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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일보와 조용수 - “총에 꺾인 펜”
1. 향기 없는 꽃
오전 10시 50분, 감방 문이 열리고 교도관이 말없이 지켜보았다. 아침부터 찌는 더위에 가벼운 모시옷을 입고 단정히 앉아 책을 읽던 조봉암은 흰 고무신을 신고 감방을 나섰다. 교도관은 평소와 달리 그의 손에 수갑을 채웠다. 조봉암은 자신의 운명이 끝났음을 감지하고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사형장으로 가는 길목에는 몇 송이 들꽃이 피어 있었다. 조봉암은 담담히, 그러나 울적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곳에도 꽃이 피는구먼. 그런데 향기가 없어.”
사형수들이 울부짖으며 몸부림치며 강제로 끌려가는 길을, 그는 평소와 다름없이 조용히 걸어갔다. 나무로 만든 사형장 문을 열고 들어가니 흰 천막으로 가려진 올가미가 언뜻 보였다. 담당 교도관은 사형 결정문을 읽은 후 그에게 마지막으로 할 말이 없는가 물었다.
“이승만 박사는 소수가 잘 살기 위한 정치를 하였고 나와 내 동지들은 국민 대다수를 잘 살리기 위한 민주주의 투쟁을 했소. 나에게 죄가 있다면 많은 사람이 고루 잘 살 수 있는 정치운동을 한 것밖에는 없소. 그런데 나는 이 박사와 싸우다가 졌으니 승자로부터 패자가 이렇게 죽임을 당하는 것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오. 다만 나의 죽음이 헛되지 않고 이 나라의 민주발전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그 희생물로는 내가 마지막이 되기를 바랄 뿐이오.”
잠시 후 두건이 씌워지고 목에는 밧줄이 걸렸다. 곧 철썩 소리와 함께 그가 앉은 의자 밑의 마룻바닥이 열렸다. 11분 후, 서대문형무소 검시관은 진보당 당수이자 제3대 대통령후보였던 조봉암의 죽음을 확인했다. 1959년 7월 31일의 일이었다.
2. 조국으로 돌아가자
같은 시각 일본 도쿄 시내 한복판, ‘재일조선인 북송반대’라 쓴 어깨띠를 두른 청년 몇이 행인들에게 유인물을 나눠주며 일본어로 외치고 있었다.
“일본정부는 재일조선인을 공산독재의 땅으로 넘기지 말라!”
“조총련은 불쌍한 동포를 죽음으로 내몰지 말라!”
청년들 중에서도 마른 체구에 짙은 눈썹과 강한 눈빛이 인상적인 젊은이가 유독 시민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는 확성기를 입에 대고 낭랑하게 외쳤다.
“양심 있는 일본 시민 여러분! 우리 재일조선인들은 식민지 시절에 강제로 끌려와 일본을 위해 일하던 노무자들입니다. 일본정부는 이제 귀찮은 존재가 되어 버린 우리 조선인들을 내쫓으려고 김일성 도당과 손을 잡고 북송을 강행하고 있습니다. 이런 비인도적인 행위를 여러분이 막아주십시오!”
재일한국인 우익단체인 민단의 조직부 차장 조용수였다. 수십 명의 일본인들이 걸음을 멈추고 29살 한국인 청년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때 중년의 신사가 긴장된 표정으로 다가와 조용수에게 귀엣말을 했다. 민단 간부인 이강훈이었다.
“예? 조봉암 씨가 처형당했다고요?”
조용수는 확성기를 다른 이에게 넘기고 뒤로 물러섰다. 그는 건물 계단에 주저앉아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피워 물며 이강훈에게 말했다.
“악랄한 이승만! 공산주의에 반대해 투쟁한 조봉암을 공산주의의 간첩으로 몰아 죽이다니요! 재일동포가 북송되는 것은 방치하면서 반공애국자를 빨갱이라고 죽이다니요! 그렇다면 이승만이나 김일성이나 뭐가 다르단 말입니까?”
“그러게 말일세. 김일성이는 공산주의혁명 동료들을 반공주의로 몰아 죽이고, 이승만이는 반공투사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죽이니.... 자네가 재일동포 22만 명에게 조봉암 사형반대를 위한 서명을 받느라 얼마나 열심히 뛰었는데 아무 소용이 없게 됐네.”
