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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조치 9호 시대 - 막걸리 긴급조치를 아시나요?

“너…… 막걸리 긴급조치라고 들어보았나?”

“막걸리 긴급조치?”

“응. 어떤 사람이 막걸리 한잔 마신 김에 대통령 욕을 했다던가 어쨌다던가. 그래가지고 아무 생각 없이 집으로 돌아왔는데 아, 집에 오자마자 낯선 사내들이 들이닥쳐서 경찰선가 어디론가 끌고 가더래.”

1975년 여름. 마포 뒷골목 소줏집.

허름한 아저씨 두 사람이 마주 앉아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래서?”

“그래서 죽도록 얻어터지고 나서 덜컥 구속되었다더군. 먹여 살려야 할 가족들도 많은데 말이야.”

“오매! 근데 대체 죄명이 뭐여?”

“쉿! 뭐긴 뭔가? 하늘의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바로 그놈의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이지. 면회 온 가족에게 그 사람 울면서 말했다더군. 그 놈의 막걸리가 죄라고 말이야. 막걸리 먹고 한마디 한 게 삼년 징역이라지 뭔가. 그래서 다들 그 사람보고 막걸리 긴급조치라고 불러. 무서운 세상 아닌가?” 

“그려? 막걸리 반공법은 들어봤지만 막거리 긴급조치는 처음이구먼.”

“자네도 조심하게나!” 

그 시간 바로 그 근처에서 대학생으로 보이는 두 청년이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너 알고 있나? 지난 4월에 서울대 농대에서 대학생 한 명이 할복했단 이야기.”

“뭐? 할복을……? 그게 진짜야?”

한 청년의 말에 다른 한 청년이 눈이 휘둥그레져서 물었다.

“쉿!”

처음 말을 꺼냈던 청년이 불안한 표정으로 얼른 주변을 한번 돌아보았다. 

“김상진이라고 서울대 농대 축산과 복학생이라더군. 교내에서 유신헌법과 긴급조치를 비판하는 집회가 열렸는데 유신반대 성명서를 읽은 다음 과도로 자기 배를 찔렀대. 친구들이 급히 택시에 태워 병원으로 갔지만 가는 도중에 숨을 거두었대.”

“아! 이놈의 긴조 9호! 대학생이 죽었는데, 그러고도 신문에 기사 한 쪼가리 나지 않다니... 이게 지금 우리가 독일 나찌 세상에 살고 있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나?” 

“쉿!”

두 번 째 청년의 말에 첫 번째 청년이 불안한 표정으로 주위를 한번 돌아보았다. 다행히 허름한 차림의 아저씨 두 명이 저쪽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을 뿐, 아무도 그들을 주의 깊게 보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낮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는 속담도 있지 않은가.

그리고 지금이 어떤 시댄가. 

그렇다. 때는 대통령 긴급조치 9호 시대였다.

삼선 개헌도 모자라 1972년 남북통일과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대통령 박정희는 1972년 10월, 국회를 해산하고 이른바 유신헌법을 공포하였다. 10월에 선포되어 ‘시월유신’이라고도 불리는 유신헌법은 주권자인 국민이 직접 선거에 의해 자기 대통령을 뽑는 직선제 대신 이른바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이 모여 체육관에서 간접선거로 대통령을 뽑는 대통령 간선제가 그 요체였다. 말하자면 ‘체육관 대통령’의 탄생이었다.

1972년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첫 체육관 선거에서 박정희 후보는 나홀로 입후보하여 총 2,359명의 대의원표 중 단 두 표의 무효표를 제외한 2,357표를 얻어 6년으로 임기가 늘어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통일주체국민회의 의장은 대통령 자신이었고, 대통령은 정부뿐만 아니라 ‘유정회’ 라는 친위 정당을 만들어 국회의원의 3분의 1을 자신의 뜻대로 뽑아 국회조차 마음껏 좌지우지할 수가 있었다. 그러니까 마음만 먹으면 종신토록 이 나라의 대통령의 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언론은 침묵하였고, ‘어용교수’ 들은 용비어천가를 부르며 제왕적 대통령에게 아첨하기에 바빴다. 법과 인권의 마지막 보루인 사법부 역시 폭압의 협조자였을 뿐이었다.

