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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민주화운동 - 광주 해방구에 핀 사랑의 꽃
파리 콤뮨의 장관을 그리며
아마도 1977년 가을쯤의 일일 것이다. 당시 전남대생들을 주축으로 한 대여섯 명의 젊은이들이 광주 계림동 소재의 녹두서점에 모여서 줄 바레스가 지은 ≪파리 콤뮨≫의 일본어 판을 김남주 시인의 지도하에 강독하고 있었다. 전남대 공대생 노준현 군을 비롯한 여남은 명의 젊은이들은 1871년 3월에 발발하여 불과 3일간의 단명으로 끝난, 파리의 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기층 민중들이 철통같이 단결하여 이룬 해방구에 대한 이야기를 경이의 눈으로 들었다.
녹두서점은 광주전남지역 운동권에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고 있던 민청학련 출신 김상윤 씨가 꾸려가던 헌 책방이었다. 1974년 ≪창작과비평≫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한 김남주는 후배들에게 일본어도 가르치고 유신독재를 타도하고 민주 새벽을 앞당기는 데 필요한 교양을 심어줄 요량으로 이 책을 선택해 지도하였다.
그러나 원서 강독을 제대로 펼쳐볼 틈도 없이 첩보를 입수한 정보과 형사들의 급습을 받아 검거된 일본어 강독 팀은 혹독한 취조를 받아야 했고, 김남주 시인은 기약 없는 도피생활에 들어가야 했다. 남인수의 ‘고향의 그림자’를 멋들어지게 부르던 김남주가 우리에게 다시 나타난 것은, 1979년 10ㆍ26 직전 몇몇 동지들과 함께 민주화를 위한 자금 마련을 목적으로 모 건설회사 사장집 담을 넘었다가 미수에 그친 뒤 체포된 모습으로였다. 돌이켜보면 서슬 푸른 유신체제 하에서 내로라하는 운동권 인사들마저 숨을 죽이고 있을 때, 개벽 세상을 위해서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서야 한다는 것을 실천으로 보여준 일이었다.
김남주의 열망이 이루어질 날은 그리 멀지 않았다. 1979년 가을 부산 마산 일대에서 뜻있는 청년학도와 노동자 시민이 혼연일체가 되어 유신독재의 타도를 위한 봉기의불꽃을 피워올린 것은 그 시초라 할 만하다. 하지만 국민 대다수의 열화와 같은 민주화 열망에도 불구하고 전두환을 비롯한 일단의 정치군인들이 감행한 12ㆍ12쿠데타로 인하여 민주화 일정은 큰 암초를 만나게 되었다. 5ㆍ18광주민주화운동은 이 같은 소수 정치군인들의 야욕을 뿌리치고 민주 새벽을 열고 말겠다는 국민 의지의 표현이었다.
한낮의 금남로 탈환
5ㆍ18광주민주화운동은 무엇보다 지식인이 아닌 기층 민중이 주도했다는 점에서 이채롭고 명예로운 혁명이었다. 무장한 계엄군과 시민 대중 사이에 벌어진 싸움의 승패는 어쩌면 뻔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5월 18일 당일 공수부대를 주축으로 한 계엄군은 시위 참가자는 물론이고 무고한 시민들마저 가리지 않고 곤봉과 총칼로 제압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사상자를 낳았고, 수천 명의 시민들을 무차별 체포 구금하였다.
그 정도라면 이제 광주라는 인구 60만의 지방도시는 더 이상 군부의 총칼에 맞서 저항할 의지를 상실하고도 남았을 것이었다. 그러나 다음날인 19일 시민들은 축축한 봄비를 맞으며, 억울하게 간 이웃과 동료들을 추모하며 하나 둘 금남로에 모여들더니 마침내 수만의 시위 군중을 이루었다. 전날 피의 진압에 나섰던 7공수 여단 병력을 교체하여 투입된 광주 인근 31사단 병력은 강도가 누그러지기는 했지만, 금남로 일대에서 장갑차를 달리며 시위 군중을 위협했고 광주 시내가 훤히 보이는 도청 옥상에서 기관총을 난사하며 전남도청 500미터 이내로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런 국면을 타개한 것은 시민의 발이 되고 있던 버스와 택시 운전기사들이었다. 5월 19일 오후 들어 시위 군중과 계엄군 사이에 지리한 공방이 지속되던 상황에서 날아오는 총탄을 마다하지 않으며 이들은 차를 몰고 전남도청 쪽으로 돌진하였다. 수많은 차량들이 계엄군의 바리케이드를 돌파하여 쌓였고, 마침내 계엄군은 평범한 시민 시위대에 의하여 도청 일대에서 포위되었다.
