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고인 이수병은
본적기에서 농업 이저항의 장남으로 빈농가에서 출생 성장중 의령군 부림국민학교와 신반중학교 및 부산 사범학교 등을 거쳐 1957.3. 부산대학교 교육학과 1년을 수료하고 의령갑을초등학교 교사로 1년간 근무타가 1959.3. 서울 경희대 경제학과에 입학 3년 재학 중 용공단체인 민총련 경희대 위원장으로 취임하여 용공활동을 하다 1961.5.16. 후 반국가행위자로 피검되어 1961.5.20. 특수범죄처벌에 관한 특별법 위반으로 혁명재판소에서 징역15년의 선고를 받고 복역중 1968.4 경 감형으로 출옥하여 주거지에서 약 3년간 지물포상을 경영타다 1972.3 경부터 서울시 종로구 청진동 소재 사설 삼락 일어연구소 강사로 입직 현재에 이른자로서 평소 공산주의사상을 신봉하여 오다가 전시와 같이 서울교도소 및 안양교도소에서 복역하면서 용공혁신정당 지도급에서 활동하던 서도원과 인민혁명당 당수인 도예종등과 접촉하면서 동인 등으로부터 “미약한 우리 혁신계 조직은 5.16으로 완전히 분산되었으나 출옥 후 상호 연락을 유지하면서 혁신계를 규합 공산주의국가건걸을 목적으로 투쟁하자”는 등의 교양을 받고 이에 감화되여 출옥 후 서울 시내 각고 서점을 순방하면서 일어판 ?민주의와 공산주의 서적을 구입 탐독하므로서 공산주의 이념을 공고히 하는 일방 인민혁명당 재건을 위한 공산비밀지하조직의 지도요원으로서 “남조선 혁명은 남조선의 자체혁명역량에 의하여 수행되어야 하며 북반부 인민은 같은 민족으로서 남조선혁명을 지원할 책임과 의무를 진다”는 “북괴의 노선에 따라 혁명역량구축을 위한 조직활동중에 있는 동 서도원, 동 조예종 등과
1969년경부터 재접선하여 연락하면서 동인 등으로부터 사상교양을 받고 전국에 분산된 혁신자파세력을 재규합하여 과거 인민혁명당과 같이 통일적인 조직으로 만든 다음 정부를 전복하여 공산주의국가를 건설하여야 된다는 지령을 받고 동 지령을 수행하겠다는 결의하에 정부를 공산촉력혁명으로 전복시키고 공산주의국가를 건설하기 위하여 국가를 변란하고 국헌을 문란할 목적으로
1. 1972.8. 일자미상 13:00경 서울 종로구 관수동 소재 한국기원 하속 옥호불상 다방에서 전인민혁명당 간부 공소 외 강무갑(사망)과 회합하고 동인으로부터 ”나는 신병으로 우리가 염원하는 공산주의국가 건설을 위한 투쟁을 더 이상 할 수 없으므로 나의 재산을 젊은 후배인 당신에게 줄 터이니 우리의 목적실현을 위하여 혁신계를 규합하여 조직화하는데 활동비로 사용하여 달라“는 지령을 받고 동인으로부터 조직기금조로 금 170만원(자기앞수표5매)를 제공받고 이념을 같이하는 상피고인 유진곤에게 동목적과 내용을 알려주고 금 90만원을 공소 되 김달수에게 금 80만원을 보관 시키므로서 반국가단체의 구성을 여비하고
2. 1982.9 말 경 서울시 종로구 청진동 소재 삼락 일어 연구소 지하 "야자수" 다방에서 상피고인 서도원과 접선하고 동인을 안내하여 서울시 서대문구 안암동 74의3호 소대 록번시장내에 있는 자신이 경영하는 지물포를 거쳐 동소 부근 자택으로 이동, 동소에서 회의하며 국내외 정세등을 논의하던 중 동 서도원으로부터 ”7.4 공동성명으로 남북대화가 시작되여 우리들의 목표인 공산주의를 구현하기 위하여 재투쟁할
시기가 도래한 것으로 믿어지며 옥고를 치루면서까지 투쟁하여 왔는데 기어코 노동자, 농민을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 체제 아래 복지사회를 실현하여야 되겠다. 우리 세력이 너무 분산되어 있고 미약하기 짝이 없으니 재결합이 시급하다. 우리는 자파세력을 규합하여 과거 인민혁명당과 같은 통일적인 조직으로 재정비하여야 하며 이를 위하여 특히 서울에서 엄밀한 동지규합으로 조직을 구성하라“는 지령을 받고 이에 동조하여 서울을 중심으로 인민 혁명당 재건을 위한 공산비밀지하조직의 구성을 합의 결정하므로서 반국가단체의 구성을 모의하고,
