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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변-“촛불을 지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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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촛불자동차 운전면허 취소사건

검사는 검은 법복을 펄럭이며 일어서서 말했다.

“재판장님! 피고는 고의로 자신의 차량을 동원해 도로를 막은 사실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도로교통법 위반으로 운전면허가 취소된 것은 정당한 공무집행이라고 판단됩니다.”

젊은 검사의 음성에는 자신감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서른 명이 겨우 들어가는 작은 재판정은 미처 들어가지 못한 방청객들로 출입문을 닫을 수가 없을 정도로 어수선했다. 이십대부터 오십대까지 나이도 다양한 데다 옷차림도 가지각색인 방청객들은 복도까지 늘어서서 검사를 압박하고 있었다. 

반면, 송 변호사의 음성은 당당했다. 바싹 마른 체구에 검사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오십대였으나 음성에는 힘이 넘쳤다.

“피고는 교통을 방해한 게 아니라 경찰을 도와준 것입니다. 미국산 소고기 수입에 반대하는 시위로 두 달째 광화문 일대가 마비되고 있음에도 당국은 해산과 검거에만 집중했을 뿐, 안전보호에는 소홀했습니다. 이에 피고를 포함한 촛불자동차연합 회원들은 일반차량과 시위대 사이에 완충지대를 만들어 교통사고를 방지한 것입니다. 이들은 또한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부상당한 시민을 후송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 공로를 인정하지는 못할망정 면허취소라니 불법, 부당한 처사라고 아니 할 수 없습니다!”

“옳습니다!”

몇몇 방청객이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재판장은 급히 제지했으나 흥분한 사람들은 집단구호라도 외칠 기세였다. 검사는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 일어났다.

“피고인들이 경찰임무를 대신했다는 주장은 억지입니다. 피고인들은 스스로 불법집회에 차량까지 동원해 적극 참가한 것이며 경찰의 진입을 막기 위해 도로를 차단한 것이 명백합니다.”

송 변호사도 다시 일어섰다. 

“피고가 도로를 차단한 것이 아닙니다. 도로는 이미 시위 군중으로 마비된 상태였으며 피고는 단지 다른 차량의 진입으로 인명사고가 나는 것을 막은 것뿐입니다.”

“맞습니다!”

이번에도 여기저기서 변호사의 말에 동의하는 목소리들이 터져 나와 판사의 제지를 받았다. 공방은 거듭되었으나 판사는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다음번 기일을 잡고 다른 재판으로 넘어갔다.

“변호사님, 감사합니다!” 법정을 나서는 송 변호사에게 방청을 왔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다들 촛불시위 현장에서 만나 친구가 된 이들이었다.

“바쁘실텐데 이렇게 무료로 변론해주시니 너무 감사합니다.”

“저 혼자 하는 일이 아니라 우리 민변에서 하는 일입니다. 우리 민변은 민주사회를 위해 싸우는 분은 누구라도 무료변론을 해드립니다. 여러분도 문제가 생기면 언제든지 찾아오십시오.”

송 변호사는 덧붙여 말했다.

“사실 저도 젊은 시절에 민주화운동을 하다 구속되었을 때 여러 변호사님들의 무료 변론을 받았습니다. 우리 민변의 선배님들이지요. 이제 그 분들의 빚을 갚는 것뿐이니 아무 부담 갖지 말고, 위축되지 말고 열심히들 싸우십시오. 정의는 여러분의 편입니다!”

일일이 악수를 하고 헤어지는 송 변호사의 머리에 지나간 기억들이 밀물처럼 몰려왔다.

2. 민주주의의 파수꾼들

송 변호사가 노동운동을 하다가 구속된 것은 아직 변호사가 되기 전, 1980년대 중반이었다. 좋은 대학을 나와 얼마든지 편히 살 수 있는 길이 있었음에도 주야 2교대로 일하는 공장에 취업한 것은 노동자와 서민대중이 잘 사는 나라가 민주주의 국가라는 신념이었다.

당시 일기에 썼던 자신의 말을, 송 변호사는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암기하고 있었다.

‘완전한 사회란 없다. 어떠한 사회라도 주류에서 소외된 사람들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소외된 사람들 스스로 자신의 권리를 쟁취하는 것이다. 그러나 투쟁이 필요한 사람들일수록 투쟁에 필요한 조건들을 갖지 못하기 마련이다. 그들에게는 도움이 필요하다. 이 사회가 내게 공부할 기회를 준 것은 바로 그들을 돕기 위함이다. 죽는 날까지 이 마음 변치 않으리!’

공부를 하듯 열심히 노동운동을 했다. 그 결과 노동조합을 결성하여 근로조건을 상당히 개선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독재정부와 경찰은 약자를 위한 선행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얼마 못 가 위장취업을 했다는 이유로 구속되었다.

경찰서 유치장에서 감옥으로 이송된 직후였다. 교도관이 문을 따면서 변호사 접견이 있으니 나오라고 했다. 돈이 없어 변호사를 고용할 생각도 없었는데 무슨 일인가 싶었다. 접견실에서는 더욱 놀랬다.

“고생이 많지요? 변호사 조영래입니다.”

전태일 평전을 썼고 수많은 시국재판의 변호사로 잘 알려져 있던 조영래 변호사가 무료로 변론을 맡아주다니! 감격이었다. 시국사건에 대해서는 변호사의 유무에 관계없이 정권의 뜻에 따라 형량이 정해지던 시대였지만, 조영래 같은 사람이 곁에 함께 서준다는 것만으로도 든든했다.

