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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결성-6월항쟁 승리의 주역

1. 전국 규모 민주화운동 재야 단체의 탄생

1987년 5월 27일, 향린교회에는 아침 6시 무렵부터 사람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호헌철폐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국본) 발기인대회에 참여하러 온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바삐 서둘러 교회 안으로 들어갔다. 서로 허물없이 지내는 사이에는 가벼운 농담도 오갔다.

“경찰들, 웬일이래? 시민들이 서넛만 모여도 시위를 할까봐 도끼눈을 뜬 채 감시하더니, 쥐죽은 듯 조용하니 오히려 이상하네 그려.”

“우리 모두가 입을 꽉 다물고 있었는데, 알면 귀신이게?”

경찰의 눈을 따돌리고 모인 사람들은 계훈제, 박형규, 최형우, 김상근, 양순직 등 150여 명이었다. 그들이 이렇게 모인 까닭은 지금껏 민주화운동을 이끌어온 민통련에 비상이 걸렸기 때문이었다. 민통련의 중심인물들은 인천 5·3항쟁 이후 대부분 수배 중이었다. 상임 의장인 문익환 목사는 구속된 상태였다. 민통련은 이 와중에도 5공 정권과의 싸움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러나 개별적인 단체로 흩어진 상태에서 막강한 군사독재정권과 싸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제는 좀 더 큰 규모의 새로운 결집체가 필요한 시점에 와 있었다. 국본이 탄생하게 된 이유이다.

학생들은 한때 야당을 불신했으나, 5․3 인천항쟁 이후 야당과 연대를 강화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특히 5월 이후에는 학생들과 야당과의 관계가 호전되었다. 이와 더불어 야당과 재야 간의 연대가 공고해지면서 민주대연합의 구도가 짜여졌다. 종교계에서도 야당과의 연대에 대해서는 미온적이었다. 하지만 개신교 쪽과 천주교 쪽이 민주세력을 광범위하게 끌어들여야 한다는 당위성에 합의하면서 학생 ․ 야당 ․ 재야 ․ 종교계 간의 민주대연합이 형성되었다. 이들이 조직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연합’이나 ‘위원회’가 아닌 ‘운동본부’로 명칭이 정해졌다.

국본 발기인들은 교회 문을 들어서며 서로 악수하거나 어깨를 끌어안으며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지역대표 352명, 천주교 ․ 개신교 ․ 불교 등 종교계 대표 683명, 정치인 213명, 각계 대표 943명 등 총 2,191명을 대표하는 막중한 책임감이 그들의 어깨에 얹혀 있었다. 나중에 법조계 73명 추가로, 발기인 수는 총 2,264명이 되었다.

아침 7시경, 긴장이 흐르는 가운데 대회가 개최되었다. 이날 모임에서 참석자들은 모임 명칭을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로 확정했다. 이윽고, 단상에 오른 김승훈 신부가 국본 결성 선언문을 낭독했다.

“(……)민주화는 이 땅에서 그 어느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도도한 역사의 대세가 된 것이다. 이제 우리는 지금까지 고립 분산적으로 표시되어 오던 호헌반대 민주화 운동을 하나의 큰 흐름으로 결집시키고 국민을 향해 국민 속으로 확산시켜나가야 한다는 데 뜻을 모았다. 우리들 사제, 목사, 승려, 여성, 민주 정치인, 노동, 농민, 도시빈민, 문인, 교육자, 문화예술인, 언론, 출판인, 청년들은 하나 되어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몸 바쳐야 한다는 뜻에서 ‘민주헌법쟁취 범국민운동본부’ 설립을 발기하는 바이다.”

2. 6월항쟁의 물꼬를 튼 전사(前事)

1980년대는 비극의 시대였다. 10․26 이후 박정희라는 절대 권력이 사라지자 짧은 민주화의 봄이 찾아왔다. 그러나 12․12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전두환 등 신군부 세력은 그 봄을 다시 얼어붙은 골짜기로 쫓아내고 말았다. 그들은 광주항쟁을 참혹하게 짓밟으며 권력 굳히기에 나섰다. 민주화에 대한 기대는 다시 배반당하고 동토의 나날이 계속되었다. 바로 그 무렵, 독재의 견고한 성을 무너뜨릴 하나의 사건이 터졌다.