1. 1972.10 초순 14:00경 피고인 자택에서 상피고인 서도병과 회합하고 동인으로부터 ”지난번 지령한바 있는 동지규합에 대한 문제는 어떻게 되었는가 어디까지나 엄밀한 조직이라야만 된다. 우리의 신념인 공산주의국가 건설을 위하여 대정부투쟁을 함에 있어 무엇보다도 공산주의 사상 이론의 연구가 긴요한 과제이므로 동지들의 사상적 이론을 위하여 교양자료로서 경북지도부의 하재원 동지가 며칠밤을 세워가며 평양방송을 녹취한 북괴 김일성을 조선노동당 제5차 당대회에서 한 중앙위원회의 사업총화보고문을 수록한 것을 가져왔으니 이것을 탐독하여 교양을 높이고 앞으로 포섭되는 동지들의 사상적 이론교양을 자료로 하라는 지령을 받고 동 노트를 수수하여 3일간에 걸쳐서
가. 위대한 총화에 대하여
(1) 공산주의 공업국가에로의 전경
(2) 문화혁명에서 이룩한 성과
(3) 전체인민의 정치적, 사상적 공고화
(4) 전체인민적 전국가적 당의 체제
(5) 공산주의적 경제관리체제의 전면적 확립
나. 우리의 공산주의제도를 공고히 발전시키기 위하여
(1) 공산주의 경제건설의 중심과업
(2) 공산주의의 문화건설
(3) 사상혁명은 사회혁명화 노동계급화
(4) 국방력 강화
(5) 인민생활의 균형적 발전
다. 남조선혁명에 대하여 남조선혁명의 총력은 노동계급과 기동맹자인 농민을 비록하여 애국적인 군인 일부 애국적인 민족 자본가들 소자본계급 진보적인 청년학생 지식인이다. 남조선혁명은 어디까지나 남조선인민이 주가 되어 수행하여야 한다. 그러나 북반부인민들은 같은 민족으로서 남조선혁명을 적극 지원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 조국통일을 달성하기 위하여서는 통일을 가로막는 장애물인 미군을 몰아내고 현독재정권을 뒤엎고 혁명의 승리를 이룩해야 한다"는 내용의 북괴사업총화보고문을 독하고 이는 남조선인민들의 자주적 역량으로 정부를 전복하라는 지령으로 판단하고 이에 동조하므로써 반국가 단체인 북괴를 이롭게 함과 동시에 표현물을 취득 보관하고,
4. 1972.10. 초순일자미상 21:00경 피고인 자택내실에서 상피고인 김종대와 회합하고 동인에게 전시 북괴 김일성의
조선노동당 제5차 당대회에서 한 중앙위원회 총화보고문이 수록된 대학노트를 제공 탐독케하여 북괴활동에 동조하고
5. 1972.10. 일자불상경 피고인 자택내실에서 상피고인 김용원과 회합하고 동인에게 전시 북괴 김일성의 조선노동당 제5차 당대회에서한 중앙위원회 총화보고문이 수록된 대학노트를 제공 탐독케하여 북괴활동에 동조하고
6. 1972.11부터 1973.1까지 간에 서울 마포구 서교동 소재 대산목재소에서 전시 공소 사실과 같이 상피고인 서도원의 지령을 수행하기 위하여 공소외 전 인민혁명강원 박종대 동 전 민자통원 김달수 및 상피고인 유진곤 등 수차 회합하며 동일등에게 동 김용원을 소개하여 사상적인 결합으로 같은 목적을 위하여 활동하도록 결속시키는 일방 동 김용원에게 상피고인 김종대를 포섭하도록 지시하고
7. 1973.1 일자불상경 서울 종로구 청진동 소대 ”야자수“다방에서 상피고인 유진곤과 회합하고 동인에게 ”자본주의체제의 모순인 빈부의 격차로 국민들은 민생고에 허덕이고 있으나 유신체제로 장기집권만을 획책하고 있으므로 정부를 전복하여 우리가 모두 균등하게 잘 살 수 있는 공산주의국가를 건설하여야겠다. 이러한 목적을 위하며 분산된 혁명세력의 규합으로 인민혁명당과 같은 통일된 조직을 만들어야 하며 각자 사상적으로 무장화되어 있어야 한다. 이북 평양방송에서 공산주의 이념에 관하여 김일성대학 강좌로 알기쉽게 잘 방송하고 있으니 이를 청취하여 사상교양을 높이라“라고 지시교양하고 의견의 일치를 보므로써 반국가단체의 구성을 모의하고 북괴방송의 우수성을 찬양하고
8. 1973.4 초순경부터 7월 말까지 간에 영등포구 방화동 소재 상피고인 김용원가 및 종로구 청진동 소재 ”야자수“다방 등지에서 동 김용원과 수회에 걸쳐 회합하고 ”우리가 염원하는 공산주의국가 건설을 위하여 대중계몽을 통해 민중의 자발적인 호응을 얻어 폭력혁명에 의하여 정부를 전복시켜야 한다. 우리의 혁명적 투쟁을 위하여는 사상적 이론과 조직활동에 관한 연구를 게을리 해서는 안되며 혁명역량을 구축하기 위하여 흩어진 혁신인사들을 포섭 규합하여 인혁당 재건을 위한 공산비밀지하조직을 만들어야 되겠다“는 등을 논의 합의하므로써 반국가단체 구성과 내란을 모의하고
