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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원춘사건-유신정권 붕괴를 예고한 조짐

1979년 5월 5일 낮 12시경, 한 농민이 영양 버스 정류장 앞에서 건장한 체격의 두 남자에게 납치되었다. 그들은 기관원이었다. 납치된 농민은 포항제철의 한 건물로 끌려가 무수히 구타를 당했다. 만 서른 살의 농민 오원춘 납치사건의 서막이었다.

“이 빨갱이 새끼! 너 같은 놈은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어!”

매타작이 끝나자, 두 남자는 또다시 오원춘을 어디론가 끌고 갔다. 이번에는 울릉도행 매표소가 바라다 보이는 한양여관 앞이었다. 그들은 여관 특실에 오원춘을 가둔 채 취조를 했다.

“오원춘, 너는 1976년부터 가톨릭농민회 활동을 시작했지? 1978년에는 네가 영양군을 상대로 농민들을 선동한 적 있어. 네가 했던 행동을 구체적으로 말해봐.”

“선동이 아닙니다. 경북 영양군에서는 다섯 개 면의 농민들에게 가을감자 ‘시마바라’를 50킬로그램 한 포대당 8천원에 보급했습니다. 그런데, 그 종자가 불량이었습니다. 감자 종자를 받은 다섯 개 면 농민들의 8할 이상이 망했습니다. 저는 피해 농민들과 함께 대책위원회를 만든 뒤 영양군을 상대로 피해 보상을 요구한 것입니다.”

“그게 선동이지 뭐야!”

기관원 하나가 불같이 화를 내며 오원춘의 따귀를 때렸다. 기관원이 욕설을 하며 폭행을 가했다.

오원춘이 기관원들로부터 납치된 것은 그가 벌였던 농민운동을 당국이 고깝게 여겼기 때문이었다. 1978년 10월 5일, 오원춘은 피해를 당한 농민들을 규합해 청기감자피해보상대책위원회를 만들었다. 그들은 근 한 달 동안 농민들의 피해 상황을 조사했다. 피해를 당한 34개 농가의 피해 총액은 780만원이었다. 대책위는 피해보상 요구가 적힌 문서를 들고 영양군으로 몰려가서 피해 보상을 요구했다.

오원춘을 비롯한 대책위원회는 안동교구 가톨릭농민회와 연대해 나갔다. 1979년 봄, 마침내 영양군에서는 150여만 원의 보상금을 대책위에 내주며 사태를 마무리 지었다. 긴급조치 9호가 기승을 부리던 유신 말기의 일인지라, 이 일은 농촌 일대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농민 오원춘은 이 일을 통해 갑자기 유명인사가 되어 여러 농촌에 불려가 강연을 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 무렵, 영양군을 비롯한 지방의 기관에서는 오원춘을 눈엣가시로 여기며 언젠가 반드시 손을 보고야 말겠다는 각오로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자네, 조심하게. 기관원들이 자네를 노리고 있으니까 말야.”

초청 강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평소 안면이 있던 형사가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그러다가 철쭉이 지천으로 피어나는 봄날, 오원춘은 느닷없이 기관원들로부터 납치를 당하고 만 것이다.

구타와 협박, 강압적인 신문을 반복하던 기관원들은 새벽 2시경, 갑자기 태도가 부드러워졌다.

“이봐, 우리에게 잘 협조하라구. 사람은 둥글게 사는 게 편리하니까 말이야.”

아침이 밝아오던 터라서 오원춘은 농사일이 걱정되어 집에 보내 달라고 말했다. 하지만 기관원은 거부했다.

남자들은 오원춘을 끌고 승선장으로 데리고 간 다음, 울릉도행 여객선에 강제로 태웠다. 울릉도에 도착한 오원춘은 기관원이 준 5천원으로 밥을 사먹었으나, 나중에는 그마저도 떨어져 무일푼이 되었다. 도망치기 위해 몰래 부둣가로 나가면 어느새 기관원이 나타나 엄포를 놓았다.

“도망갈 생각은 버려. 잘못하면 독도로 보내는 수가 있어.”

오원춘은 식당 막일꾼을 자청해 밥을 얻어먹으며 허기를 때웠다. 저녁이 되면 상여 집에서 한뎃잠을 겨우 면했다. 기관원의 감시는 여전했다.

오원춘은 5월 21일에야 집으로 돌아왔다. 가족들은 오원춘을 얼싸안고 눈물을 흘리며 오열했다. 어쩐 일인지 오원춘은 자신이 납치된 사실을 공표하지 않다가, 6월 13일에야 정희욱 신부에게 자신의 납치 사실을 털어놓았다.