“경찰에서 조사받던 대학생 쇼크사(死).”

1987년 1월 14일, 서울대생 박종철이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구타와 물고문을 당하다가 숨지는 비극적인 일이 발생했다. 박종철의 죽음은 얼어붙은 산과 들을 깨우는 거대한 종소리가 되었다.

민추협, 민통련 등 재야단체에서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 대한 항의 성명을 발표했으며 농성과 시위에 돌입했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은 〈고문살인 종식을 위한 우리의 선언〉이라는 제목의 성명을 발표하고 전두환 정권 퇴진과 고문 수사기관의 해체를 강력히 요구했다.

1월 26일, 명동성당에서 ‘박종철 군 추도 및 고문 근절을 위한 인권회복 미사’가 열렸다. 이날 김수환 추기경은 강도 높은 강론을 펼쳤다.

“너의 아들, 너의 제자, 너의 젊은이, 너의 국민의 한 사람인 박종철은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니, 탁 하고 책상을 치자 억 하고 쓰러졌으니 나는 모릅니다. 수사관들의 의욕이 지나쳐서 그렇게 되었는데 그까짓 것 가지고 뭘 그러십니까. 국가를 위해 일하다 보면 실수로 희생될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그것은 고문 경찰관 두 사람이 한 일이나 우리는 모르는 일입니다, 하고 잡아떼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카인의 대답입니다.”

그동안 숨죽인 채 살아온 민주화운동 세력은 각계 인사 6만여 명으로 구성된 2․7 ‘박종철 군 범국민추도회’를 열었다. 2월 19일에는 민가협이 기독교회관에서 ‘고문사례 보고대회’를 열었고, 박종철 사십구재인 3월 3일에는 ‘고 박종철 군 범국민추도회’를 개최해 신군부 세력과 맞섰다.

5월 18일 오후 6시 30분, 명동성당에서는 김수환 추기경의 집전으로 5․18 광주민중항쟁 희생자를 위한 추모미사가 열렸다. 미사가 끝난 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대표 김승훈 신부가 단상에 올라 성명서를 낭독했다.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은 조작되었다〉라는 제목의 성명서였다. 고문살인에 가담한 경찰이 세 명 더 있다는 사실은 모든 이의 공분을 불러일으켰다.

3. 6월항쟁을 승리로 이끈 항쟁 지도부

6월 1일, 국본은 기독교회관 312호실에서 현판식을 가졌다. 6월 5일에는 〈6․10국민대회에 즈음하여 국민께 드리는 말씀〉과 〈6․10국민대회 행동요강〉을 발표하며 6월 10일을 대규모의 집회 날로 선포했다. 다음은 행동요강의 한 부분이다.

“6월 10일 오전 10시 이후 각 부문별, 단체별로 고문살인 조작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를 개최한 후 오후 6시를 기하여 성공회 대성당에 집결, 국민운동본부가 주관하는 국민대회를 개최한다.”

대회 하루 전인 6월 9일 오후 5시경, 연세대생 이한열이 6․10대회 출정식 시위를 하다 쓰러졌다. 교문 앞에서 전경이 쏜 최루탄 파편에 머리를 맞은 것이다. 이 일은 6월항쟁을 더욱 뜨겁게 타오르게 한 기폭제가 되었다.

마침내 다가온 6월 10일, 성공회 대성당에는 당국의 가택연금을 피해 계훈제, 박형규, 지선 스님, 진관 스님, 유시춘, 제정구, 오충일, 금영균, 김명윤, 양순직 등 20여 명의 국본 간부들이 미리 들어가 역사적인 6․10대회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날 오전 10시 전두환은 자신의 후계자인 노태우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는 ‘민정당 제4차 전당대회 및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를 진행시키고 있었다. 같은 시각, 민주당 ․ 민추협의 ‘영구집권음모규탄대회를 이끌던 김영삼 총재는 “지금 이 시간 민정당은 4천만 국민의 뜻을 무시한 채 역사 속의 치욕스럽고 부끄러운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고 있다”며 전두환이 주도하는 간선제 대통령 승계 음모를 규탄했다.

오후 6시, 서울 시청 앞 성공회 대성당에서 장엄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분단과 독재의 세월을 뜻하는 마흔두 번의 종소리가 울린 뒤, 마이크에서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성명이 낭독되었다.