이강훈의 말에 조용수는 눈을 감고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이것이 다 남과 북이 분단되었기 때문입니다. 통일만 되면 일본처럼 공산당과 민주당이 공존하며 선의의 경쟁을 하여 나라를 발전시킬 수 있습니다.”
그는 눈을 번쩍 뜨고 이강훈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선배님! 저는 한국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일본에 온지 벌써 8년입니다. 하루빨리 조국에 돌아가 남북의 평화통일을 위해 일하겠습니다.”
이강훈은 놀란 눈을 치켜떴다.
“평화통일이라니! 전쟁이 끝난 지 이제 6년밖에 안됐어. 남한사람들은 북한이라면 이를 간다네. 북진 무력통일이 아니면 말도 꺼낼 수 없는 분위기야. 조봉암 선생도 평화통일을 주장했다는 것이 빌미가 되어 빨갱이 누명을 쓰고 돌아가신 것 아닌가! 아직은 이르네. 잘 생각해 보게.”
“아닙니다. 평화통일에 힘을 보탤수만 있다면 제 목숨은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
조용수는 주먹을 쥐어 보이며 다짐했다.
3. 평화통일을 위하여
일 년 반이 지난 1961년 1월 25일, 서울에서 새 일간지 <민족일보>가 정기간행물 등록을 마쳤다. 사장은 일본에서 돌아온 약관 31살의 조용수였다. 그 사이 한국에는 4.19학생혁명이 일어나 이승만이 쫒겨 나고 민주당 정권이 들어서면서 수많은 신문들이 새로 창간되고 있었다. 조용수는 신문광고를 통해 다른 신문들과의 차별성을 드러냈다.
“전 민족의 비원인 이 나라의 통일문제는 민족일보가 가장 열렬히 정력을 바치려는 대상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민족 간에 유혈의 전쟁을 고취하고 평화적 통일을 반대하는 자들에게 대해서는 가장 준엄한 비판자가 될 것이며 조국의 통일을 위하여 성실히 노력하는 민주적 애국자들에 대해서는 가장 열정적인 지지를 보낼 것입니다.”
2월 13일 지령 제1호가 발행되었다. 민족일보는 첫 호부터 장면 총리가 이끄는 민주당 정권에 포문을 열었다. 정부가 추진하려는 한미경제협정이 굴욕적이라는 이유로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이에 장면은 직접 기자들에게 ‘한미경제협정 반대운동은 북한의 지령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해 빈축을 샀다.
민족일보는 또한 장면 내각이 반공주의를 강화하기 위해 추진하고 있던 ‘반공특별법’을 반대하고 집회 및 시위에 대한 규제강화 등에도 맹공을 퍼부었다. 통일문제에 대해서는 남북의 언론인 교류를 주장하고 서신왕래, 경제교류, 문화교류를 주장했다. 정치권에서도 남북통일을 주장하면서 반공을 강화하는 것은 모순이라는 비판이 쏟아졌고 학생들은 4월이 되면서 연일 북한과의 교류를 주장하는 시위를 벌이는 중이었다. 자연히 민족일보에 대한 인기는 높을 수밖에 없었다. 최대 일간지인 동아일보가 4만 5천부를 찍을 때 신생 민족일보도 4만부를 찍었다. 하지만 민족일보와 조용수에게 주어진 시간은 짧았다.
4. 환상과 현실
민족일보가 창간된 지 막 1백일이 지난 1961년 5월 16일 새벽, 서울시민들은 요란한 탱크바퀴의 굉음으로 잠이 깼다. 육군 소장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군인들의 쿠데타였다.
이 날 오후, 조용수는 민족일보 사장실에서 박정희에 대한 인물정보가 담긴 보고서를 읽으며 기쁜 웃음을 짓고 있었다.
“경북 성주 출생, 키가 작고 매서운 얼굴. 비교적 정직한 인물.... 한때 좌익을 했다.”