9. 1973.8 일자미상경 전시 ”야자수“ 다방에서 상피고인 김용원과 회합하고 ”우리의 이상적인 공산주의체제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소수의 의의적 투쟁만으로는 정부타도가 불가능하니 학생 데모를 점화시켜 민중의 자연발생적인 호응을 얻어야 한다. 민중봉기를 유발케하는데는 학생들의 선봉적인 역할이 중요하다. 학생 데모는 조직을 확대하여 민중의 자각된 참여를 톡진하고 전국규모의 민중봉기로 유도하여 저지경찰역에 대항 유혈사태를 일으켜 폭주화된 민중과 같이 중앙청 등 주요국가기관을 강점하는 폭력혁명밖에 없다. 이러한 목적달성을 위하여 사상적 이념을 같이하는 동지를 규합하여 비밀조직을 구성하여야 한다.“는 등을 논의 합의 하므로써 반국가단체의 구성과 내란을 모의하고,
10. 1973.9. 일자불상 14:00경 서울시 종로구 소재 옥호불상다방에서 상피고인 우홍선과 회합하고 동인에게”이북에서도 남한의 공산화혁명은 자체역량에 의하여 이루어져야 한다고하므로 우리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하여 이북만을 믿고 있을 수 없는 문제이며 우리 스스로의 역량으로 이루어져야 된다. 그러므로 시기적으로 혁신세력의 재규합이 시급하다.우리도 혁신세력을 규합하여 대구등 각지방 혁신세력과 연합체를 구성 대정부투쟁에 임하여야 한다“ 는 등을 논의하여 동인의 동조를 얻어 의견의 일치를 보고 내10일초에 공소외 이성재, 상피고인 전창일등과 연락하여 회합하기로 합의하므로서 반국가단체의 구성을 모의하고
11. 1973.10 초순 11:00경 서울 중구 충무로1가 소재 "지"다방에서 상비고인 우홍선 동 전창일 및 공소외 이성재 등과 회합하고 동소에서”국체적으로는 냉전시기가 해빙기에 들어섰고 국내적으로는 7.4 공동성명이후 혁신정당의 정치활동이 허용될 것 같으니 동지들의 힘을 모아 공산주의국가 건설을 위하여 투쟁할 시
기가 온 것이다.우리 혁신계 동지들은 흩어진 세력을 하루속히 규합하여 과거 인민혁명당과 같은 통일적인 조직을 구성하여 투쟁대열을 정비하고 대정부투쟁을 전개하자는 것에 전원이 찬동하고“ 공산비밀지하조직을 대건함에 있어 기방법으로서우리의 조직은 서울지도부로 한다.조직은 혁신계와 전인혁당원을 중심으로 사상적으로 이념이 같은 사람들 대상으로 포섭한다.동지들의 조직은 점조직을 원칙으로 하고 동 조직을 상호연락을 중계한다.동 조직은 우리 4인 지도부에서 조종 운영한다.동 조직의 지도위원으로서 도예종, 서도원을 추대한다.본 조직의 정기회합은 매월 첫 일요일 10:00로 정하고 연령순에 의하여 소집책이 되어 4인을 소집하고 사회를 담당한다”라는 등을 각 토의하여 합의 결정하므로서 반국가단체를 구성하고 기구성함에 있어 지도적 임무에 종사하고
12. 1973.10 상순경 서울 미포구 서교동 소재 대산목재사 사무실에서 상피고인 유진곤 동 김한덕과 회합하고 “정부서는 유신헌법과 비상사태를 선포하여 1인독재정치를 연장하고 국민의 자유를 제한하여 정치활동을 속박하고 일본은 사상 최악을 경제불황으로 개발국의 이익을 박탈하고 합작투자는 이익금을 착취당하여 피해가 크다. 한국은 경제성장율이 높다해도 이렇게 착취당하기 때문에 국민경제는 도탄에 빠져있다. 정부는 국민을 속박하는 강압적인 법을 작용, 국민의 자유를 제한하고 있는데 이는 정부의 말로를 표면화하는 것이므로 흐트러져 있는 과거 혁신세력을 재규합하여 정부를 전복하고 공산주의국가를 수립하기 위하여 투쟁하자”등을 합의하고 구체적인 방법으로서 규합된 혁신세력이 학생데모대를 효율적으로 배후 조종하고 선동하여 민중봉기를 야기시켜 중요 국가기관을 강점하는 유혈폭력으로 정부를 전복하자는 등 공산폭력혁명 계획을 논의하므로써 반국가단체 구성과 내란을 모의하고
13. 1973.10 하순경 서울 종로구 청진동 소대 “야자수”다방에서 상피고인 김용원과 회합하고 국내외 정세를 분석 평가 비판하는 일방 이상적인 공산주의체제를 구현하기 위한 단체적인 수단으로서 “전국적이며 조직적인 학생데모를 선도로하여 민중의 호응을 얻어 4.19와 같은 분위기를 조성하여 대항세력과의 유혈사태를 유발 폭주화된 민중과 같이 중앙청 등 주요국가기관을 강정하는 폭력혁명으로서 정부를 전복시켜야되며 이에 우리 세력도 적극 가담되어야 하고 정부를
