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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고등학교 학생 800여 명, 학원의 자유 주장하며 시위

2월 25일, 경북고등학교는 학생들에게 원래 3월 3일로 예정되어 있던 학기말 시험을 28일에 일부를 실시하고 나머지는 3월 3일부터 계속한다고 발표하였다. 학교 측의 시험일자 변경발표에 학생들은“준비관계로 곤란하다”,“ 무슨이유로변경하느냐”,“ 그날이 민주당 강연회가 아니냐”등의 발언을 하며 즉시 학생위원회 소집을 요구하였다.
26일 학생위원회 부위원장 이대우(2학년)는‘2월 28일 하오 1시의 등교에 관한 건’으로 지도위원 선생에게 학생위원회 소집을 요구하였으나 지도위원은 결재를 학생과장에게 미루었다. 학생과장은 학생위원회 소집을 거부하며 학생들에게 이유는“뻔하지 않느냐”라고 하였다. 교감 또한 소집이유가 없다고 불허하였다. 그러나 26일 오후 학생들은 자체적으로 학생위원회를 소집하고 학교 당국에 항의하였다.
1. 일단 3월 3일로 결정 발표된 시험 일자를 변경한다는 것은 관례상 부당하다.
2. 시험 준비 기간의 단축으로 응시에 지장 있다.
3. 하필이면 학생들에게 휴양의 자유를 박탈하여 일요일에 실시코자 하는가.
4. 민주당의 강연회건 어디 강연회건 정치관계 때문에 피해입고 싶지 않다.
5. 어떤 정당의 강연회를 듣건 학생자신의 자유가 아니냐.남욱, 「2·28대구학생데모사건의 진상」, 『새벽』1960월 4월호, 새벽사, 94-99쪽
학교 당국은 학생들의 요구에 대해“등교한다는 전제 밑에 등교조건을 변경한다든가 하는 점 같은 것은 토론이 될 수 있으되 등교여부를 토론하는 것은 안된다”고 응답했다. 이에 학생 대의원들은 학교의 제안을 받아들여 일요일에 시험은 보지 않으나 월요일 수업을 당겨 일요일에 등교하고 월요일은 휴식할 것을 요구했고, 학교 측에서도 승낙하였다.
그러나 학교 측은 27일 갑자기 절충안을 폐기하고 일요일 시험을 재발표했다.경북고등학교 교지는 학교 당국이 28일에 다시 시험을 실시한다고 발표한 때가 26일 종례시간이었다고 밝혔다「( 2·28 경과상보」, 『경맥』7호, 경북고등학교, 1960(2·28민주의거40주년특별기념사업회, 『2·28민주화운동사』자료집 Ⅱ, 2000, 231쪽 재인용)). 학생들은“학생위원회를 무시한다”고 불만을 터트렸고, 이는 학생들 사이에 결정적으로 시위론을 일으킨 계기가 되었다. 일부 학생들은 학교 당국에 협조하는 학생위원회는 필요없다며 학생위원회 무용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학생들이 반발하자 당황한 학교측은 시험은 그만두고 28일 오후 1시까지 등교해 영화감상을 하자며 무마하였지만 학생들의 흥분은 더욱 고조되고 시위론이 격화되었다.
일부 교사는 도 당국에서 일요등교를 거부하는 학생의 명단을 가져오라고 하였지만 사제의 정을 생각해 등교 거부 학생이 한 명도 없다고 보고하겠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2·28경과상보」,『 경맥』7호, 경북고등학교, 1960(2·28민주의거40주년특별기념사업회, 232-233쪽 재인용)
2월 27일 학생부위원장 이대우는 하교 후 지도급 학생들과 만나 시위를 계획하는 한편 공납금 미불로 퇴교한 하청일(3학년)에게 결의문 초안을 작성하게 했다. 집으로 돌아온 이대우는 27일 갑작스레 일요일 등교를 발표한 대구고등학교·경북사대부속 고등학교의 대표들과 자신의 집에서 밤을 새워가며 시위 결행 여부를 토의하였다.
이들은“①2월 28일 하오 1시를 기해 일제히 궐기하여 자유를 전취하기 위한 피의투쟁을 전개하기로 한다, ②데모한 학생을 구속하거나 선생님들에 대한 인사적 조치가 있을 때는 우리는 데모를 계속할 것이며 사태가 악화될 경우에는 한국의 전 백만 학도에게 호소한다”라고 결의하였다.이강현 편, 『민주혁명의 발자취』, 정음사, 1960, 19쪽.
동아일보도 이대우가 27일 대구고등학교 학생 간부들을 만나 28일 오후 1시 반월당 앞에서 시위를 할 것을 대구고교·경북고교와 완전 합의했다고 전했다(『 동아일보』1960. 3. 7 조3면). 그러나 또 다른 기록은 학생들이 사후처리의 어려움을 생각하고 전원 시위 단념상태로 취침했으며 구체적인 확약없이 다음날인 28일 서로 등교를 하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남욱, 96쪽). 한편『서울신문』은 이대우가 25일 민주당 경북도당간부로부터 민주당 강연회가 열리는 28일 오후 2시 경을 기해서 데모를 일으키라는 사주를 받았으며 이대우 또한 이같은 사실을 자백했다고 보도하였다(『서울신문』1960. 3. 1 조1면).