당시 조영래 변호사는 정법회라 불리던 정의실천법조회에 소속되어 있었다. 강신욱, 이돈명, 한승헌 등 박정희 시대부터 민주인사들을 무료로 변론해온 원로급 변호사들부터 박원순, 이상수, 노무현 등 젊은 변호사들로 구성된 단체로 부천서성고문사건, 구로동맹파업 등 잇단 시국사건 재판에 헌신적으로 뛰고 있었다.

석방된 후에도 그는 여러 해 더 노동현장에서 활동했다. 그러나 1987년 대파업 이후 노동자의 권리가 크게 성장하면서 노동자 스스로 노동운동을 이끌기 시작했다. 노동자들이 원하는 것은 이론적 지도자가 아니라 노무사, 법무사, 변호사 같은 전문가들이었다. 열정적으로 노동운동을 해오던 대다수 지식인 출신들이 현장을 떠나게 되었다. 한동안 갈등하던 그도 보다 전문적 능력으로 노동자를 돕는 길을 택했다. 변호사였다.

공부에는 재능이 있던 그가 어렵지 않게 사법고시에 합격했을 때, 정법회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곧 민변으로 발전해 있었다. 그도 변호사 자격증을 따자마자 민변에 가입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여러 시국사건을 맡아 열심히 뛰어다니는 중이었다. 그것은 조영래 변호사에게 진 빚을 갚는 길일지도 몰랐다. 그가 변호사가 될 무렵 조영래 변호사가 요절하면서 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다. 2008년 5월부터 시작된 촛불시위의 변론에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도 그런 마음이었다.

3. 거리로 나선 변호사들

송 변호사가 시청 앞에 도착한 것은 밤 10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남대문에서 광화문사거리에 이르는 드넓은 도로는 차량통행이 차단된 채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시위대에 장악되어 있었다. 

“선배님 오셨군요. 이 거 입으세요.”

기다리고 있던 민변의 후배 변호사가 ‘법률지원단’이라는 글씨가 박힌 조끼를 입혀 주었다. 조끼라기보다는 몸벽보였다. 두 달째 계속되는 시위에 경찰의 진압으로 부상자가 속출하자 민변에서는 법률지원단이라는 이름으로 교대로 현장에 나가 인권침해를 감시하고 있었다.

“오늘은 전국에서 백만 명이 시위중이라고?”

“엄청납니다. 유월항쟁 이후 처음인 것 같애요. 선배님, 이것도 갖고 계세요.”

후배가 작게 접힌 일회용 비옷을 건네 왔다.

“비옷은 왜?”

“이따가 필요할 거에요. 그리고 이것도 받으세요.”

‘부당한 인권침해에 대해 언제든지 연락 주십시오!’라는 제목 아래 민변의 전화번호가 찍힌 안내장이었다. 송 변호사는 후배와 함께 시위현장을 돌아다니며 안내장을 나눠주기 시작했다.

이순신 동상 앞에는 십여 개의 대형 컨테이너가 이층으로 쌓여 청와대 쪽으로 향하는 도로를 차단하고 있었다. 흉물스런 컨테이너 위에는 십여 명의 시위대가 올라가 태극기며 시민단체의 깃발을 흔드는 가운데 일부 시위대가 스크럼 대신 손에 손을 잡고 행진을 하며 구호를 외치는 중이었다. 

“탄핵 미친 소! 탄핵 미친 교육!”

“발로 차, 미친 소! 발로 차, 대운하!”

종이컵을 꽂아 바람막이를 한 촛불을 든 교복의 남녀 학생들도 있었고 퇴근하고 바로 온 듯 양복에 서류가방을 든 사무직원들도 많았다. 유모차에 어린아이를 태우고 나온 주부들이며 휠체어를 탄 장애인도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80년대 민주화운동에 참여했을 법한 나이 지긋한 중년의 남녀들도 드물지 않았다.

애초에 자발적인 집회인데다 숫자가 워낙 많아 통일된 지도부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곳곳에서 즉석 연설회가 열리고 있었다. 아스팔트 한복판에 모여 앉은 사람들 앞에 나선 이름 없는 연사들이 열띤 목소리로 정부의 비민주적인 의사결정을 성토하면 사람들은 열렬한 함성과 박수로 응원했다. 과거의 시위와 달리 머리띠를 두른 사람도 없고 돌을 던지거나 각목을 휘두르는 사람도 없었다. 너무도 평화적이고 화기애애한 시위였다. 마치 커다란 야간축제 같았다.

그러나 자정이 넘고 한 시가 되어 시위대의 숫자가 현격히 줄어들자 경찰의 진압이 시작되었다. 매일 수십 명에서 백 명이 넘게 연행되고 그 과정에서 남녀 가리지 않는 무자비한 폭력으로 공분을 사고 있는, 바로 민변소속 변호사들이 필요한 그 시간이었다.

“물대포다! 물대포가 온다!”

시위대는 술렁이며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시위대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뒤쪽에 있으면 안 되었다. 물대포가 날아오는 맨 앞에서 경찰을 막아야 했다. 송 변호사와 후배는 서둘러 비옷을 걸쳐 입었다. 그리고 물러나는 시위대를 거슬러 앞쪽으로 헤치고 나갔다. 시커먼 살수차와 함께 방패와 몽둥이로 무장한 전투경찰대가 점점 가까워졌다.

글 안재성

1989년 장편소설 <파업>으로 전태일문학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이후 대표작으로 <사랑의 조건>, <황금이삭>, <경성트로이카>, <연안행>,등의 장편소설과 <이현상 평전>, <박헌영 평전> 등의 인물평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