전복한 다음 노동자, 농민, 학계, 언론계, 양심적인 자본가, 정치인, 청년학생을 망라한 과도정부의 수습위원회를 구성하고 점차적으로 북괴와 영합하여 반대세력의 제거를 통한 공산주의체제로 전환해야하며 따라서 우리 세력을 규합하여 조직화할 것이 시급하고 동시에 학생조직에 관여할 계기를 마련하여야 한다”는 등을 논의 합의 하므로써 반국가단체의 구성과 내란을 모의하고
14. 1973.11 초순경 서울시 영등포구 방화동 583의 11 소재 상피고인 김용원가에서 전시 공소사실과 같이 인민혁명당 재건을 위한 공산비밀지하조직의 구성을 지령 모의하여 오던 중 동 김용원으로 하여금 기 지령을 수행할 목적으로 상피고인 황현승, 동 이창복, 동 김종대 및 유진건 등 5인이 회합하여 “우리의 목적을 달성할 것을 북조선에게 의존할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혁명역량을 조성하여야 하므올 시급한 것은 이념을 같이 하는 우리들끼리의 결합이며 각자가 주변에 있는 이념을 같이하는 동조세력을 규합하고 공산주의혁명을 쟁취함에는 사상적 이념을 견고히 하여 지도적 임무를 수행할 수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학생데모를 성공적으로 유도하여 결정적인 시기에 거국적인 민중봉기로서 목적을 달성하자”는 등을 결의하고 조직활동을 비밀유지를 위해 동시 회합을 피하고 친분관계를 고려하여 1조에 “김달수, 유진건, 박중기” 2조에 “김용원, 황현승, 이창복” 3조에 “김용원, 김종대, 이창복” 등으로 3인식 나누어 회합하여 월1회식 각기 사정을 참작, 시기와 장소를 정하여 회합토록
결정하므로써 인혁당 재건을 위한 공산비밀지하조직인 서울 지도부와 같은 목적의 단체를 구성케 하므로써 반국가단체를 구성하고 기 구성함에 있어 지도적인 임무에 종사하고
15. 1973.11 초순 10:00경 시내충무로 소재 “지”다방에서 상피고인 이성재, 동 우홍선, 동 김창일 등과 월례회합을 하고“이번 학생데모때의 기생관광 반대 등 구호분석 비판, 국내외적 해빙무드 조류를 따라 혁신계 활동의 전망 검토서민층을 중심으로한 물자 및 경제동향 분석중동간제를 위?한 에너지 정책 비판분석,대일경제예속정택과 자유경제 확립문제국내외적으로 야기되는 제반문제에 대한 분석평가,공산주의국가 건설을 위한 단계적 투쟁 및 기 전망”등에 대한 내용을 토의 이론무장을 강조하는 일방 지하조직의 체계를 상피고인 도예종과 동 서도원을 정점으로 하여 동 이성재, 동 우홍선, 동 김창일 및 피고인 등이 지도요원으로 활동한다는 사실을 재확인하고 동 김용원 등의 조직사항 등 조직의 확대강화를 논의하고
16. 1973.11 말 일자불상경 대구시 동구 범어동 소재 상피고인 서도원가에서 동 서도원과 회합하고 동인에게 1973.10 초순경 서울 지도부의 구성상황과 동 서도원과 도예종 양인을 지도위원으로 추대하였다는 사실 등 지령사항의 실천결과를 보고하고 동인으로부터 이념쟁취를 위한 활동에 대하여 수고
하였다는 격려를 받고
17. 1973.12 중순 일자불상 14:00경 서울 청진동 소재 “야자수” 다방에서 상피고인 서도원과 접선회합하고 동인에게 서을 지도부의 활동현황으로 동 김용원 등의 하부조직사항과 계속지도를 부탁한다는 보고를 하고 동인으로부터“우리의 목적달성을 위하여 학생조직이 긴요하며 데모는 대중계몽과 자발적 참여로서 민중 종기로 유도하여야 되고 지난 10월 이후 학생데모는 성공적인 것으로 생각되나 그와같은 분산된 데모는 함이 미약하여 정부전복에까지 진전할 수 없다. 그러므로 전국규모로 학생을 일제히 거사시켜야 한다.3월 개학시의 학생데모는 필연적이니 이를 조직화시켜야 되며 기 학생조직과 우리 혁신세력의 연결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라.학생 조직과 우리와의 연결을 위하여 유능한 학생운동 경험자 1명을 서울로 올려보내어 합법구실로 삼락일어연구소 수강생을 위장 등록케 할터이니 잘 지도하여 서울 학생조직에 임하라. 이 학생의 서울에서의 활동비도 서울조직에서 부담하여야 되겠다.우리는 공산주의이론연구로 동지들 자신의 이념무장을 당화하고 조직을 리드하도록 역량을 길러라. 공산주의 이론연구를 위하여 평양방송의 김일성방송대학 강좌를 청취하는 것이 아주 체계적이고 이해하기가 좋으니 청취를 습관화하라”
