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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상업고등학교 학생 300여 명 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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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일의 대전고등학교 시위에 이어 10일, 대전상업고등학교 학생 약 300명이 오전 9시 30분 경 학교 조회를 마친 직후 대열을 형성하여 교문을 나섰다. 학생들은 “학원의 자유를 달라”, “친구를 빨리 내 놓으라”는 구호를 외치며 대전경찰서를 향해 시위를 시작하였다.
시위는 10일 새벽 경찰이 대전 지역 일부 학생들을 연행한 것이 발단이 되었다. 3월 9일, 대전고교생 4명과 8일 시위에 가담하지 못한 대전공고생 9명 및 대전상고생 12명 이 회합을 갖고 시위를 모의했는데, 이 정보를 입수한 경찰이 10일 새벽 4시 이들을 경찰서로 연행하였다.연행된 대전상고생이 11명이었다는 보도도 있다(『한국일보』1960. 3. 10 석3면).경찰의 회유로 학생들은 시위를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10일 오전 9시 경 석방되었다. 이 소식을 듣고 대전상고 교장이 학생들을 찾아와 아침식사를 사주었다. 한편 대전상고 학생들은 9시가 넘어도 연행된 학생들이 학교로 돌아오지 않자 경찰이 석방하지 않은 것으로 착각하고 시위를 일으킨 것이었다.
대전상고는 도청소재지에서 약 3킬로미터 떨어진 교외에 있었다. 학생들은 조회가 끝난 9시 30분 대열을 지어 대전경찰서로 행진하기 시작했다. 시위대는 학교에서 약 800미터 떨어진 시청 근처에 이르렀을 때 경찰의 제지를 받았다. 대열은 두 갈래로 나뉘어 한 쪽은 중앙시장 쪽으로 한 쪽은 역전 쪽으로 향했다. 이 과정에서 약 15분간 경찰과 학생들의 난투극이 벌어졌다. 학생들은 강제 진압하려는 경찰에게 돌을 던졌고 경찰은 학생들을 곤봉으로 구타했다. 시위는 시작 30분만에 저지되고 학생들은 다시 학교에 갇혔다. 약 50명의 학생이 경찰에 연행되었고 5-6명의 학생이 부상을 입었다.일부 기록은 학생 10여 명이 부상을 당하였다고 하였다(조화영 편,『4월혁명투쟁사』, 국제출판사, 1960, 279-291쪽).
시위 도중에 자유당 선전차가 학생들을 제지하려 하다가 자유당 선전원이 학생들에게 폭행을 당했다. 정오쯤 대전 시내는 다시 평온해졌다.『동아일보』는 시위 가담 학생이 약 300 명이라고 보도하였고,『조선일보』는 300-400명이라고 하였으며,『대전일보』약 500명,『중도일보』는 약 600명이라고 보도하였다.『한국일보』는 약 200명의 학생이 시위에 가담하였다고 하였다.『서울신문』은 약 60명의 학생이 시위에 가담했으며 민주당의 정략이라 고 주장하였다(『대전일보』1960. 3. 11 조3면 ;『중도일보』1960. 3. 11 조3면 ;『한국일보』1960. 3. 10 석3면 ;『서울신문』1960. 3. 10 석3면 ;『조선일보』1960. 3. 10 석3면 ;『동아일보』1960.3. 11 조3면 ; 안동일·홍기범 공저,『기적과 환상』, 영신문화사, 1960, 82-83 쪽).함께 시위를 계획했던 대전공고와 보문고등학교 학생들은 이날부터 학년말 시험이 시작되어 어수선한 분위기였으며 교사들이 교문을 지켜 시위를 감행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대전상고 교장과 이동립 문사국장은 이 사건에 대해 “데모가 아니다”라고 하며 경찰서를 향해 오던 학생들과 교장이 만나 함께 학교로 돌아왔다고 주장하였다. 특히 이동립 문사국장은 8일의 대전고등학교 시위에 대해서는 배후 관계를 철저히 조사할 것이라고 한 반면 10일의 대전상고 시위에 대해서는 정치적이지도 않고 직접적 인 배후도 없다고 밝혔다.『중도일보』1960. 3. 11 3면
분류
시위 상황 / 대전 196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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