당시 시민들의 구호는 ‘전두환은 물러나라’에서 ‘계엄 철폐!’, ‘민주 회복’ 등 보다 적극적이고 민주시민다운 구호로 바뀌었다. 이날부터 21일 저녁 계엄군이 철수하기까지 시민들이 보여준 희생정신과 투지는 실로 눈물겨운 것이었다. 필자는 21일 구름같이 몰려든 시민들이 금남로의 끝 도청으로 치닫는 광경을 뜨거운 눈물로 지켜보았다. 이날 시민군은 계엄군이 장갑차를 타고 시위대 사이를 무차별로 누비는 것을 볼 수 없었던 나머지, 군 장비를 납품하던 광천동 소재 아시아자동차 공장에서 장갑차를 징발해와 계엄군에 맞섰다. 당시 필자는 10대 후반에서 20대 전반의 청년들이 장갑차 위에 타고 태극기를 가슴에 안고 도청을 향해 나아가다가 계엄군에게 사살당하는 장면을 몇 번이고 보았다.
그 희생이 멈춘 것은 화순 탄광 등지와 시내 파출소 무기고에서 탈취해온 카빈소총 등으로,청년들이 한국은행 광주지점 등지에서 계엄군을 향해 응사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계엄군은 수세에 몰렸고 마침내 그날 밤 조선대학교 뒷산을 넘어 후퇴하고 말았다. 이를 계기로 자발적인 시민군이 출범하였다. 노동자, 예비군 출신자 등 의기에 넘친 20대 전후의 젊은이들이 주축이었다.
1930년대 스페인 내전에서 수많은 젊은이들이 목숨을 내걸고 프랑코의 독재 정권에 항거하여 해방구를 일구었듯, 시민군은 공권력이 부재한 상황에서도 약탈이나 방화 등 일체의 질서 파괴행위 없이 시민 자치로 이끌어가는 해방구를 이룩해냈다. 김남주 시인과 젊은 학도들이 경이의 눈으로 보던 파리 콤뮨이 불과 72시간으로 저문 데 비해 ‘광주 해방구’는 일주일이나 지속되었으니 뒷날 역사가들이 기록해야 할 일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광주 해방구는 민중이 중심이 되어 쟁취되었고, 자발적으로 결성된 시민군의 손으로 지켜졌다. 당시 광주는 외부로부터 모든 물자 반입이 차단된 상황이었지만 시민군은 부족함이 없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YWCA를 중심으로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식량 등 물자를 조달했기 때문이다. 또한 부상자가 생기면 어느 병원에서건 무료로 치료해 주었으며, 적십자병원 등에는 부상당한 이들을 위해 자발적으로 헌혈을 하겠다는 젊은이들이 장사진을 이루었다. 투쟁의 거점인 전남도청 분수대 앞에는 양동시장 등 광주시내 시장 상인들과 마을 부녀회에서 매일 가져오는 음식물들로 넘쳐나, 필자 등은 일주일 내내 집에 들어가지 못했지만 따뜻한 주먹밥을 먹을 수 있었다.
탱크 발 아래 맨몸으로 눕다
해방구 건설이 사나흘을 넘기면서 계엄군은 광주탈환을 시도하였다. 시민군 내에서도 이만큼 광주시민들의 의지를 만방에 알렸으면 되지 않았느냐는 의견도 있었지만, 민주화가 완성될 때까지 저항의 불길을 끌 수 없다는 의견이 더 많은 지지를 얻어 연일 시민 궐기대회가 잇따르고, 검거를 피해 피신했던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지식인들도 속속 저항의 대열에 참가하였다.
이 같은 시민군의 동향을 파악한 계엄군은 25일 즈음부터 몇 차례 탱크로 담양과 화순 등 접경지역에서 광주로 진입하려는 시도를 거듭하였다. 계엄군의 무차별 진입 저지를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이 뭉클하다. 광주 시민들은 대학교수, 종교인, 청년운동가들을 중심으로 시민투쟁위원회를 구성하여 계엄군과 협상에 나섰다. 그런데 정작 계엄군은 광주 시민의 희생에 대한 사과나 민주화에 대한 약속은 한마디도 없이, 시민군의 무장 해제와 시위 군중들의 귀가만을 종용했고 협상 중에도 탱크를 앞세운 채 광주시내 진입을 시도하였다.
이런 계엄군의 무모한 도발을 저지한 것은 3ㆍ1운동 참가자이며 제헌국회의원이기도 했던 이성학 장로 등이었다. 특히 70대 중반의 고령이었던 이 선생은 화정동 고개를 넘으려는 탱크 앞에 웃통을 벗고 맨몸으로 누워 ‘나를 밟고 지나가려면 가라’고 외침으로써 캐터필러를 멈추게 했다.
