄수로 만든 것은 한 장의 편지였다. 이광희가 4일 전 서울대 시위에 뿌려진 유인물 한 장을 갖고 있다가 친구·후배들과 돌려보았고, 박재순이 유인물의 내용을 친구 김주영에게 얘기했다. 김주영은 그것을 편지에 써서 부산대에 다니는 친구에게 부쳤다. 그 편지는 친구가 아닌 경찰의 손에 들어갔고, 역추적을 당한 끝에 이들 세 명이 굴비처럼 엮인 것이다. 이른바 ‘서울농대 편지사건’, 긴급조치 9호 시대를 말해주는 희화 같은 한 장면이다.

긴급조치 9호는 유신헌법이나 그 조치를 비판하는 행위, 다시 말하면 반정부 활동만 단죄한 게 아니었다. 그런 내용을 담은 유인물을 갖고 있는 것도, 그런 행위를 예비하거나 음모하는 것도, 심지어 누가 긴급조치 9호를 위반했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는 것도 긴급조치 9호 위반이었다. 어느 것에 해당되어도 영장 없이 체포되거나 구금될 수 있고, 1년 이상의 징역을 수 있었다.

친구끼리 사적인 대화와 편지 내용까지 파악해 감옥에 보내는 폭압 구조 속에서 시위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다. 서울농대편지사건이 말하듯이 그 근처에만 가도 발각될 정도로 빈틈없는 사찰망이 작동하고 있었고, 그것만으로도 감옥에 보낼 수 있는 무소불위의 수단이 학원을 에워싸고 있었다. 실제로 1975년 5월 13일 긴급조치 9호가 발동된 지 3년이 지나는 동안 대학가는 매우 평온한 것처럼 보였다. 시위 자체가 거의 없었고, 있더라도 5분을 넘기지 못했으며, 그 이상 지속하더라도 그런 사실이 신문에 한 줄도 나지 않았다. 따라서 아무 일도 안 일어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상한 모순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시위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할뿐더러 그것이 알려질 방법마저 봉쇄된 구조 속에서도 시위가 발생했다는 사실을 서울농대편지사건이 말해주기 때문이다. 즉 서울농대편지사건은 긴급조치 9호의 무지막지한 힘을 보여주는 사건이었지만, 거꾸로 그 철통같은 체제에 균열이 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했다. 그것은 편지의 내용, 바로 사건 4일 전에 일어난 서울대 6·12시위 속에 담겨 있었다.

1978년 6월 13일자 일본 <아사히신문>은 전날 긴급조치 9호가 내려진 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에서 일어난 격렬했던 시위를 사진과 함께 보도했다. 물론 국내 신문에는 한 줄도 나지 않았다. 이날 서울대 아크로폴리스 광장에는 5,000여 명(<아사히신문>은 1,000명 정도로 추산)이 모였고 최루탄과 돌이 난무했다. 경찰차 한 대가 부서지고 형사 5~6명이 부상을 입었다. 학생들은 학교 밖까지 나가 관악구청 앞과 신림동 일대에서 가두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긴급조치 9호를 휴지조각으로 만들어버린 이날 시위는 유신체제가 정점을 찍고 바야흐로 내리막길에 접어들었음을 암시한 것으로 학생운동사의 대전환점으로 기록할 만하다.

6·12시위의 특징은 경찰 정보망을 뚫고 대규모 군중집회와 데모대를 조직한 것만이 아니었다. 이 시위는 학내 언더조직의 수장인 김수천 등 5명이 주동한 것이었다. 당시 ‘시위 주동=구속’이라는 등식이 철칙처럼 통하던 시절이었다. 시위 주동자는 그에 따라 오랜 시간 고민과 결단, 신변 정리를 한 뒤 결행하는 게 보통이었다. 그런데 이날 그런 등식이 깨졌다. 김수천 외에 나머지 주동자 4명이 검거되지 않았고, 수사기관의 정보망에서도 감쪽같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또 하나 놀라운 것은 주동자들의 대담무쌍한 시도였다. 이들이 시위 현장에 뿌린 유인물 가운데 하나인 ‘학원민주선언’에는 다음과 같은 행동지침이 들어 있었다.