민주당 부통령후보 장면의 연설이 예정되었던 28일 일요일, 영화 관람을 이유로 등교지시를 받은 경북고 학생들은 12시 50분 학교교정에 모였다. 이대우는 시위를 하더라도 운영위원회를 소집하고 결의한 다음 결의문을 정식으로 채택하려고 했다. 그러나 대구고 학생위원회 위원장이 경북고를 찾아와“우리는 이미 교문을 나섰다”라고 함으로써 경북고 학생들 사이에 시위에 대한 기운을 복돋았다. 이에 경북고 전교생이 운동장에 모이기 시작하며“학생위원장은 뭣하는 놈이고!”를 부르짖었다.
이대우가 선두가 된 학생운영위원들은 두터운 두루마리 결의문을 갖고 조회단에 올라“일요일날 학생들을 등교시키는 폐습을 시정시키고 학원 내의 자유를 찾기 위해학원 내의 여론을 사회에 반영시키자”고 결의문을 낭독했다. 교사들의 제지와 시간이 없다는 학생들의 외침에 결의문은 1/3정도 건너뛴 채 낭독되었다. 누군가가 단상에 뛰어 올라“우리의 뜻을 사회에 알리자. (중략) 코스는 반월당 역전! 구호는‘횃불을 밝혀라 동방의 빛들아’”라고 외쳤다. 그러자 경북고 1, 2학년생 약 800명은 교사들의 제지를 무릅쓰고 교문을 나와 거리로 나갔다.『 동아일보』와『대구신문』등의 신문 매체는 800여 명의 학생이 시위에 가담했다고 보도했고, 남욱은 700명이 교문을 나선 것으로 기술했다(남욱, 97쪽).
경북고등학교 결의문 인류 역사에 이런 강압적이고 횡포한 처사가 있었던가. 근세 우리나라 역사상 이런 야만적이고 폭압적인 일이 그 어디 그 어느 역사책 속에 끼어 있었던가?
오늘은 바야흐로 주위에 공장연기를 날리지 않고 6일 동안 갖가지 삶에 허덕이다 모이고 모인 피로를 풀 날이요, 내일의 삶을 위해, 투쟁을 위해, 그 정리를 하는 신성한 휴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하루의 휴일마저 빼앗길 운명에 처해있다. 우리는 1주일 동안 하루의 휴일을 쉴 권리가 있다. 이것은 억지의 말도 아니고 꾸민 말도 아니고 인간의 근세 몇 천년 동안 쭉 계속해서 내려온 관습이요, 인간이 생존해 나가기 위한 현명한 조치이다. 그러나 우리는 살기위해 만든 휴일을 빼앗기고 피로에 쓰러져 죽어야만 하나, 생각해 볼 일이다.
우리는 배움에 불타는 신성한 각오와 장차 동아(東亞)를 짊어지고 나갈 꿋꿋한 역군이요, 사회악에 물들지 않은 백합같이 순결한 청춘이요, 학도이다.
우리 백만 학도는 지금 이 시각에도 타골의 시(詩)를 잊지 않고 있다.‘ 그 촛불 다시한번 켜지는 날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
큰 꿈을 안고 자라나는 우리가 현 성인사회의 정치놀음에 일절 관계할 리도 만무하고 학문습득에 시달려 그런 시간적인 여유도 없다.
그러나 이번 일은 정치에 관계없이 주위에 자극받지 않은 책냄새, 땀냄새, 촛불 꺼멓게 앉은 순결한 이성으로서 우리는 지금까지 배운 지식을 밑바탕으로 하여 일장의 궐기를 하려 한다.
백만 학도여, 피가 있거든 우리의 신성한 권리를 위하여 서슴지 말고 일어서라. 학도들의 붉은 피는 지금 이 순간에도 뛰놀고 있으며, 정의에 배반되는 불의를 쳐부수기 위해서는 이 목숨이 다 할 때까지 투쟁하는 것이 우리들의 기백이며, 이러한 행위는 정의감에 입각한 이성의 호소인 것이다.
우리는 민족을 사랑하고 민족을 위하여 누구보다도 눈물을 많이 흘릴 학도요, 조국을 괴뢰가 짓밟으려 하면 조국의 수호신으로 가버릴 학도이다.
이 민족애의 조국애의 피가 끓는 학도의 외침을 들어 주려는가?
우리는 끝까지 이번 처사에 대한 명확한 대답이 있을 때까지 싸우련다.
이 민족의 울분, 순결한 학도의 울분을 어디에 호소해야 하나?