는 등의 교양지도를 받고 이에 동조하므로서 반국가단체의 구성과 내란을 모의하고
18. 1973.12 중순 일자불상 19:00경 서울 중구다동 소재 옥호미상 다방에서 상피고인 도예종과 회합하고 동인에게 전시 제11 공소사실과 같이 인민혁명당 재건을 위한 공산기밀지하조직인 서울 지도부의 결성상황과 기간의 조직 확대 강화등을 보고하자 동인으로부터 지도위원으로의 취임을 결히 쾌히 승낙받음과 동시에 동인으로부터“ 현재 학생데모를 위시하여 종교계, 언론계, 재야인사 등이 언론, 종교의 자유를 부르짖고 구국기도회 및 유신헌법 개정 청원 등을 전대하며 더욱이 원유파동으로 인하여 경제적 불황으로 정부가 극히 곤란한 처지에 있으므로 현정부는 붕괴될 시기가 도래한 것으로 생각한다.우리들 혁신계인사들이 너무 흩어져 있었으니 우리의 목적을 위하여 이제 서서히 모려 힘을 규합할 때가 왔다.정부를 전복하는 길은 산발적인 학생데모 만으로는 불가능하고 전국적인 조직으로 학생제모가 유발되여 이에 민중의 호응을 받아 유혈폭동 방법밖에 없으므로 학생운동을 하든 사람으로서 앞으로 이를 중심적으로 연구해 보라”고 지시를 받고 이에 동조하여 “그런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더욱이 남한내의 공산화력명은 우리 자체역량에 의하여 이루어져야 하므로 자파세력의 규합이 급하다고 믿읍이다”라는 등 정부를 전복하고 공산주의국가를 건설하도록 노력할 것을 논의하며 의견의 일치를 보므로써 반국가단체를 구성하고
내란을 음모하고
19. 1973.12 경부터 1974.2 경까지의 간 전후 3회에 선하여 전시 ‘지’ 다방을 위시하여 기부근 ‘목신’다방 및 옥호불상 대포집을 전전하면서 4인 지도부인,상피고인 우홍선, 동 전창일, 동 이성재 등과 4명이 월례회합을 하고“서울문리대 10.2 데모는 전국적인 봉기가 아니고 산발적인 데모였고 또한 민중의 호응이 없어서 실패한 것이다. 우리는 학생 데모를 지도하녀 전국학생연합체를 구성 일제히 봉기시키고 우리 조직을 동원 민중봉기화하여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여야 한다.정부의 유신헌법과 1.8 긴급조치 등은 독재정권의 영구집권을 위하여 국민을 강압하는 것이니 이를 철폐하도록 대정부투쟁을 하여야 한다.정부가 전복되면 학생, 혁신계, 종교인, 지식인 등으로 과도정부를 수립하고 점차적으로 북괴와 영합하여 통일된 공산주의국가를 건설한다.이를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통일촉진협의회에 위장가입하여 행동하자”는 등을 토의하여 합의 결정하므로써 내란을 음모하고 대한민국 헌법 및 대통령 긴급조치 제1호를 비방하고
20. 73.12 중순경부터 74.4.10까지 매일 5:00~6:30까지 전후 수10회에 선하여 피고인 자택내길에서 피고인 소유 일제 트란지스타 라듸오로 평양방송을 김일성방송대학강좌를 청취하여 공산주의 이론 강의와 “중동분쟁을 위요한 에너지 문제와 월남 크메르전 등을 예로보아 국제공산주의가 유리하다. 지난 10월경 남조선학생들의 영웅적인 투쟁을 지지하며 공산주의혁명을 성공시키려며는 애국적대중이 그 주위에 뭉펴서 싸워야 한다. 혁명은 청년학생과 노동자, 농민이 주축이되여 영웅적추쟁으로 혁명을 성공의 길로 이끌어야 한다”는 등 대남시사비방방송을 청취하고 공산주의 이념을 강화하는 일방 북괴를 찬제, 고무 동조하고
21. 1974.1.4. 13:00경 서울시 종로구 청진동 소재 “야자수” 다방에서 전시 공소사실과 같이 상피고인 서도원의 지령을 받고 상경한 경북지도부 학원담당책인 여정남과 접선 회합하고 상호인사를 나눈다음 1.7 14:00에 같은 장소에서 재접선키로 한다음 1.5 1:00 동다방에서 상피고인 김용원과 접선 회합하여 동인에게 “3,4월 위기설에 국민이 동요되어있고 개학과 동시에 전국적인 조직적 학생 데모를 유발시켜 민중의 호응으로 우리의 목적을 실현시킬 수 있도록 이 학생조직에 관여가 필요하며 이를 위하여 유능한 학생을 소개할터이니 직접 지도하라. 동인과의 접선을 1.7 14:00에 같은 장소에서 하겠다” 고 지령을 하고 1.7 14:00 동다방에서 동 여정남을 동 김용원에게 접선시켜주면서 동 여정남에게 “좋은 선배이니 잘 지도받으라”고하여 지도선의 변경을
