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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불교운동연합 창립-반독재민주화 기치 내건 불교사회운동

“반민중적 권력 집단이 자행하는 폭력과 비민주적 제도는 철폐되어야 한다.”

1985년 5월 4일, 민중불교운동연합(민불련) 창립 선언문에는 이와 같은 단호한 의지가 서려 있었다. 단상에 올라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선언문을 낭독하는 사람은 자그마한 키에 다부진 얼굴을 한 여익구 의장이었다. 그는 창립 선언문 말미에 “간단없는 투쟁을 지속하여 불교의 민중화를 이룩할 것”을 참석자들 앞에서 엄숙히 천명했다.

창립 선언문을 낭독하던 여익구는 잠시 며칠 전을 떠올렸다. 창립 준비를 위한 비밀회의가 열린 날 밤, 그는 동지들과 함께 캄캄한 인왕산 기슭의 천막 안에 모여 있었다. 그날 밤 모인 사람들은 혹시 기관원들이 들이닥칠까 봐 온몸의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그러한 긴장감 따위는 없다. 기관원들이 온다고 해도 겁나지 않았다.

고문에는 월운 스님과 용태영 변호사가 추대되었고 지도위원은 고은, 김지하, 황석영, 장기표, 김승균, 성연 스님, 지선 스님, 성승표, 백영기, 김만선 등으로 구성되었다. 의장에는 여익구, 부의장에는 박진관, 김래동이 선출되었고 집행위원장에는 서동석, 기획위원장에는 현기 스님이 뽑혔다.

이로써, 진보적 불교인 100여 명이 참여한 불교 최초의 재야단체 민불련이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후 불교계는 오랜 침묵을 깨고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민불련은 맨 먼저 기관지 《민중법당》을 발행했다. 기관지 매호마다 불교민주화운동의 이론과 실천적 대안이 제시되었다. 기관지에는 신군부의 5공 독재에 대해 눈과 귀를 닫아 건 불교계의 게으름을 일깨우고, 체제에 빌붙는 노예근성을 질타하는 글로 가득 찼다.

민불련은 출범 한 달 만인 6월 《민중불교》를 창간해, 불교 사상 최대의 훼불사건인 10․27불교법난 관련 특집기사를 2호에 내보냈다. 뿐만 아니라 5․18광주항쟁과 계엄군의 학살 만행에 희생된 민중들의 다양한 피해 사실들을 파헤쳤다. 이 때문에 여익구 의장은 유언비어 유포죄로 여러 차례 구류를 살거나 수배자가 되었고, 《민중불교》는 이적 표현물이라는 혐의로 판매금지 처분을 당했다.

1970년대 초반, 여익구와 서동석은 동국사상연구회에서 매일같이 만났다. 그들은 토론과 학습을 통해 불교계의 전통이 어디서부터 단절되었는지에 대해 많은 토론을 했다. 둘은 선배와 후배이기 이전에 동지로서 뜻이 잘 맞았다. 불교 민주화의 과제를 놓고 연구와 토론을 주도해나가던 여익구에게 서동석은 깊은 신뢰감과 존경심을 느꼈다. 여익구는 늘 이렇게 말하곤 했다.

“불교는 결코 은둔의 종교가 아니야. 현실 속에서 민중들과 함께 하는 종교가 바로 불교야.”

여익구는 맹호부대의 일원이 되어 베트남전쟁에 참전했던 경험이 있었다. 그때 그는 베트남의 승려들이 전쟁에 반대하며 분신하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불교민주화운동에 대한 생각은 그때부터 싹텄다.

감옥에 갇힌 그는 개신교 쪽에서 영치금이 연달아 들어와 구속 학생들에게 전달되는 것을 보고 부끄러움을 느꼈다. 개신교가 활발히 반유신투쟁을 벌이는 동안 불교계는 아직도 미몽을 헤매고 있었다. 그는 만약 출소한다면 반드시 민중불교회 조직을 만들어 반유신투쟁의 대열에 앞장서겠다고 맹세했다.

1967년 동국대에 입학했던 그는 거듭되는 수배와 검거, 투옥 등 험난한 세월을 거치는 동안 제대로 된 학업을 이어갈 수 없었다. 그런 그에게 1970년대 내내 커다란 버팀목이 되어주었던 사람은 법정 스님이었다. 법정 스님은 1970년대 초 민주수호국민협의회 때부터 재야 민주화운동의 당당한 일원으로 활동해오고 있던 터였다.