시민군들의 연일 피로에 지친 모습이 역력해지고달리는 물자에 허덕이는 모습이 불거지자계엄군은 독침을 숨긴 끄나풀을 도청에 잠입시키기도 하고궐기대회 마당에 강아지들을 풀어입 하나 뻥긋하는 사람들까지 카메라에 담아 두더니25일경부터는 자동화기는 물론 탱크까지 앞세워마치 백마고지라도 탈환할 때처럼 화정동으로 몰아쳤다이대로 가슴을 떼어낸 원한으로 만나서는 안 된다고이성학 장로와 김성용 신부 윤광장 선생들은가슴속 말 털어내고 있는 시민들의 말 듣지 않는다면당신들은 영원히 씻지 못할 죄를 짓는 것이라고당신들에게 총을 쥐어준 주인들을 짓밟으려거든우리들을 먼저 타넘고 가라고절벽도 평지처럼 달린다는 탱크 발밑에 누워 버렸다- 박몽구 시 「남은 사람들 3 -이성학 장로님」 부분
이성학 장로는 수배자의 신분이 되어 전국을 떠돌다가 폐렴에 걸려 생을 마감했다. 모름지기 말과 행동이 한결같은 지식인의 전범을 보여준 분이었다. 그분들이 계엄군의 탱크를 저지한 덕분에 시민대회가 연일 열릴 수 있었고, 외신기자들은 광주의 진실을 세계에 알릴 수 있었다.
시민군에 자원한 이팔청춘 처녀
시민군들에게 행정의 중심지인 전남도청을 내주고 철수한 계엄군은 무력에서 밀린 후퇴였다기보다 철통같이 단결된 시민의 힘에 눌려 물러난 셈이다. 그 같은 점은 시 외곽에 주둔하면서 무논을 매는 청년이나 마을 어귀에서 놀던 어린이들마저 시민군으로 오인하여 무차별 총격을 가해 살해한 데서도 잘 증명된다. 그들은 광주를 고립에 빠뜨려 고사하기를 기다렸던 것이다.
그러나 광주 시민들은 위대하였다. 초기에 계엄군의 전무후무한 만행에 놀라 시 외곽으로 빠져 나갔거나 검거를 피해 도피하였던 청년 학생, 지식인들이 속속 집결하여 시민군을 올바른 방향으로 리드하고 광주 상황을 지역을 넘어 삼천리 전역과 전세계로 알리는 일에 주력하였다. 은행원 자리를 팽개치고 내려와 광천동 들불야학을 이끌다 시민군 타격대장으로 도청에서 옥쇄한 윤상원, 연극연출가로 시민군의 대변인을 맡았던 박효선 등 시민군 지도자들이 그들이다.
또한 초기부터 무기를 쥔 시민군들이 지쳐가자 새로운 시민군을 모집하는 안내 방송이 울려 퍼졌고, 수백 명의 젊은이들이 시민군에 지원하였다. 예비군 중대장 출신으로 어린 시민군의 총기 사용법을 직접 지도하며 시민군에 참여한 이도 있었고, 심지어 어린 남동생이 시민군에 참여하여 생사를 알 수 없게 되자 간호병이 되어 함께 싸우겠다며 참여한 젊은 여성도 있었다.
27일 새벽, 계엄군의 작전이 개시되었다. 차마 국민의 군대라거나 동족이라고는 볼 수 없이, 도청 벽을 온통 벌집으로 만드는 무차별 포화를 앞세워 재진입한 계엄군의 총칼 아래 광주민주화운동은 미완의 혁명으로 저물었다. 윤상원을 비롯한 수십 명 시민군들의 고귀한 목숨이 계엄군의 총격으로 끊어졌다.
그 동안 희생자는 200명이 훨씬 넘었다. 그러나 광주민주화운동은 수많은 민간인 희생자를 낸 비극적 사태를 넘어, 민주주의는 결코 총칼로 무너뜨릴 수 없는 것이며,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것을 보여준 산 역사이다. 역사의 와류에서 이를 회피하지 않고 온몸을 던져 맞선 것은 투사가 아니라 평범한 시민이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5월이 돌아올 때마다 지금은 고인이 된 김남주 시인과 함께 읽은 『파리 콤뮨』의 감동도 되살아난다. 라일락처럼 연약한 팔을 가진 그가 오염된 정권의 비호 아래 쌓은 검은 돈을 찾아 장벽을 넘은 것을 생각하면 저절로 미소가 나온다. 왠지 저절로 쥐어지는 맨주먹이 뜨겁다.
글 박몽구(시인, 5.18구속부상자회 회원)
1977년 월간 『대화』로 등단, 『개리 카를 들으며』,『봉긋하게 부푼 빵』,『수종사 무료찻집』 등의 시집을 상재하였다. 연구서로 『모더니즘과 비판의 시학』, 『한국 현대시와 욕망의 시학』 등을 갖고 있다. 계간 《시와문화》 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