제왕적 유신헌법의 많고 많은 독소 조항 중의 독소조항은 ‘대통령은 필요하다고 생각할 경우 헌법에 규정되어 있는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정지’할 수 있다는 유신헌법 제 53조 대통령 긴급조치권이었다. 긴급조치란 대통령이 자기 멋대로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언제든 그 내용을 마음대로 만들어 선포할 수 있는 그야말로 무소불위의 법 아닌 법이었다. 국회도 필요 없었고, 사법부도 필요 없었다.

박정희의 시대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대었던 위수령이나 계엄령 대신 그런 효과를 상시적으로 부릴 가장 편리한 수단이 바로 대통령 긴급조치라는 것이었다.

대통령 박정희는 실제로 그렇게 했다. 그는 ‘국가안보나 공공의 안녕질서가 중대한 위협을 받거나 받을 우려가 있을 때’ 발동되어야할 긴급조치권을 수시로, 그리고 무자비하게 발동하였다. 긴급조치 없는 대한민국 1970년대란 상상할 수가 없었다.

1975년 5월 13일에 발표된 대통령 긴급조치 9호는 바로 그 완결판이었다. 1980년 전두환의 신군부 정권이 등장하기까지 장장 5년여에 걸쳐 가장 오랫동안 지속된 긴급조치 9호는 유신헌법에 반대하는 모든 싹을 영구히 잘라내기 위한 극단적 조처였던 것이다. 

이를테면 유신헌법에 대해 일체의 비방이나 부정, 반대, 왜곡, 개헌청원이나 폐기를 주장하거나 찬동, 선동하는 행위를 할 수 없었고, 이런 내용을 방송, 보도하거나 표현물을 제작, 배포, 판매, 소지하는 일체의 행위 역시 긴급조치 위반으로 법관의 영장 없이 체포 구금할 수 있었다.

위반자는 1년 이상의 유기징역과 10년 이상의 자격정지를 부과할 수 있었다. 그런가하면 위반자가 소속된 학교나 단체의 장에게 해당자의 해임이나 제적을 명령할 수도 있었고, 심지어는 휴업, 휴교, 잡지의 정간, 폐간이나 승인, 등록 취소도 주무장관의 재량 하에 마음대로 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시장과 도지사는 필요하면 ‘군대 출동’을 요청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다 긴급조치는 긴급조치에 의해서만 해제가 될 수 있었고 이 긴급조치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부정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 역시 긴급조치 위반에 들어갔다. 그래서 그때 벌어진 웃지 못 할 일은 긴급조치 위반으로 재판을 받고 있는 사람을 변호하는 변호사 역시 긴급조치 위반으로 들어가는 일까지 벌어졌던 것이다.

세상은 말 그대로 얼어붙었고, 감옥으로 향한 긴 행진이 시작되었다.

유신 헌법 철폐와 긴급조치 9호 본격적인 반대 투쟁은 서울 농대 김상진 열사가 죽고 나서 한 달 여 뒤인 5월 22일 서울대 관악 캠퍼스에서 밝혀졌다. 당시 관악 캠퍼스는 단과대학들이 이전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봄바람조차 설렁하게 느껴질 때였다. 