그는 신문창간 주역의 한 사람인 박진목에게 전화를 걸었다. 박진목은 해방직후 박정희의 형인 박상희와 함께 대구에서 좌익운동을 했던 인물이었다. 충무로 조희다방에서 나온 박진목 앞에서 조용수는 싱글벙글 기쁨을 숨기지 않았다.
“박 선생님, 박정희는 진보적인 성향의 인물이라고 합니다. 그런 사람이 정권을 잡으면 민족일보도 잘될 것 아닙니까? 그간 고생이 헛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박진목은 여전히 진보적인 사상을 가졌지만 북한의 김일성 독재에 환멸을 느끼고 있던 사람이었다. 박정희가 과거에 무얼 했든 폭력적으로 정권을 찬탈했다면 또 다른 김일성의 출현으로만 보여졌다. 그는 걱정스레 말했다.
“글쎄 성급히 결정을 내리기는 곤란해. 그동안 박정희가 어떻게 변해있는지도 모르고. 신중해야 할 거야.”
우려는 너무 빨리 현실화되었다. 박정희는 쿠데타를 준비할 단계에서부터 이미 좌익 출신이라는 의혹을 벗어나기 위한 희생양을 찾고 있었다. 그 대상은 다름 아닌 민족일보와 조용수였다.
이틀 후, 총구를 겨누며 민족일보에 들이닥친 군인들은 조용수와 간부들을 체포하고 신문발행을 정지시켰다. 혐의 내용은 조용수가 북한의 간첩이라는 것이었다. 민족일보 창간 당시 조봉암의 비서출신인 이영근을 통해 일본의 재일교포들로부터 약간의 기금을 모집했는데 그가 북한의 지령을 받은 간첩이며 그 돈은 북한의 공작금이었다는 혐의였다. 모금액도 엄청나게 과장되어 있었다.
“이영근은 절대 간첩이 아닙니다. 또한 본인도 결코 북한괴뢰집단과 내통한 적이 없습니다. 보십시오! 민족일보에도 반공기사가 많았습니다. 반대로 다른 신문에도 북괴와 동일한 논조의 기사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습니다. 진실을 진실이라고 말하는 게 어떻게 죄가 됩니까?”
조용수는 재판 때마다 강변했으나 계엄령 하의 군사법정은 그 어떤 주장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가족들은 그가 일본에서 북송반대시위에 앞장선 광경을 찍은 뉴스 테이프까지 제출했으나 채택되지 않았다.
사형은 해가 가기 전 12월 21일, 사형 확정이 있는 지 하루만에 집행되었다. 2년 전, 조봉암이 처형된 바로 그 형장이었다. 이 날 같이 처형된 정치깡패 임화수와 이정재는 끌려가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치며 맹수처럼 처절히 울부짖었다. 그러나 조용수는 조봉암처럼 담담했다.
“민족을 위해 할 일을 다 못하고 가는 게 억울합니다. 민족일보 상무인 정규근 동지에게 돈을 꾸어 신문을 만드는데 썼는데, 갚아주지 못하고 가게 되어 미안하다고 전해 주십시오.”
입회 신부에게 유언을 남기자 얼굴에 검은 두건이 씌워졌다. 곧 둔탁한 소리와 함께 나무바닥이 떨어졌다. 검시관은 조용수가 보통 사형수와 달리 18분만에야 완전히 숨이 끊어졌음을 알렸다. 사형 집행 소식은 가족들에게 다음날이 되어서야 전보로 통지되었다.
민족일보를 폐간시키고 조용수를 처형당하게 했던 당사자인 이영근은 이후 아무 제약 없이 한국에 드나들었다. 박정희는 이영근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 대북관계의 통로 역할을 맡긴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정부는 그 공로를 인정해 1990년 이영근에게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여했다.
민족일보사건은 2006년 11월 28일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로부터 국가 재심권고 결정이 내려졌으며, 조용수에게 2008년 1월 16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2부는 47년 만에 무죄가 선고되었다.
글 안재성
1989년 장편소설 <파업>으로 전태일문학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이후 대표작으로 <사랑의 조건>, <황금이삭>, <경성트로이카>, <연안행>,등의 장편소설과 <이현상 평전>, <박헌영 평전> 등의 인물평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