“통일주체국민회의를 부정하고 독도문제에 대한 박 정권의 굴욕적인 자세의 해명을 요구하는 집회를 6월 26일 오후 6시 세종로 네거리에서 서울시내 전 대학생과 시민이 함께 갖는다.”

학내 5분 집회도 어려운 판에 서울 한복판에서 집회를 하겠다는 것은 무모하기 이를 데 없는 발상이었다. 우선 이런 집회를 한다는 계획을 전파할 수단이 전무하다시피 한 상황에서 대규모 군중을 현장에 모으는 것이 불가능했다. 설사 그게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그 일대가 경찰에 의해 삼엄하게 봉쇄될 게 뻔했다. 오히려 이를 빌미로 사찰과 검색이 강화돼 가뜩이나 열악한 학생운동을 더욱 위축시킬 우려가 있었다. 서울농대 편지사건은 그런 우려가 현실로 나타난 사례 가운데 하나라고 볼 수 있었다.

6·12시위의 총괄 기획자인 김수천도 이를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국면 돌파를 위해서는 역발상이 필요했다. 긴급조치 9호 시절의 학생운동은 1976년 12월 서울대 법대생 시위를 신호탄으로 이듬해까지 이어진 ‘5분 시위’가 전형이었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나 다름없는 이런 ‘자폭 시위’로 그나마 존재를 알리는 게 긴급조치 9호 시대 3년차 학생운동의 참혹한 현실이자 절박한 과제였다. 1977년의 몇 차례 사건을 통해 그 한계와 가능성을 동시에 본 김수천은 한 단계 발전한 전술·전략으로 1978년 투쟁을 기획했고,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도심 진출 시도였다.

<아사히신문>이 ‘도심 예고시위’라고 표현한 김수천의 작전은 주효했다. 긴급조치 9호 체제에 억눌려 있던 재야운동권은 그 대담한 발상에 흥분했다. 유언비어처럼 떠도는 광화문 집회 소식에 눈을 부릅뜨고 귀를 쫑긋 세웠다. 행동지침은 자발적으로 재생산돼 광범위하게 전파되었다. 서울농대 편지사건이 그런 예다. 

1978년 6월 26일 서울 광화문 일대에는 낮부터 사람이 모여들었다. 재야인사들에 대해서는 가택연금이 실시되고 대대적인 사전 검색이 단행됐다. 현장에는 삼엄한 경찰의 경비망이 쳐졌다. 그런 가운데서도 한때 4,000명에 육박하는 군중이 운집했다. 이들은 ‘유신철폐’ 구호와 반체제 노래를 부르며 경찰과 쫓고 쫓기는 시가전을 벌였다. 때 맞춰 서울구치소에 수감된 양심범들도 유신반대를 요구하며 옥중 농성에 돌입했다. 이날 시위로 대학생 70여 명이 연행되고 20명이 구속됐다. 현장에 있던 권오정 신부를 비롯한 성직자 5명이 연행되는 일도 벌어졌다.

도심 예고시위는 9년 뒤인 1987년 6월항쟁에서 그대로 재연돼 크게 성공을 거두기까지 민주화운동 진영이 애용한 전술이다.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6월 26일 오후 6시’에 거행하기로 사전 예고한 6.26평화대행진은 6·29선언을 이끌어낸 6월항쟁의 클라이맥스였다고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김수천은 시위의 새로운 지평을 연 긴급조치 9호 시대 대표적인 학생운동가라고 할 만하다.