“국민 여러분, 우리는 민주주의를 사랑하는 온 국민의 이름으로 지금 이 시각 진행되고 있는 민정당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가 무효임을 선언합니다.”

종소리가 울려 퍼지자 학생들이 차도로 뛰어들어 구호를 외쳤다.

“호헌철폐 독재 타도!”

이를 지켜보며 박수를 치던 사무직 노동자들이 가세하기 시작했다. 사무직 노동자들, 이른바 ‘넥타이 부대’와 ‘하이힐 부대’가 일제히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이들 젊은 사무직 노동자들은 학생들과 더불어 6월항쟁의 주인공이 되었다.

서울 시청 앞 광장을 비롯해 회현동, 충무로, 퇴계로, 을지로, 종로 등 서울의 중심 도로에는 학생들과 시민들로 가득 찼다. 그들은 이미 한 덩어리가 되어 온 몸으로 구호를 외쳤다. 시위는 서울, 부산, 광주, 대구, 인천, 대전을 비롯한 대한민국 전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다. 6월 18일 ‘최루탄 추방의 날’을 통해 시민들의 궐기와 힘을 보여준 국본은 6월 26일 오후 6시를 기해 대규모 평화시위를 전개해 나갔다.

‘민주헌법쟁취 국민평화대행진’이라는 이름의 평화시위는 전국 33개 도시와 4개 군 ․ 읍 등에서 동시에 열렸다. 서울은 67곳에서 연인원 25만여 명이 참가했고, 전국적으로 총 150만 명이 참가했다. 해방 이후 가장 많은 인파가 모인 대규모 시위는 서울, 광주, 부산, 대구, 대전, 인천 등 전국의 대도시를 흥분과 함성으로 들끓게 했다. 도심지는 최루탄 연기로 뒤덮였고, 화염병이 아스팔트에 날아들었다. 전두환은 서울에 2만 5천 명의 경찰 병력을 배치했고, 전국에 5만 6천여 명의 경찰을 동원해 원천봉쇄에 들어갔다.

시가전을 방불케 하는 도심지 시위는 밤이 되어도 그칠 줄 몰랐다. 거대한 해일처럼 거리를 가득 메운 인파는 “독재타도, 호헌철폐!”의 구호를 외치며 민주화의 행진을 계속 이어나갔다. 6월 27일 오전 8시, 국본은 “현 정부는 이제 국민의 뜻에 승복, 새 헌법에 의한 정부 이양 일정을 구체적으로 밝히라”고 요구했다. 다급해진 전두환은 위수령을 내릴지, 군 병력을 투입할지를 놓고 갈등했다. 미국이 이에 대해 강력히 경고했다. 전두환은 최후의 카드를 준비해 노태우에게 대신 발표하게 했다.

6월 29일, 노태우는 ‘6․29선언’을 발표함으로써 반독재 민주화투쟁을 벌여온 국민들 앞에 항복 선언을 했다. 직선제 즉각 수용, 김대중 사면복권 단행, 양심수 석방과 언론자유 보장이 주요 내용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야권의 분열을 짚어보고 내던진 신군부의 기만적인 승부수이기도 했다.

1987년 5월 중순 이후 6월 29일에 이르기까지 국본이 주도해온 민주화운동은 4․19 혁명 이래 우리가 거둔 가장 값진 승리의 기록이 될 것이다. 국본은 해방 이후의 민권운동 차원에서는 최초로 정파를 초월해 전국적인 규모로 결성한 재야 단체였다. 1987년, 6월항쟁의 기간 내내 국본은 일사불란한 지휘 체계를 유지하면서 일제강점기의 3·1운동에 비견되는 광범위한 시위를 주도해냈다. 결국, 국본은 5공 군사정부와 맞서 효율적으로 투쟁을 지휘했고, 민주화운동을 승리로 이끈 주역이 되었다.

글 박선욱(시인, 평전작가)

1959년 나주 출생. 1982년 시 〈누이야〉외 3편이 실천문학 제1회 신인작품으로 당선되어 등단했으며 이후 대표작으로 《그때 이후》《다시 불러보는 벗들》《세상의 출구》《회색빛 베어지다》 등의 시집과 《채광석 평전》《김대중 평전》《황병기 평전》《윤이상 평전》 등의 인물평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