결정하고
22. 1974.1 중순 12:00경 전시 “야자수” 다방에서 상피고인 도예종과 접선 회합하고 동인으로부터 “유신헌법은 국민의 기본권을 박탈하고 1인독재를 영구화하기 위한 악법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유지하기 위하여 1.8 긴급조치같은 부당한 조치로서 국민의 권리행사를 억압하려고 하니 이는 당연히 철폐되어야 되겠다. 전에 말한 바있는 전국적인 학생조직에 대하여 학생과 연결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였는가. 학생동원이 가능하다면 우리 조직과의 연결은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의 목적을 구현하기 위한 투쟁시기는 3월 학생개학기를 택하는 것으로 대비하라. 조직대상은 혁신계인사 및 학생운동경험자중 애국적인 인사를 택하고 각자 공산주의이론을 연구하여 사상무장을 철저히 하고 공산주의국가 수립을 위한 전단계 작업은 대중계몽 위주로하여 자발적 참여로서 정부를 전복시키는데 우리 세력이 중심이 되어야겠다”는 지령을 받고 동인에게 “학생조직문제로 서도원선생이 상경시킨 여정남을 지도하며 학생조직에 관여하고 있고 현정부 타도의 투쟁의의를 높이고 있다”고 보고하므로써 대한민국헌법과 대통령긴급조치를 비방하고 반국가단체의 구성과 내란을 모의하고
23. 1974.2 초순경 전시 “야자수 다방에서 상피고인 김용원과 접선 회합하고 동인으로부터 기간 여정남을 지도한 결과 사상적으로도 무장이 잘되여 있고 학생조직활동과 학생데모에 관하여 상당한 수준에 이르고 있어 교양이 필요없을 정도이라는 동 여정남의 사상이념 검토결과를 보고받고
24. 1974.2 중순 일자불상 18:00경 서울 특별시 마포구 서교동소대 대산목재회사 사무실에서 상피고인 김한덕과 접선 회합하고 ”국제 에너지 파동으로 인한 국내경제혼란이 의외에도 심각한 것은 정부정책에 결함이 있는 것이며. 이러한 중요한 시점에 대책은커녕 정부에서는 긴급조치를 선포하여 국민을 속박하고 장기집권만 노리니 우리는 과감한 폭력혁명투쟁으로서 복지세도가 보장되는 공산주의국가건설을 해야한다“는 등을 논의하므로서 대통령긴급조치를 비방하고 내란을 모의하고
25. 1974.2 일자미상 18:00경 서울시 영등포구 방화동 소재 상피고인 김용원가에서 동 김용원, 동 이창복, 황현승, 동 김종대 등과 5명이 회합하고 자본주의체제하에서의 모순성인 빈부의 차이 및 특권층과 매판자본가와의 결탁 등으로 노동자, 농민 등 무산대중이 격심한 피해를 받고 있다. 이는 현정부의 제도상의 모순과 실정에서 오는 결과이고 정부는 1인 독제체제하에 장기집권을 목적으로 유신헌법을 제정 공포하여 국민을 탄압하고 있으며 이를 유지하기 위하여 긴급조치를 선포하여 자유를 억압하고 있으니 우리의 조직을 확대강화하여 전국적인 학생조직과 연결하여 정부를 전복하고 우리의 목적인 공산주의국가건설을 위하여 점차적으로 국가체제를 변혁하여야 한다”는 등을 논의하므로써 대한민국헌법
및 대통령긴급조치를 비방하고
26. 1974.2. 하순 일자미상 13:00경 서울 중구 다동소재 옥호미상 다방에서 상피고인 도예종과 접선 회합하고 동인으로부터 “유신헌법과 1.8긴급조치등으로 국민을 억압하는 현정권을 타도하고 우리가 염원하는 공산주의국가건설을 위한 결정적 거사시키는 3월 개학시기로 정하고 이를 위하여 우리의 조직을 확장하고, 우리 조직원으로서 포섭할 대상자를 물색함에 있어 과거 인혁당원이나 혁신계의 동지적인 인물중에서 학생운동 경험자를 포섭하고, 우리의 목적은 북괴와 영합하여 공산주의 통일국가를 대립하는 것이므로 기 목적수행을 위하여 전단계작업으로 대중계몽을 위주로 하여 국민을 선동하면서 학생데모를 선도로 민중봉기를 이르켜 폭력혁명으로 정부를 전복하여야 한다. 우리는 앞으로 어떠한 사태도 대처할 수 있는 이론과 조직에 관한 연구를 지속하여야 한다.”라는 등의 지령을 받고 이에 동조하여 동인에게“결정적인 시기를 3월 개학기로 정하고 우리의 조직원인 여정남을 통하여 서울의 학생단체를 조종하고 있으며 3~4월에 거사하도록 준비중에 있다”라는 등의 보고를 하므로써 대한민국 헌법 및 대통령긴급조치를 비방하고 내란을 모의하고,
