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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민주악법 반대 공동투쟁위원회, 반민주악법 반대 궐기대회 개최

22일 오후 2시 20분부터 서울시청 앞 광장에 약 1만 명의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혁신계 정당 및 사회단체의 공동주최로 반민주악법 반대 성토 대강연회가 열렸다. 이날 강연회에는 장건상을 비롯한 10명의 연사들이 참석하여 한결같이 반공임시특별법안데모규제법은 자유당 식으로 국민을 탄압하기 위한 것이며, 실정을 은폐하고 정권을 계속 장악하기 위한 장면정권의 흉계라고 비판하였다. 또한 이날 시위에서는 5개 항목의 결의문이 채택되었는데, 내용은 아래와 같다. 결 의 문 一. 우리는 장면정권이 획책하고 있는 반공임시특별법·데모규제법은 물론 이승만의 전제정권의 해족적인 국가보안법까지도 즉시 철폐할 것을 결의한다
二. 우리는 반민악법을 제정하여 인민의 기본권을 박탈하고 외세의존으로 남한 특권보수주의를 고수하여 민족통일을 방해하려는 반민족적인 장면정권은 총사퇴할 것을 결의한다
三. 우리는 인류사상 최초 및 최대의 악법인 반공법 및 데모규제법을 인민의 의사를 배반하여 만약 현 국회가 이를 통과시킬 때는 국회불신임투쟁까지 전개할 것을 단호히 결의한다
四. 우리는 배고파 못살겠다고 아우성치는 수백만 피압박 대중들의 그 외침에 발맞추어 조국의 평화통일을 최단시일 내에 성취할 것을 결의한다
五. 우리는 학문과 사상의 자유를 짓밟고 양민을 공포정치 속에 휘몰아 넣으려는 2대악법안을 철회할 때까지 결사 투쟁할 것을 결의한다
출처 : 『민족일보』 1961. 3. 23 조1면
한편 이날 강연회 도중에 4개의 반공단체들이 집회를 반대하는 삐라를 수없이 뿌리고 스피커를 통해 강연을 방해하였다. 이로 인해 주최 측과 반공애국청년동지회 간에 실랑이가 벌어지기도 하였으나 큰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 집회가 끝난 후 시위대는 강연회에 이어 횃불시위를 감행하고자 했으나 경찰과의 충돌로 무산되었다. 경찰은 집회에 대비하여 기동대를 비롯한 1천여 명의 경관을 동원하고 최루탄 30여발을 발사하는 등 강경진압에 나섰다. 경찰은 이날 시위대 123명을 긴급 구속하고 반민주악법 학생투쟁위원회 간부인 유인재 외 27명을 지명 수배하였다. 체포과정에서 경찰관 23명이 부상을 입기도 하였다. 경찰은 집회에서 “인민공화국 만세”, “인민의 아들 딸이여 총궐기하여 이 대열에 참가하라” 등 불온 구호가 나왔다면서 사찰 관련 수사를 벌이기 시작했다고 밝혔다.『민족일보』 1961. 3. 23 조1면 ; 『동아일보』 1961. 3. 23 조3면 ; 『조선일보』 1961. 3. 22 조3면, 석3면 ; 3. 23 조3면 ; 『민국일보』 1961. 3. 23 조1면. 『동아일보』는 이날 성토대회에 혁신계·청년·학생 등 3개 공동투쟁위원회와 39개 단체 회원 등 약 5천명이 모였다고 밝혔고, 『민국일보』는 1만 5천여 명이, 『민족일보』에서는 3만여 명이 모였다고 하였다. 이날 연사로 나온 이들은 장건상(혁신당 위원장)·최근우(사회당 위원장)·김달호(사회대중당 위원장)·윤길중(통일사회당 정책위원장)·고정훈(통일사회당 선전국장)·신태악(법조계 대표)·조용수(민족일보 사장)·박완일(청년공투위 대표)·노정훈(학생공투위 대표)·김면중(4월부상학생총련 대표) 등 10명이었다. 『민족일보』에 따르면 공투위는 이날 시청 앞 광장에서 한국은행 앞을 돌아 을지로5가·종로·광화문까지 시가행진하면서 횃불시위를 계획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