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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민투사건-“민주주의에 민족과 민중을 더하다”

1. 바리게이트를 쳐라!

지하철 2호선 시청역과 을지로입구역은 서울의 지하철역 중에도 가장 붐비는 역들이지만 두 역 사이는 의외로 행인이 드물어 한적하다는 느낌이 드는 곳이다. 이 거리 중간에 자리 잡은 미문화원 건물 앞은 더욱 인적이 드물었다. 예전에 미국대사관으로 사용되던 이 4층짜리 단아한 건축물은 문화원이 되면서 이용자가 그리 많지 않았다. 

1985년 5월 23일 정오 경, 갓 자란 연초록 가로수 잎들이 봄바람에 흔들리며 햇살을 반사하는 한가한 시간이었다. 미문화원에는 외곽에 배치된 경찰도 없이, 경비원들이 현관 안쪽의 검색대에 서서 느긋하게 출입자의 신원을 확인하고 있었다.

갑자기 수십 명의 젊은이들이 정문을 밀고 들어왔을 때도 경비들은 미처 사태를 깨닫지 못한 채 보고만 있었다. 모두가 20대 초반의 청년들이었다. 그들은 무방비상태인 경비들을 밀치고 검색대를 통과해 2층 도서관으로 몰려 올라갔다. 뒤따라 또 수십 명이 정문으로 들이닥쳐 2층으로 내달았다. 

무사히 도서관에 들어간 젊은이는 모두 73명, 서울지역 5개 대학 학생들이었다. 학생들은 먼저 도서관 안의 사람들을 밖으로 나가게 한 후 출입문에 집기들을 쌓아 바리게이트를 쳤다. 도서관장실 전화를 이용해 각 신문사와 사회단체에 점거 사실을 알리는 한편 군부독재 타도 등의 구호가 적힌 머리띠를 둘렀다. 열 수 없게 된 고정식 창문에 커다란 글씨를 써 붙이기 시작했다.

‘광주학살 책임지고 미국은 공개 사과하라’

긴급 출동한 경찰은 문화원 아래 인도를 차단하고 출입을 제한했지만 몰려오는 신문기자들과 민주단체 실무자들을 다 막을 수는 없었다. 

“광주학살 책임지고 전두환은 물러가라!”

“미국은 광주학살 공개사과하고 군부독재 지원 중단하라!”

학생들의 외침은 두터운 통유리에 가로막혀 잘 들리지 않았다. 학생들과 기자들은 종이에 커다랗게 글자를 써서 의사를 교환했다.

‘미문화원에는 왜 들어갔는가?’

기자들의 질문에 학생들은 한 문장씩 써서 답했다.

‘우리는 광주학살에 대한 미국의 사과를 요구한다.’

‘어느 단체 소속인가?’

‘삼민투위 산하 광주학살원흉처단투쟁위원회 소속 학생들이다.’

‘삼민이 무엇인가?’

‘민족통일, 민주쟁취, 민중해방의 약자다.’

‘언제 결성되었는가?’

‘전학련의 하부조직으로 지난 4월에 결성되었다.’

기자들은 신문사에 기사를 송고하느라 바빴다. 한국대학생들의 미문화원 점거 소식은 외신을 통해 세계에 타전되었다.

2. 미국을 독재와 분단의 배후로 보다

전두환의 신군부 세력에 의해 광주학살이 자행된 지 5년째, 군사독재의 가혹한 폭정 아래서도 민주화의 불꽃은 서서히 되살아나고 있었다.

이 해 2월 국회의원 총선에서 야당인 신민당이 국회에 대거 진출함으로서 국민들의 민주화 열망을 확인한 민주화운동권은 크게 고무되었다. 특히 정세에 예민하고 행동적인 학생운동은 4월에 30여 개의 대학 총학생회가 결집한 전학련을 결성하고 그 산하의 투쟁기구로 각 대학별로 삼민투를 결성했다. 

삼민투가 내세운 민족과 민중은 그동안 정치민주화에 초점이 맞춰져 있던 민주화운동을 진일보시킨 것이었다. 광주학살을 목도한 학생들은 소수 지식인들에 의한 민주화운동의 한계를 절감하고 기층민중이 주력이 되는 근본적인 민주화를 지향했다. 또한 이러한 근본적 변혁운동의 가장 큰 장애가 되는 남북분단을 해소해야만 이념논쟁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보았다.

세 가지 목표를 위해 맨 선두에서 투쟁하기로 결의한 삼민투는 이 무렵 빈번하게 이뤄지고 있던 노동자들의 가두시위에 대거 학생들을 참가시키고 대통령직선제를 위한 공청회를 개최하는 등 부문별로 다양한 활동을 기획하고 실천한다. 이번 미문화원 점거는 군부독재를 지원하는 미국에 대한 항의라는 점에서 민주주의운동이자 반외세운동이란 점에서는 민족해방운동이었다.

한국군에 대한 작전 명령권을 가진 미국이 광주에서의 학살을 허가 또는 용인했으리라는 의혹은 사건직후부터 제기되어 왔고, 이미 부산 광주 대구의 미문화원이 대학생들에게 공격받은 바 있었다. 하지만 방화로 시민이 죽는 사태가 발생하거나 즉각 진압으로 끝나면서 널리 알려지기보다는 오히려 여론에 악영향을 주었다. 