탈패, 문학패, 야학패 등 1천여 명이 모여 김상진 열사 추모를 위한 한판 놀이를 하다가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반정부 구호가 터져 나왔다. 관악캠퍼스 이전 후 첫 대규모 시위였다. 경찰들은 당황하였고, 당황한 만큼 강경하게 대응을 하였다. 교문을 막고 선 경찰은 무섭게 최루탄을 쏘아댔다. 그리고 교내로 진입하여 달아나는 학생들을 끝까지 쫒아가서 잡아 연행하였다. 자연발생에 가까운 단순 시위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날 시위로 60명이 구속되고, 53명이 제명되었다. 그리고 시위 책임을 지고 서울대 총장이 사임을 하고, 전략본부장과 남부경찰서 서장이 경질되었다. 얼마나 철저히 초기부터 반정부 움직임을 막으려고 애썼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은 이어져 다음 해 76년 봄, 명동성당에서 재야인사 10여 명과 신자 700여 명이 미사를 드린 후 ‘민주구국선언’을 낭독하였다. 성명서의 내용은 박정희 일인독재 아래 인권이 유린되고 자유가 박탈당하는 현실을 비판하고 앞으로 한국의 발전 방향을 논하는 비교적 온건한 내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식을 들은 박정희는 노발대발하였다. 

결국 이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 중 전직 대통령이었던 윤보선 씨를 제외하고 김대중, 문익환, 서남동, 이문영, 안병무, 윤반웅, 신현봉, 문정현, 문동환, 함세웅, 이해동 등, 교수, 목사, 신부 가리지 않고 11명을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 기소하였다. 재판부는 그들에게 유신헌법을 비방하고 그 폐지를 선동했다 하여 8년 징역을 선고했다.

다음 해 1977년 3월 22일에는 3. 1 민주구국선언 1주년을 맞아, 윤보선, 천관우, 지학순, 박형규, 조화순 등 나머지 재야인사들이 ‘민주구국헌장’을 발표하였고, 같은 해 7월 7일에는 천주교정의사제구현단에서 사회정의가 거부당할 때 소리높여 외치는 것이 우리의 소망이라는 ‘7.7 선언’을 발표했다. 문인들은 시인 김지하의 석방운동에 이어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결성하였고, 긴급조치 하에서 그동안 재갈이 물려있던 양심적이고 용기있는 기자들은 언론의 자유를 위한 ’자유언론실천운동‘을 전개하였다. 

민주화를 향한 한 점 불씨의 릴레이였다. 

그럴수록 박정희 유신정권은 더욱 모질어졌고, 탄압은 강화되었다. 학생들은 물론이고 버스를 타고 가다 대통령에 대한 불만을 한 마디 내뱉은 일반 시민들도 잡혀갔다. 잡혀간 이들은 어김없이 ‘남산’이라고 불리는 중앙정부보로 끌려가서 모진 고초를 당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다시 마포의 소줏집.

첫 번째 청년이 품속에서 유인물 한 장을 조심스럽게 꺼내 친구에게 주며 말했다. 

“김상진 열사가 그날 읽었다는 글이야. 어저껜가 명동성당 집회에 갔다가 얻은 거야. 조심해서 봐. 이것 소지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잡혀가니까.”

“응.”

두 번째 청년이 속으로 성명서를 읽어가기 시작했다.

“우리는 유신헌법의 잔인한 폭력성을, 합법을 가장한 유신헌법의 모든 부조리와 악을 고발한다. 우리는 유신헌법의 비민주적 허위성을 고발한다. 이것이 민족과 역사를 위한 길이고, 이것이 사랑스런 조국의 민주주의를 쟁취하는 길이며 이것이 사회 정의를 구현하는 길이라면 이 보잘것없는 생명 바치기에 아까움이 없노라. 저 지하에선 내 영혼에 눈이 뜨여 만족스런 웃음 속에 여러분의 진격을 지켜보리라. 그 위대한 승리가 도래하는 날, 나 소리 없는 뜨거운 갈채를 천하에 울리게 될 것이다.”

두 번째 청년의 가슴이 자기도 모르게 가슴이 거세게 뛰었다.

첫 번째 청년은 단숨에 소주잔을 입에다 털어 넣으며 말했다.

“근데, 그 김상진 열사, 눈을 감으면서 애국가를 불러달라고 했다더군.”

“아, 이놈의 긴급조치! 얼마나 많은 피를 또 흘려야 한단 말인가!”

밤 열한 시. 

