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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자주통일 촉진회’조직 발기

20일, 천도교 본부 서울사무실에서 민족건양회민족건양회(民族建揚會)는 1946년 1월 5일 서울 가회동에 있는 박진의 집에서 작은 집결을 표방하면서 창립되었다. 이날 민족건양회는 “민족혁명 자주자력의 강화로써 외세영어(外勢領御), 통일건국 그 다음의 논책의 사로(史路)대로 전진”이라는 목표를 설정하였다. 단체의 실질적 책임자는 이종률이었다. 이 시기에 이종률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민주민족청년동맹(민민청) 간부들이 서울로 올라왔고, 민족건양회이종률·박진·문한영 등과 천도교계 인사 박래원 등이 중심이 되어 민자통을 조직하게 되었다(이종률, 『민족혁명론』, 들샘, 1989, 232쪽 ; 『김상찬 수고』, 2쪽(김지형, 「4.19 직후 민족자주통일협의회 조직화과정」, 『역사와 현실』 21호, 1989, 141쪽에서 재인용)). 인사 이종률이종률은 1925년 5월초 조직된 최초의 사회주의적 학생단체인 공학회(共學會)의 창립을 주도하였다. 이후 우리말사건·전국학생동맹휴학 옹호동맹사건 형평청년전위동맹사건 등을 주도하며 수차례 투옥 당하였다. 이후 1946년 1월 민족건양회를 창립하여 민인혁명론을 주장하고, 1960년 4.19 이후에는 민자통 결성을 주도하면서 민족혁명적 민족통일안을 제시하였다. 『부산일보』 논설위원·부산대 정치학과 교수 등을 역임하였다(산수이종률선생기념사업회 엮음, 『山水 李鍾律 著作資料集』 제1집, 들샘, 2001 참고).·박진·문한영과 천도교계 박래원 등이 모여 ‘민족자주통일 촉진회(이하 민자통)’ 조직을 발기하였다.문한영, 「60년대의 민족자주통일운동-민자통을 중심으로 한 증언」, 『한국사회변혁운동과 4월혁명』2, 1990, 149-15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