여익구에게는 절집 출신의 동지와 선후배, 동료들이 많았다. 절친한 후배 서동석 외에도 평생의 동지였던 장기표가 그들이었다. 청계피복노조의 일원이었던 민종덕, 민청련 사무국장을 맡았던 안희대 등도 험난한 세월을 함께 해온 동지들이었다.

전등사 주지를 끝으로 환속한 시인 고은은 1970년대 중반 이후부터 민주화운동의 현장과 불교 민주화투쟁의 가시밭길을 함께 걸어왔다. 역시 환속한 승려 출신의 소설가 김성동, 동국대 철학과 출신의 소설가 황석영도 여익구의 든든한 우군이었다. 그들은 침묵 속에 빠져 있던 불교계의 자존심을 지켜주는 화톳불이었다.

1974년 민청학련사건으로 15년형을 받고 구속 수감된 여익구는 이듬해 형 집행정지로 출소했다. 출소 후 그는 월정사 탄허 스님 문하에서 ‘멱정(覓丁)’이라는 이름으로 불가에 귀의했다. 출가자가 된 그는 5년 동안 시대 문제를 고민해오다가 “도(道)는 산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라며 환속을 결심하고 저잣거리로 뛰어들었다.

1980년 동국대에 복학한 여익구는 5․17쿠데타를 일으킨 신군부에 의해 또다시 검거돼 3년 구형을 받고 선고유예로 석방되었다. 시절이 가파른 파도에 휩쓸려가던 1980년 10월 27일 새벽, 전두환 정권은 총무원장 송월주 스님을 강제 사퇴시키고 18명의 승려를 전격 구속시켰다.

“분규만을 일삼는 조계종단은 더 이상 자체 정화의 능력이 없으므로 부득이 타력으로나마 정화하지 않을 수 없다.”

신군부는 조계종 탄압의 이유를 이같이 밝히면서 32명의 승려를 승적에서 박탈했다. 사상 초유의 불교 탄압으로 조계종은 온통 초상집이 되었다. 불교계는 이 일을 계기로 그동안의 침잠을 딛고 일어서서 불교 개혁과 불교 민주화운동에 조심스럽게 뛰어들었다. 

1981년 가을부터는 여래사(如來使) 운동이 시작되었다. 불교계를 쑥밭으로 만든 재앙이 오히려 개혁의 바람을 앞당기게 만든 셈이다.

“여래사 운동은 중생을 고통에서 벗어나 해탈에 이르게 한다는 뜻의 하화중생의 방법론을 모색하기 위해 젊은 불자들의 만남을 활성화하는 운동이다.”

여래사 운동에 뛰어든 성문 스님, 돈연 스님 등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중앙승가대학의 분위기를 새롭게 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여기서도 여익구는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여익구는 스님들과 함께 대학생불교연합 전국법사단을 조직했다. 이 같은 흐름 속에 각 도시마다 도심포교당이 활발히 개설되었다. 여래사 운동은 점차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여래사 운동은 불교사회주의운동이다.”

1982년 초에 이르러 신군부는 여래사 운동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성문 스님과 돈연 스님은 신군부의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1983년 7월 부산 범어사에서 ‘전국청년불교도 연합대회’를 개최했다. 

1981년, 그는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사무총장을 맡으면서 불교 대중화와 불교 민주화를 주도해나갔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거치는 동안 불교는 그동안 침묵으로 일관했던 과거의 껍질을 벗고 대중들과 함께 하는 친근한 종교로 자리 잡아가기 시작했다. 깨어 있는 지식인과 학승, 시대정신을 외면하지 않는 승려들의 현실 참여의식으로 인해 불교정신이 다시 살아났다. 불교운동은 점차 조직적인 기반 위에서 새로운 힘을 얻어 갔다.

1985년 5월 4일, 이와 같은 불교 내의 자발적인 참여와 지지 속에 민중불교운동연합이 창립되었다. 유신시대의 감옥 안에서 불교 민주화운동에 대한 열망을 품어온 한 청년의 열망이 마침내 결실을 맺게 된 것이다. 의장에 취임한 여익구는 평생의 숙원이던 대중불교 운동을 열정적으로 이끌어나가게 되었다.

민불련은 출범 이후 서울 구로동에 여래포교원을 열고 노동자를 비롯한 근로계층을 대상으로 포교에 힘썼다. 민불련이 주도한 불교운동은 밖으로는 5공 독재와의 치열한 싸움을 벌여나갔다. 안으로는 기성 불교의 폐단에 대한 도전을 지속적으로 벌였다. 이 과정에서 민불련은 사회 구조의 정치 ․ 경제적 모순을 바꾸기 위한 방편으로 사회과학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한 교리 해석을 시도했다.

