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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고등학교 학생, 학원의 정치도구화에 반발하여 시위

대구고등학교 당국은 27일 아침에 학생들에게 토끼사냥(혹은 운동시합)을 이유로 일요일인 28일 등교할 것을 지시했다.대구고등학교에서 경북고등학교보다 먼저 학생들의 일요일 등교를 지시했다는 서술이 있다(지헌모 편,『 마산의 혼』, 한국국사연구회, 1961, 24쪽). 하지만 대부분의 언론과 수기는 경북고등학교에서 25일, 대구고등학교에서 27일에 일요일 등교를 지시했다고 밝힌다. 대구고 학생위원장은 교감을 찾아가 공휴일을 무시하는 처사에 대해 항의했지만 아무런 효과도 없었고, 학생과장은 도리어“영웅도 시대를 따르는 것이니라”고 말하였다. 27일은 대구에서 자유당 연설회가 있었는데 대구고는 수업을 단축하고 학생들을 집으로 보내 부모님에게 강연회에 가도록 권유하라고 지시하였다. 이에 대구고 학생위원장은 27일 밤 경북고·경북사대부고 학생대표들과 만나 시위를 모의했다. 이들은 28일 오후 1시 시내 반월당에서 시위를 하자고 결의한 후 밤 10시 경 헤어졌다.안동일·홍기범 공저, 97-98쪽 그러나 대구고 학생이 미리 준비한 결의문이 한 학생의 부모에게 발각되어 28일 시위 때 발표되지는 못하였다.
28일, 대구고 학생위원장 손진홍은 등교길에 경북고 학생들이 교문을 나섰다는 소식을 듣고 흥분 상태로 학교에 도착했다. 손진홍은 운동장에서 교장의 훈시를 듣고 있는 학생들을 향해“가자! 가자! 우리도 민주 대열에 합류하자”고 외쳤다. 이에 대구고 1·2학년생 800여 명이 교문 밖으로 나오려 시도했으나 교사들의 제지로 약 100명 정도의 학생들만이 학교를 나올 수 있었고 나머지는 교정에 머물렀다.시위에 나온 대구고등학교 학생이 700명이라는 주장도 있다(4월혁명청사편찬회, 『민주한국 4월혁명청사』, 성공사, 1960, 478쪽 ; 조화영 편, 18쪽). 이들은 학교 측의 제지로 오후 2시 경이 되어서야 교문을 나와 경북도청으로 향했다.다른 자료는 1시30분에 대구고등학교가 교문을 나섰다고 기술했다(안동일·홍기범 공저, 67쪽). 학생들은 일요일 등교에 항의하기 위해 도 학무당국으로 가고자 했다. 하지만 반월당을 거쳐 대구매일신문사를 통과할 무렵 미리 사실을 탐지한 남산·중앙 양 파출소 앞에서 출동한 경찰관의 제지로 해산되고 일부는 경찰에 연행되었다.
한편 학교에서 탈출하지 못한 나머지 학생들은 교장의 훈화 도중 제2차 시위를 시도하여 학교를 빠져나왔다. 이들 중 일부는 경찰의 제지를 피해 전동 골목으로 뿔뿔이 흩어졌는데 막다른 골목에 갇힌 수 십 명의 학생을 경찰이 곤봉으로 해산시키는 과정에서 많은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이 과정에서 시민들은 대문을 열어 학생들을 숨겨주기도 했는데 대구고 시위는 골목에서 완전히 진압되었다.『 대구일보』1960. 2. 29 ; 『동아일보』1960. 3. 1 조3면 ; 손진홍, 「부정에 항거하는 젊음들」, 『達丘』창간호, 대구고등학교, 1960(2·28민주의거40주년특별기념사업회, 257-268쪽). 일부 기록은 시위에 참여한 대구고등학교 학생총수를 약 700명으로 보고 있다(남욱, 98쪽). 이날 대구고교생들이 외친 구호는“학생을정치도구화하지말라”“, 우리에게도인류애를달라”등이었다.안동일·홍기범 공저, 9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