우리는 일치단결하여 피 끓는 학도로서 최후의 일각까지 최후의 1인까지 부여된 권리를 수호하기 위해 싸우련다.
출처 :『 慶脈』7호, 경북고등학교, 1960 (2·28민주의거40주년특별기념사업회, 『2·28민주화운동사』자료집 Ⅱ, 2000, 187쪽에서 재인용)
시위를 시작한 경북고 학생들은 삼덕동우체국 앞에서 수성교서의 선거 강연장으로 가던 민주당 부통령후보 장면의 택시와 만나기도 했다.언론 중『대구일보』만이 학생들이 장면과 조우하였다고 보도하였다(『대구일보』1960. 2. 29). 또한 장면은 후일 경북고등학교 교지에 쓴 글에서 강연장인 수성천변으로 향하던 중 경북고 정문 앞에서 학생들이 몰려오는 것을 보았는데, 학생들이 환영의 뜻을 표하는 것으로 알고 기뻐하며 손을 흔들어 응답했다고 밝혔다(장면, 「2·28은 정의의 본」, 『경맥』7호, 1960(2·28민주의거40주년특별기념사업회, 208쪽 재인용)). 반월당 앞에서 학생들은 도학무과 담당자들에게 먼저 그들의 뜻을 알릴 목적 하에 도청으로 방향을 틀었다. 앞장섰던 이들 중 200여 명은 도중에 경찰과 충돌해가면서 도청 마당까지 이르렀다.『 대구일보』는 경북도청 앞에 당도한 학생인원이 약 300명(『동아일보』는 200명)이었다고 보도하였다(『대구일보』1960. 2. 29). 반면 경북고등학교 교지와 조화영의 글은 이때의 인원이 600여 명이었다고 밝히고 있다(「2·28경과상보」,『 경맥』7호, 경북고등학교, 1960(2·28민주의거40주년특별기념사업회, 235-236쪽에서 재인용 ; 조화영 편, 『4월혁명투쟁사』, 국제출판사, 1960, 20쪽). 학생들은 도지사실을 향하여 대열을 짓고 이동했으며“경북도지사와 경찰국장은 나와 달라”고 요구했다.다른 기록은 학생들이 경찰국장이 아닌 문화국장의 출두를 요청했다고 기술하였다(남욱, 97쪽). 학생의 요구에 응해 오임근 경북도지사와 경찰간부가 학생들을 무마시키기 위해 나왔으나 이대우는“학원의 자유를 달라”는 요지로 된 결의문을 낭독했다. 하지만 이대우는 정·사복경찰의 출동으로 낭독을 채 마치지 못했다. 이때 학생 일부는 도청 정원 쪽으로 돌을 던졌는데 대다수 학생들이“돌을 던지지 마라”는 함성을 지르자 투석을 즉시 중지하였다.「 2·28경과상보」, 『경맥』7호, 경북고등학교, 1960(2·28민주의거40주년특별기념사업회, 236쪽 재인용) ; 이강현편, 22-23쪽
이후 학생들은 모두 모자를 벗고“역으로 가자”는 구호와 함께 도청 정문으로 쏟아져 나왔다. 정·사복경찰들은 문을 닫고 학생들을 제지하려고 했으나 문을 박차고 나오는 학생들로 인해 문이 열리고 아수라장이 되어 학생들의 책과 노트 등이 정문 앞 길바닥에 뒹굴었다. 좁은 도청 정문에서 학생 30-40명이 경찰에 체포되었다.안동일·홍기범 공저, 65쪽, 경찰은 다시 대열을 지어가려는 학생들을 추격하여 그 중 100여 명을 연행하였다. 경찰의 손을 벗어난 약 60여 명의 학생들은 다시 대구시청 광장 앞으로 집결하였으나 경찰의 출동으로 대부분이 잡히고 대열은 흩어졌다. 그러나 이보다 앞서 본 대열에서 뒤떨어졌던 약 40여 명의 학생들은 1시 30분 경 다시 도지사 관사 앞에서 스크럼을 짜고 시위했다. 이 과정에서 오임근 경북도지사는 손바닥에 경상을 입었다. 학생들은 도지사 관사에서 대구지구 16헌병대까지 시위를 하려고 시도했으나 역시 경찰에 연행되었다.『 대구일보』1960. 2. 29 ; 『동아일보』1960. 3. 1 조3면, 1960. 3. 7 3면 ; 조화영 편, 15-26쪽 ; 김재희 편,『 청춘의 혈』, 호남문화사, 1960, 61쪽 ; 이강현편, 11-26쪽 이날 시위로 경북고 학생 약 120명 정도가 경찰에 연행되었다.
한편 이날 밤 9시 경에는 백차에 실린 학생 두 명이 시내를 돌면서 마이크로“경북고등학교 학생 시위에 참가했어도 당국에서 관대히 처분하니 안심하고 내일 등교하라”는 가두 선무 방송을 하였다.『 대구일보』1960. 2. 29 ; 『동아일보』1960. 2. 29 조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