민불련이 불교민주화운동을 주도하게 되면서 1986년에는 독자적인 형태의 승가조직들이 나타났다. 그 무렵 지선 스님의 실천불교승가회, 도법 스님의 선우도량을 비롯해 많은 승가조직이 결성돼 불교 대중화에 기여했다.

1986년 3월 5일, 재야인사 3백 명이 서명한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의 〈군사독재퇴진촉구와 민주헌법쟁취를 위한 범국민서명운동선언〉이 발표되었다. 민불련 의장 여익구, 민불련 집행위원장 서동석, 민불련 기획위원장 현기 스님, 벽우 스님, 성연 스님, 지선 스님, 목우 스님, 진관 스님 등 민불련에 동참한 소장 승려들이 이 선언에 대거 참여했다.

5월 9일에는 스님 152명이 서명한 〈민주화는 정토의 구현〉이라는 제목의 시국성명이 터져 나왔다. 민불련에 참여한 승려들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정토구현 전국승가회’를 발족시켰다. 승가회 발족 이후 불교운동의 중심축은 신자 중심에서 승려 중심으로 바뀌었다.

9월 7일에는 해인사에서 대대적인 승려대회가 개최되었다. 승려들은 ‘9․7 해인사 승려대회’로 명명되는 이 대회에서 ‘불교자주화선언’을 발표했다. 나아가 ‘10․27법난 규탄 및 불교자주화쟁취대회’ 등을 잇달아 열었다. 지금까지 불교 내부에서 고양되기 시작하던 민주화 열기가 사회 밖으로 뜨겁게 뿜어져 나갔다.

“불교가 정치 사회문제에 깊이 개입되면 안 된다.”

그 무렵, 불교 내부의 보수층들이 공격하고 나섰다. 권력과 밀착돼 있던 그들은 민불련의 거침없는 행보에 일말의 불안감을 느낀 것이다. 민불련은 이에 대해 기관지 《민중법당》을 통해 직격탄을 날렸다.

“보수 세력들은 안일한 관념주의에 빠졌다.”

전두환 정권은 민불련을 증오했다. 민불련이 신군부의 추악한 원죄인 10․27법난을 걸고넘어지자 어떻게든 짓밟으려 했다. 중요한 시국사건 때마다 승려들이 반독재민주화투쟁의 선봉에 서자 신군부가 탄압의 고삐를 죄었다. 중앙정보부는 민불련을 무너뜨리기 위해 제2의 민청학련사건으로 몰아 조작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이 음모에 따라 여익구 의장과 전재성, 최연 등이 구속됐다. 중앙정보부는 심지어 여 의장의 은사 스님인 탄허 스님까지 붙잡아다 참고인 조사를 했다. 고은, 고준환, 황석영도 이때 줄줄이 끌려가 참고인 진술을 해야 했다.

자칫 5공 정부 내의 가장 큰 공안 조작사건이 될 뻔했던 이 사건은 여익구와 전재성이 구속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구속된 지 3개월 만에 두 사람 다 기소유예로 풀려나 사건은 용두사미에 그쳤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민불련은 중앙정보부의 공작과 탄압에 의해 다음 행보를 잇지 못한 채 생명을 다하고 말았다. 돌이켜보면, 민불련은 그 역사가 길지 않았음에도 현대 한국불교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타성에 젖은 기성 불교를 깨어나게 만들어 불교의 사회적 역할의 방향성을 새롭게 제시해왔고, 불교민주화를 정착시키는 데 이바지했다. 또한, 1987년 ‘민주헌법쟁취 불교운동본부’를 결성해 6월항쟁을 승리로 이끌어가는 견인차 역할을 했다. “세상이 아파서 내 아픔도 끝날 줄 모른다”는 유마의 보살행을 실천한 민불련의 자취는 이제 모든 이의 가슴 속에서 영원한 연꽃 향기로 남았다.

글 박선욱(시인, 평전작가)

1959년 나주 출생. 1982년 시 〈누이야〉외 3편이 실천문학 제1회 신인작품으로 당선되어 등단했으며 이후 대표작으로 《그때 이후》《다시 불러보는 벗들》《세상의 출구》《회색빛 베어지다》 등의 시집과 《채광석 평전》《김대중 평전》《황병기 평전》《윤이상 평전》 등의 인물평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