정 신부는 이 일을 프랑스인 두봉 주교에게 보고했고, 두봉 주교는 사목국장 정호경 신부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며칠 뒤 가톨릭농민회 안동교구연합회 차원에서 진상 조사를 한 뒤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시골 농부의 인권을 짓밟는 짓은 용서받지 못할 죄이다. 농부들은 불량감자 종자를 권장해 피해를 입힌 영양군과 용감히 맞서 피해보상 요구를 관철했다. 그런데, 기관에서 이 일을 주도한 농민에게 보복을 한 것은 전체 농민들의 인권과 생존권을 짓밟은 반인륜적인 범죄이다.”

오원춘은 성당에서 홀로 한 시간 이상 기도를 하고 나온 뒤 손수 〈양심선언〉을 작성해 7월 5일 발표했다.

“본인은 가톨릭 신자로서(……) 1979년 5월 5일 영양 버스 정류장에서 정체불명의 두 사람으로부터 납치당하여 안동을 거쳐 포항 모 기관(포항제철 부근 잿빛 건물) 안에서 이유 모를 폭행을 당하고(체제에 반항하는 놈은 그냥 둘 수 없다며 폭행했음), 울릉도까지 15일 동안 강제 격리된 상태에서 불안한 날들을 보낸 사실이 있어, 이를 교구 정의평화위원회에서 구성한 조사단과 농민회 조사단, 본당 신부님께 하느님께 받은 양심에 의하여 진술한 바 있습니다.”

그는 〈양심선언〉에서 “이 사실은 차제에 어떠한 일이 있어도 ‘사실’이며, 만약 번복된다면 이는 외부적 압력이나 위협에 의한 강제적 결과일 것입니다.”라고 강조했다.

이 무렵, 경찰에서는 오원춘의 여자관계가 솔솔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오원춘을 도덕적으로 매장하기 위한 술책이었다. 정희욱 신부는 만일의 사태를 위해 오원춘에게 물어보았다.

“경찰이 말한 여자관계가 사실입니까?”

“거듭 말씀드리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7월 17일, 안동교구 사제단은 안동교구 정의평화위원회, 가톨릭농민회 안동교구연합회와 연대하여 〈짓밟히는 농민운동〉이라는 제목으로 오원춘 납치사건의 진상을 문건화해 발표했다.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을 통해 전국에 문건이 발표되자, 중앙정보부에서는 즉각 정호경, 함세웅 신부를 구속시켰다. 이어 오원춘, 정재돈, 서경원을 비롯한 농민회 간부들이 굴비두름 엮듯이 끌려갔다. 공안정국에 놀란 어느 농민 신입회원은 뒷산에 작은 호를 파서 그 속에 들어가 며칠 동안 숨는 소동이 벌어졌다.

여름에 접어들자 경찰은 현장 검증을 핑계로 오원춘을 임의 동행했다. 그날은 7월 21일, 토요일이었다. 오원춘은 경찰과 함께 안동의 해동식당, 납치당했을 때 차가 멈췄던 장소, 두 남자가 담배를 샀던 가게, 조사를 받았던 한양여관 특실인 201호실 등을 정확하게 찾아내어 진술했다. 이때, 경찰은 뜬금없이 부두 현장 조사를 서두르더니, 선착장에서 강제로 울릉도행 여객선에 태웠다. 오원춘은 동행한 유강하 신부를 붙잡고 버텼다.

“유 신부님이 못 가면 나도 안 갑니다.”

갑작스런 사태에 당황한 유강하 신부도 경찰에게 강력히 항의했다. 그러나, 경찰은 두 사람을 완력으로 떼어놓은 뒤 오원춘만 배에 태운 채 그대로 출발해버렸다. 참으로 가증스런 기만 술책이었다. 유 신부는 떠나가는 배를 허탈하게 쳐다볼 뿐이었다.

그 뒤, 경찰은 “오원춘이 허위 납치 사실을 유포했다. 그는 단지 보름 동안 개인적인 여행을 갔다 왔을 뿐이며, 나중에 납치 자작극을 꾸며 발표했다. 허위 사실을 유포한 오원춘의 죄는 긴급조치 9호 위반에 해당된다.”며 억지소리를 했다.

일이 이렇게 되자 가톨릭은 발칵 뒤집어졌다. 사제들과 농민 회원들은 농민 오원춘을 잡아 가둔 경찰의 뻔뻔스런 계략에 대해, 신부들을 구속시킨 만행에 대해 연일 규탄했다.

8월 6일, 안동 목성동성당에서 구속자 석방을 위한 기도회가 열렸다. 김수환 추기경을 비롯한 사제 120여 명, 농민 600여 명이 모인 대규모 집회였다. 기도회가 끝난 뒤, 참석자들은 〈순교자 찬가〉를 부르며 성당 밖으로 나와 구호를 외치며 거리 시위를 벌였다.