27. 1974.3 중순경 전시 “야자수” 다방에서 상피고인 김용원과 접선 회합하고 동인으로부터 “대학이 개학되는 대로 전국적으로 학생들이 일제히 봉기할 수 있도록 전국적인 학생조직이 결성되었으나 여러선에서 지도하고 있는 모양이며, 여정남은 계속 열심히 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으므로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이 구성되었음으로 인지하고
28. 1974.3.21. 19:00경 서울시 청진동 소재 “야자수” 다방에서 상피고인 김용원을 접선 회합하고 동인으로부터 “여정남을 금일 전국적인 거사의 점화역할로서 경북대학에서 데모를 이르킨다고 하며 이때 사용할 유인물을 지참 상경하여 제공받았다.”는 보고를 받고 경북대 반독재 구국투쟁 위원회 명의로 된 유인물인 “우리들이 관망하는 동안 조금도 반성없이 악랄하고 기만적인 방법으로 민중을 우롱하고 있다.동서고금에 유례없는 악법인 유신헌법을 반대하고 폐지 수정을 주장했다고 민주정치인, 발기인, 시민, 학생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잡아가두어 중형으로 다스리고 일절 말할 권리를 박탈하고 있다.언론을 강압하여 무비판 복종형태를 언론을 오도케하여 국민대중을 기만하고 있다.유신헌법을 폐기하고 민주헌법을 제정하라남북대화 평화통일 정책을 집권연장의 수단으로 삼지말고 민주단체 및 평화통일운동자들을 참여시켜라중앙정보부를 해체하라파멸 직전에 있는 중소기업과 민족산업의 구제책을 세우라.”
는 유신헌법의 폐기등을 주장하는 내용의 반독재민주구국선언문 1매를 제공받아 탐독한 다음 3.00 13:00경 근무처인 삼락일어연구소 사무실에서 동 김종대에게 동 반독재민주구국선언문을 제공하여 탐독케 하므로서 대한민국 헌법을 반대하는 행위를 알리는 동시에 민청학련과 기 구성원의 활동에 관여하고
29. 1974.3 말경 서울시 청진동 소재 “야자수”다방에서 상피고인 김용원과 접선 회합하고 동인으로부터 “여정남은 전국적인 학생조직체를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이라고 무르기로 하였고 오는 4월 3일 기하여 전국적으로 일제히 봉기하기로 결정하였다면서 거사시 민중 선동용으로 사용한 유인물 제조비 금 10만원의 제공요청을 하여 왔다”는 보고를 받고 전시 공소사실과 같이 동 서도원으로부터 여정남의 활동비는 서울 조직선에서 부담하라는 지령을 수행하기 위하여 동 김용원에게 “자금을 준비하여 여정남의 요구대로 지원하여 주라”라고 지시하여 동 김용원으로 하여금 동 류진곤으로부터 금 190,000원을 제공받아 동 여정남에게 거사비용으로 금 185,000원을 제공케하여 내란을 예비하고 민청학련의 활동에 관여하고
30. 1974.4.3. 22:00경 발표된 대통일긴급조치 4호의 내용을 지실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전시 공소사실과 같이 상피고인 김용원과 고 여정남등을 통하여 민청학련을 조직하고 동 민청학련 및 기 구성원의 활동에 직접간접으로 관여하였던 사실이 있음에도 기 행위내용의 전부를 수사정보기관에 고지하지 아니하고
31. 1974.4.6. 13:00경 전시 “야자수”다방에서 상피고인 김용원과 접선 회합하고 동인으로부터 “4.3 거사 당국의 제지로 실패하였으나 계속 조직을 정비하여 투쟁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민청학련 명의로 된 유인물인 작년 10월의 역사적 투쟁은 권력배들의 응답은 기만적 폭압정치의 확대뿐이다.“기아수출입국 GNP신앙을 교리로 내걸고 민족자본의 압살과 매판금을 빙자하여 수십억불의 외채를 국민에게 전가시켜 혈세를 강요한다.매판 특권체제와 부정부패의 특권족벌들이 서민생활을 위기에 몰아넣고 있다3선개헌으로 노골화된 영구집권 1인독재와 정보 폭압정치다자유를 침탈하여 노예상태를 강요하는 깡패집단들호화방탕을 일삼아 민중의 살과 뼈를 삼켜 살찐 도둑무리들 신식민주주의자들에게 이땅을 제물로 바친 매국노들이라는 요지내용의 ”민중, 민족, 민주선언문“ 1매 ”“기성 정치인들은 조국이 이처럼 비탄하게 된 책임을 절감하고 반민중적인 죄과를 국민에게 사화하고 민주투쟁에 참여하라언론탄압속에 투쟁해온 기자노조 찬사를 보내고 빈민중적인 보도편집을 청산하고 청년학생들을 지지하여 민주투쟁에 참여하라지식인은 진리와 반진리를 판별하고 민중을 인도하여 민중