그런데 예상 밖으로 이번에는 미대사관측이 경찰투입을 요청하지 않고 대화로 풀어보자고 나섰다. 광주문제를 국내외에 널리 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얻은 것이다.

3. 통일운동과 민중운동

삼민투 학생들이 미국대사와의 면담을 요청하며 단식농성에 들어간 다음날, 미문화원 주변의 5개 빌딩에는 학생들의 요구를 지지하는 내용이 담긴 현수막들이 내걸리고 거리 곳곳에 유인물이 뿌려졌다. 김근태가 이끄는 민청련 등 재야운동단체들이 뿌린 것들이었다. 경찰은 현수막 철거와 유인물 살포자 체포를 위해 이리저리 몰려다녔지만 지원투쟁은 계속되었다.

워커 대사는 경찰의 진압을 요청하지는 않았으나 직접 협상장에 나타나지도 않았다. 대신 부대사가 나왔다. 함운경 등 학생대표들은 통역을 통해 주장했다.

“광주학살 당시 미군사령부가 한국군 4개 대대의 진압작전을 허가한 데 대한 미국의 공개사과 및 이를 공식적으로 문서화 할 것을 요구한다. 또한 미국대사가 직접 언론에 공개사과하라. 그때까지 우리는 이곳에서 나가지 않고 단식농성을 할 것이다.”

학생들의 요구에 부대사는 난색을 표했다.

“먼저 여러분이 농성을 해산하면 그 후에 대화하겠다.”

부대사와의 짧은 면담은 성과 없이 끝나고, 이후에는 대사관 정치 참사관 던롭이 협상에 나섰다. 그는 광주학살의 책임은 미국이 아니라 전두환에게 있음을 거듭 강조했다.

“광주사태는 비극이다. 사태의 중요성을 안다. 그러나 광주사태 당시 군병력 지휘자는 한국 측이었으므로 미국은 지원책임이 없다.”

미국이 자신의 대외정책에 대해 공개적으로 사과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협상은 진척될 수가 없었다. 대신 이 날 저녁에는 워커 대사가 서신을 보내왔다.

‘학생들이 의견을 표명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찬성할 수 없으나 한미양국과 관련된 중요한 사실들을 함께 조사하고 논의하는 일이 의미가 있다는 데는 의견을 같이 한다’

워커 대사는 미국이 광주학살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음을 보여주기 위해 미국무부가 80년 5월 16일부터 6월까지의 관련기록을 담아 80년 9월 22일에 펴낸 미공개 자료도 함께 학생들에게 제시하며 책임을 부인했다. 학생들은 이 자료의 신빙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협상은 단절되었다.

대사관 측과의 대화가 더 이상 진전되지 않으면서 단식 중인 학생들도 지쳐갔다. 다음날인 25일부터 학생 일부가 탈진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틀 후에는 서울에서 남북적십자회담이 열리기로 되어 있었다. 이는 학생들이 미처 고려하지 못한 변수였다. 

“우리들의 농성이 남북회담에 악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가장 큰 목표가 통일인데 통일에 장애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해산은 안 됩니다. 통일문제 때문에 민주주의와 민중문제 등 국내문제가 미뤄져서는 안된다고 봅니다.”

밤을 새운 고민 끝에 학생들은 해산을 결정했다. 26일 정오, 학생들은 직접 만든 태극기를 앞세우고 미문화원을 나왔다. 연변에는 많은 민주인사들이 박수를 치며 이들을 환영했다. 72시간만의 자진해산이었다.

곧바로 경찰버스에 태워진 학생들은 각 경찰서에 분산수용되어 혹독한 수사를 받았다. 경찰은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만큼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학생들의 몸을 스폰지로 감고 몽둥이로 구타하는 등 모진 폭력과 고문을 가했다. 이렇게 작성된 조서를 바탕으로 25명이 구속되고 43명은 구류, 5명은 훈방되었다. 주동자 함운경은 6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삼민투는 미문화원 농성 이후에도 각 대학별로 다양한 이름으로 결성되어 수많은 가두시위와 개헌운동 등의 선봉대로 활약한다. 그러나 통일운동을 중시하는 학생들과 민중운동을 중시하는 학생들 사이의 노선 갈등 끝에 이듬해인 1986년 봄, 자민투와 민민투로 나눠진다. 이 두 조류는 진보운동 내에 뿌리 깊게 이어져 오늘날까지 흔적이 남아있다. 

당시 군사정권은 이들 학생들이 내세운 민족, 민주, 민중이 북한의 주장과 같다는 명목으로 이들을 좌경용공으로 내몰았다. 미국은 농성 참가자들을 테러리스트로 분류해 훗날 미국입국을 막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이 내세운 삼민의 이념은 한국이 국가로서 제 기능을 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요소로서, 오늘날에는 모든 정치활동의 기본이 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삼정물산 경성지점으로 지어져 4.19혁명 당시 미국대사관이었고, 80년대 민주화투쟁 기간에는 미문화원으로 사용되던 이 유서 깊은 건물은 현재 서울시청 을지로 별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글 안재성

1989년 장편소설 <파업>으로 전태일문학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이후 대표작으로 <사랑의 조건>, <황금이삭>, <경성트로이카>, <연안행> 등의 장편소설과 <이현상 평전>, <박헌영 평전> 등의 인물평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