“정호경, 함세웅 신부님을 석방하라!”

“농민운동 탄압을 중지하라!”

“긴급조치 철폐하라! 유신헌법 철폐하라!”

사제와 농민들은 촛불을 든 채 안동시청 분수대까지 행진했다. 이들 가운데 사제단과 농민회원 80여 명이 목성동성당으로 돌아와 무기한 항의 농성에 돌입했다. 안동에서 벌어진 최초의 대규모 시위였다. 8월 9일에는 원주와 청주에서 비슷한 시위가 벌어졌고, 8월 20일에는 명동성당에서 정의평화위원회가 주최하는 기도회에 1만여 명의 참가자가 모여들었다.

가을에 접어들면서 오원춘사건에 대한 첫 공판이 준비되고 있었다. 이 무렵, 기관원들은 매일 밤마다 오원춘에게 이상한 주사를 놓으며 윽박질렀다.

“너, 공판 때 쓸데없는 소리 지껄이면 가만 안 둘 줄 알아!”

그들은 고문 기구를 보여주면서 잔뜩 겁을 주었다.

“판사 앞에서는 여자관계가 복잡해서 여행을 떠났다고 말해! 그리고는 네 스스로 납치 자작극을 벌였다고 하란 말이야, 알겠어?”

그들은 한밤중에 신문을 시작해 새벽을 훌쩍 넘어 날이 밝아올 때까지 같은 말을 반복해서 주입시켰다. 오원춘은 그들의 협박을 들을 때마다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리고 손발을 떨었다. 이상한 약물 주사 때문이었다.

7월 21일, 첫 공판이 열렸다. 오원춘은 공판에서 검찰이 말하는 혐의의 대부분을 인정했다. 그는 변호인 신문 때에도 변호인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한 채 검사 쪽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는 초점을 잃었고, 그의 말소리는 평소와는 달리 어눌했다. 그는 울먹인 채 검찰 측 주장에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고 모든 혐의를 시인했다. 검사의 일방적인 논고가 끝나자 변호사들은 이에 항의하는 뜻에서 일제히 퇴장해버렸다. 판사가 최종 판결을 내렸다.

“납치 자작극을 벌인 피고 오원춘에게 징역 2년, 자격정지 2년을 선고한다.”

서울로 돌아오던 황인철 변호사는 기차 바닥에 주저앉아 대성통곡을 했다. 함께 갔던 다른 변호사들도 분한 마음에 오열을 금치 못했다. 이 사건을 빌미 삼아 안동경찰서 소속 경찰은 교구청에 난입해 기물을 부수고 신부들을 연행하기까지 했다. 이른바 ‘안동교구청 난입사건’까지 일어난 비중을 감안하면, 오원춘 사건의 결말은 참으로 실망스럽게 끝나고 말았다.

실형이 선고된 오원춘은 12월 8일 긴급조치 9호 해제와 더불어 석방되었다. 감옥에서 풀려난 그는 농민회 회원들과 사제들에게 ‘악몽의 밤’에 대해 털어놓았다.

“감옥 안에서 누군가가 매일 밤 약물주사를 놓았습니다. 그 무렵의 나는 늘 몽롱한 상태였습니다. 공판 날에도 나는 그들이 반복적으로 말한 말만 되풀이했던 것 같습니다. 지금도 그들이 욕설을 퍼부으며 반복해서 주입하던 말이 귀에 들립니다. ‘나는 자작극을 벌였습니다.’……. 아, 정말이지, 그 소리는 악마의 소리였습니다.”

‘오원춘 납치사건’은 막다른 골목에 처한 유신정권의 부도덕함과 악마적인 속성이 잘 드러난 전형적인 예였다. 박 정권은 생존권의 위기에 몰린 한 농민의 인권을 공권력으로 짓밟고도 모자라 사복경찰을 시켜 교구청에 난입해 신부의 목을 잡고 끌어내는 반인륜적 패악을 서슴지 않았다. 이 같은 말기적 현상은 YH여공 사건과 더불어 유신정권의 붕괴를 몰고 온 거대한 해일이 되었다.

글 박선욱(시인, 평전작가)

1959년 나주 출생. 1982년 시 〈누이야〉외 3편이 실천문학 제1회 신인작품으로 당선되어 등단했으며 이후 대표작으로 《그때 이후》《다시 불러보는 벗들》《세상의 출구》《회색빛 베어지다》 등의 시집과 《채광석 평전》《김대중 평전》《황병기 평전》《윤이상 평전》 등의 인물평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