김수천과 더불어 6·12시위를 주모한 성 욱과 이우재는 다른 차원에서 긴급조치 9호를 농락한 학생운동가이다. 두 사람은 시위를 주동하고도 검거되지 않았다. 놀랍게도 둘 다 정문으로 탈출했다. 이우재는 경찰 기동대가 도착하기 전 유유히 걸어서 나갔고, 성 욱은 정문이 차단된 뒤 아베크족을 위장해 아슬아슬하게 검문을 통과했다. 

당시 현장 주동자가 검거되지 않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시위 현장과 무관한 배후세력이나 유인물 관련자도 일단 수배망에 들면 잡히는 건 시간문제였다. 성 욱과 이우재는 이런 철통같은 사찰망을 빠져나갔을 뿐 아니라 그 뒤에도 끊임없이 학교 안팎에 출몰했다. 학원가에는 두 사람이 6·26광화문시위를 비롯한 주요 현장에 다시 나타나 시위를 주동할 것이라는 소문이 떠돌기도 했다. 이들을 검거하기 위해  경찰이 얼마나 혈안이었는지는 뒷날 이우재에게 담당 형사가 한 말에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각하 지시로 너 잡으러 다녔다.”

도심 시위와 도망자의 존재는 학교 안팎의 민주화운동에 강한 자극을 주었다. 철옹성 같은 긴급조치 9호도 약점을 파고들면 약화시키고 균열을 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때를 기다리며 은인자중하던 학생운동 진영에 퍼지기 시작했다. ‘지하’에서 힘을 기르던 이들이 서서히 ‘지상전’을 위한 연대에 들어갔다.

1978년 9월 13일 일어난 ‘서울대 3차 시위’는 그런 기류를 반영한 일격이었다. 3차 시위란 연초 김수천을 수장으로 하는 서울대 학생운동 언더그룹이 연중 네 차례 계획한 시위 가운데 세 번째라는 뜻이다. 경찰은 물론 학생들도 깜짝 놀랐다. 양민호가 준비한 이 시위에 도망자 성 욱과 이우재가 나타나 시위를 주동한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행동강령이었다.

“10월 17일 오후 6시 세종문화회관 광장에서 유신독재 타도를 위한 범시민학생 궐기대회를 갖는다.”

유신 선포 여섯 돌을 맞는 날을 기해 2차 광화문 시위를 예고한 것이다. 뿐만 아니었다. 학내는 물론 장승배기, 노량진으로까지 번진 이날 시위로 80여 명이 연행되었는데 그 가운데 성 욱과 이우재는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양민호까지 주동자 3명이 또 종적을 감춘 것이다.

다음날 고려대에서도 대사건이 일어난다. 긴급조치 9호 발동 이후 3년 4개월 동안 침묵하던 고려대가 시위에 나섰다. 분노한 시위대가 정보원(일명 짭새)이 상주하던 정문 수위실을 박살냈다. 이른바 ‘고려대 9·14시위’이다. 이 시위는 ‘78민중선언사건으로 불리고, 주동자 이혜자의 카리스마 넘치는 선동으로 인해 ‘고대 잔 다르크 사건’으로도 불린다.

2차 광화문 시위는 6개 대학연합 등 여러 갈래에서 준비했으나 10월 10일부터 12일 사이에 주모자 대부분이 검거되어 무산된다. 경찰의 집요한 추적을 당하던 도망자 성 욱, 이우재와 여기에 새로 합류한 양민호도 이때 붙잡힌다. 하지만 이들은 소임을 다한 뒤였다. 긴급조치는 학생들에게 더 이상 넘지 못할 철벽이 아니었다. 학생들이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는 긴급조치 9호와 유신체제는 잔여 수명이 1년을 앞두고 이미 균열이 나고 있었다.

글 신동호(경향신문 논설위원)

<주간경향>에 '신동호가 만난 사람'이라는 인터뷰 코너를 진행하고 있다. 학생운동, 민주화운동, 시민운동 관련 기획 취재와 구술채록을 오래 했다. <오늘의 한국정치와 6.3세대> <70년대 캠퍼스>(전2권) <자연의 친구들:환경운동 25년사>(전2권)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