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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 학원의 자유 외치며 시위

경북대학교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이하 경북사대부고)는 1951년 대구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로 설립되었으나 1952년 경북대 개교에 의해 학교 명칭을 경북사대부고로 개칭하였다(경북사대부고 홈페이지 참조. http://www.knu.hs.kr). 하지만 1960년 당시 언론과 단행본들은 경북사대부고와 대구사 대부고를 혼용해서 표기하고 있다. 이글에서는 경북사대부고로 통일한다.경북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는 28일 이전에 이미 노래가사 바꿔 부르기 사건으로 교내외를 떠들썩하게 한 적이 있었다. 경북사대부고 2학년 학생 오석수, 이영길, 유효길은 2월 16일 당시 유행하던‘유정천리(有情千里)’노래에 그 전날 서거한 조병옥 박사를 애도하는 내용을 담은 가사를 달아 칠판에 적어 놓았다. 이 노래는 삽시간에 학교 안은 물론 대구 시내로 번져나갔다.안동일·홍기범 공저, 102쪽 가련다 떠나련다 해공(海公)선생 뒤 따라
세상을 원망하랴 자유당을 원망하랴
장면 박사 홀로 두고 조 박사도 떠나갔다
춘 3월 15일 조기선거 웬말이냐
가도가도 끝이 없는 당선길은 몇 구비냐
천리만리 타국땅 벽사 죽음 웬말인가
자유당에 꽃이 피네 민주당에 비가 온다
설움어린 신문들고 백성들이 울고있네안동일·홍기범 공저, 103쪽
경북사대부고 학교 당국은 2월 27일 졸업식이 끝난 후 종례시간에 게임을 할 것이라면서 다음 날인 일요일에도 학생들에게 등교할 것을 지시하였다. 27일 밤 경북고·대구고 학생들과 시위를 논의한 경북사대부고 학생 간부는 28일 새벽 일찍 학교에 나와 긴급회의를 열고 행동계획을 논의했다. 오전 11시 경 학생 간부들은 시위를 하면서도 도지사를 직접 항의 방문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이때 교무주임이“젓가락 하나로 태평양 물을 휘저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너희들이 커서 실력을 길러 깨끗하고 바른 사회를 만들도록 해라. 지금은 공부를 해야할 때이지, 데모를 해서는 안된다”라고 학생들을 달랬다. 경북사대부고 학생들은 경북고와 대구고가 시위를 시작한 시각(오후 1시 30분 경)에 시위에 참가하려 했으나 교직원의 감시로 교문을 빠져나오지 못하였다.
이에 학생들 240여 명은 오후 2시 경부터“일요등교를 해명하라”“, 일요등교 명령자 엄벌하라”,“ 학원의 자유를 보장하라”,“ 감금당한 학생을 즉시 석방하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학교 본관 2층에서 농성을 시작해 오후 7시에도 집에 돌아가기를 거부했다.일부 기록은 경북사대부고 학생들이 오후 3시부터 농성에 돌입했다고 기술했다(안동일·홍기범 공저, 68쪽). 이들은“학생인권을옹호하라”,“ 도지사나학교관계사회책임자는현사태를해명하라”“, 여학생등검거한학생들을빨리석방하라”는구호를외치며농성하였다.
경북사대부고 학생들은 사복경찰과 교직원들, 학부모들에 의해 운동장까지 끌려나왔으나 완전히 어두워진 오후 8시 경 200여 명이 교문을 빠져나와 삼덕우체국 앞 로터리와 법원 앞 통로를 거쳐 대구매일신문사 앞까지 달려왔다.300명이 학교를 빠져나왔다는 주장도 있다(조화영 편, 19쪽). 대구매일신문사 앞에서 학생들은“부고(附高)는 비겁하지 않다.”,“ 학원은 신성하다, 정치는 간섭치 말라”등의 고함을 지르다 경찰에 의해 해산됐다. 밤 7시 40분에는 2학년 학생 약 30명이 도지사 관사 앞에 집결하여“구속된 학생들을 석방하라”고 외치며 시위를 하였으나 즉각 경찰의 출동으로 해산되고 4명이 경찰에 연행되었다. 이들은 계속해서 9시 경 자유당경북도당 앞에서 시위를 전개했으나 역시 경찰에 의해 해산되었다.『 대구일보』1960. 2. 29 ;『 대구매일신문』1960. 3. 1 ; 『조선일보』1960. 3. 1 ; 『동아일보』1960. 3. 1 조3면 ; 박재철, 「역사의 전화점 -2·28을 중심으로-」『, 群星』8호, 경북사대부고, 1961(2·28민주의거40주년특별기념사업회, 271-275쪽). 일부 기록은 오후 8시 경 학교를 나온 학생은 300여 명, 도지사 관사를 포위한 학생은 100여 명이라 했다(남욱, 98쪽).
한편 이날 대구상업고등학교 학생들도 학내에서 동요를 일으켰으며, 대구중학교에서는 시위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학생들을 교실에 몰아넣고 밖에서 열쇠를 채워 학생들을 감금했다. 대구중 학생들은 유리창을 깨고 나오려 시도했으나 학교 측의 제지로 무마되었다.대구중학교 학생관련 보도는 조선일보가 유일하다(『조선일보』1960. 3.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