근처에서 술을 마시던 허름한 차림의 두 아저씨는 보이지 않았다. 두 청년 역시 약간 취한 상태로 술집을 빠져나왔다. 통행금지가 있어 더 이상 늦어지면 집에 갈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들이 골목을 빠져나올 쯤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따라와 그들의 허리를 잡아 채며 야수처럼 싸늘한 음성으로 말했다.

“잠깐! 늬들, 대학생들이지? 아까 보고 있던 유인물…… 어디서 났어?”

순간 두 청년은 마침내 올 것이 왔다는 느낌이 와락 들었다. 막걸리는 아니었지만, 그들 역시 막걸리 긴급조치의 경우와 유사했다. 


그 후, 35년이 지난 2012년 8월 31일, 법원은 아래와 같은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지금 그때 그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이 유명을 달리 하였고, 또 많은 이들이 고문과 징역의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으며, 또 많은 이들이 가정의 아픔을 이겨내지 못하고, 경제적 고통을 당하고 있다. 생각하면 슬프다! 그들이 있는 한 우리의 민주주의는 아직 진행형이다.

“대통령 긴급조치 제9호는 유신헌법 등에 대한 논의 자체를 전면금지하거나 이른바 유신체제에 대한 국민적 저항을 탄압하기 위한 것임이 분명하여 긴급조치권의 목적상의 한계를 벗어난 것일 뿐만 아니라, 위 긴급조치가 발령될 당시의 국내외 정치상황 및 사회상황이 긴급조치권발동의 대상이 되는 비상사태로서 국가의 중대한 위기상황 내지 국가적 안위에 직접 영향을 주는 중대한 위협을 받을 우려가 있는 상황에 해당한다고 할 수 없고 (...) 

내용 또한 민주주의의 본질적 요소인 표현의 자유 내지 신체의 자유와 헌법상 보장된 청원권을 심각하게 제한하는 것으로서, 국가가 국민의 기본적 인권을 최대한으로 보장하도록 한 유신헌법 제8조(현행 헌법 제10조)의 규정에도 불구하고, 유신헌법 제18조(현행 헌법 제21조)가 규정한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고, 영장주의를 전면 배제함으로써 법치국가원리를 부인하여 유신헌법 제10조(현행 헌법 제12조)가 규정하는 신체의 자유를 제한하며, 명시적으로 유신헌법을 부정하거나 폐지를 청원하는 행위를 금지시킴으로써 유신헌법 제23조(현행 헌법 제26조)가 규정한 청원권 등을 제한한 것이다. 대통령 긴급조치 제9조는 그 발동 요건을 갖추지 못한 채 목적상 한계를 벗어나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지나치게 제한함으로써 헌법상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한 것이므로, 대통령 긴급조치 제9호가 해제 내지 실효되기 이전부터 유신헌법 그 자체에 위반되어 위헌이고, 현행 헌법에 비추어 보더라도 위헌·무효이다.“

라고 선언하고 이어서,

“오늘 이 자리는 피고인 개인에게 유신시대의 기소내용이 무죄라는 것을 밝히는 자리이기도 하지만, 피고인에게 유죄판결을 선고한 유신시대가 폭압적인 야만의 시대이었음과 아울러 그 야만의 시대가 종언을 고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재판부로서는 과거에 선배 판사들이 피고인에게 유죄판결을 내린 사실에 대해 그들을 대신하여 사과하고, 민주주의를 향한 피고인의 열정과 헌신적인 노력에 대해 무한한 경의와 찬사를 표한다.”

글 김영현(소설가)
1984년 창작과비평사 <깊은 강은 멀리 흐른다>로 등단, 소설집 <깊은 강은 멀리 흐른다>, <해남 가는 길>, <내 마음의 망명정부>, 장편 <풋사랑>, 시집 <겨울 바다>, <남해 엽서>등이 있다. 제23회 한국창작문학상 수상, 실천문학사 편집장 역임, 한신대 명지대 등에서 강의하다가 현재는 양평에서 창작과 공부에만 열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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