의 길잡이로 투쟁하라
종교인은 순교자로서의 결단을 내려 독재정권의 시녀가 된 일부 종교인들은 진정한 종교이념을 구현하고 구국민주투쟁의 길잡이가 되라”이라는 요지내용의 “지식인, 언론인, 종교인에게 드리는 글” 1매
“80년대 바라다간 조른 허리 동강난다
유신이란 간판걸고 국민대중 기만하여
민주헌법 압살위해 유신독재 확립하니
정치깡패 5.16의 매국행위 살펴보자
예비군과 교련으로 위기의식 조성하고
비상사태 선언하여 폭력으로 누르면서
‘팟쇼’근성 그러내어 민주주의 결별하니
코에 걸면 코걸이요. 귀에 걸면 귀걸이인
반공법과 보안법을 전권 유지수단 삼아
처량하다 우리 신세 국제거지 되었구나
남북대화 한다면서 국민에게 환상주고
형식회담 결렬되면 정치선전 일삼으니
우리모두 단결하여 착취자를 몰아내고
생존권과 생활권을 완전하게 확보하자
세제대혁 구호밑에 본격적인 착취리라
정의로운 학생들아 용감하게 투쟁하라
교련특혜, 장학특혜 갖은 수로 꾀여봐도
결정적인 시기 올 땐 함께 나서 싸워다오
민주 언론 전통 살려 혁명대열 선도하세
무전유죄 전과자도 새날 위해 궐기하고
실업자와 걸식자도 생존 위해 투쟁하자
넝마주이 구두닦이 모두 함께 참여하고
운전사와 차장들도 권익위해 투쟁하고
고등학생 종교인도 앞다투어 항거했지
학생이여 일어나라 근로자여 궐기하자
봉급자는 서울에서 농어민은 시골에서
선례들의 음호하에 세상천지 진동할제
막을 자가 어디 있고 버틸 자가 누구인가
고통받는 경찰들도 마음으로 우리 돕고
우리 형제 국군들도 썩은정권 지원 없다
나가자 싸우자 민주혁명 이룩하자”는 요지 내용의 “민중의 소리 1매 도합 3매를 교부받아 탐독하므로써 민청학련의 활동에 관한 표현물을 소지하고
32. 1974.4.7. 13:00경 시내 청진동소재 삼락일어연구소에서 상피고인 김용대를 접선 회합하고 전시 전국민청학련 명의 민중의 소리 등 3종 3부의 유인물을 제공 탐독케 함으로서 민청학련의 화ᅟᅥᆯ동에 관한 표현물을 배포하고,
33. 1974.4.15. 14:00경 서울시 종로구 종로1가 ”희“다방에서 상피고인 서도원과 접선 회합하고 동 여정남과 연락을 유지하며 신변을 보호할 것과 4.3거사의 실패는 우리조직의 역량을 생각지 않고 너무 무리하였던 것에 원인이 있다는 것을 논의하므로서 민청학련의 구성원과의 회합 및 연락과 편의제공을 음모하고
34. 1974.4 중순 16:00경 서울 마초구 서교동 소재 대산목재소에서 상피고인 김한덕 동 류진건등과 회합하고 ”학생들이 데모를 한다고 4.3긴급조치를 발표한 것은 너무 가혹하게 다스리는 처사이며정부가 정치를 잘못한 것은 생각하지 않고 국민을 억압하려는 부당한 조치이다“라고 논의하므로서 대통령긴급조치를 비방하고
35. 1974.4.17. 19:00경 서울시 중구 무교동 소재 ”치술령“주점에서 상피고인 김용원, 동 류진건, 동 김종대 등과 회합하고 민청학련이 주동하던 학생데모는 류진건이 자금을 제공하여 배후조종을 하였으나 이번 4.3긴급조치로 인하여 민청학련의 거사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4.3긴급조치는 더욱더 국민을 탄압하려는 것이므로 기필코 폐지되어야 하겠다는 논의를 하므로서 대통령긴급조치를 비방하는 등만국가단체의 구성원으로서 지도적 임무에 종사하고 내란을 예비음모하고 대한민국 헌법을 반대 비방하고 대통령긴급조치 1호를 비방하고 북괴의 활동을 찬제 고무 동조하여 반국가단체를 이롭게 하고, 4.5 조치 이전에 민청학련조직에 관여한 사실등을 고지하지 아니하고 민청학련의 표현물을 소지 배포하고 기 구성원과의 회합 연락 편의제공 등을 음모하여 대통령긴급조치 4호를 위반하고 또한 동 조치를 비방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