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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원들 시위행진

오후 1시 경 민주당 출신 정남규 도의원과 동아대학생 안종성은 당사 앞에 운집한 시민들에게 민주당 마산시당의 선거포기 경위와 부정선거의 실상을 밝히는 방송을 했다. 그 후 1시 30분 경 민주당 경남도당에서 “불법 폭행이 지배하는 선거를이 이상지 속하여 국민 유권자들의 희생을더 내게 하는 것을 방관할수 없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중앙당에서는 끝까지 선거를 포기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경남도당은 참관인을 비롯한 민주당원들에 대한 테러가 계속돼 부상자가 발생하자 결국 선거를 포기하고, 투표소에서 참관인 전원을 철수시켰다.『조선일보』1960. 3. 16 조3면 ; 『동아일보』1960. 3. 16 조1면
오후 2시 무렵, 마산시당 앞에서부터 불종거리에 모여 있던 시민들 사이로 민주당 창원 을지구당 선거부장 등이 앞장서서 “3·15는 부정선거다! ”, “협잡선거 다시하자! ”는 구호를 외치고 다녔다. 그러자 더 많은 시민과 학생들이 “와! 와!”함성을 지르며 모였다. 이러한 시민들의 호응에 시당에서는 선전용 지프를 앞세워 가두시위를시도했으나 경찰의 제지로 당사 앞에서 좌절되었다. 마산경찰서장 손석래는 지프 위에 올라가 시민들의 귀가를 호소했다. 이때 한 학생이 서장이 쥐고 있던 마이크를 빼앗으려 달려들었고, 경찰은 그 학생을 군중들이 보는 앞에서 구타했다. 이를 목격한 군중들이 흥분하자 경찰들은 철수하였다.3·15의거사 편찬위원회, 293-294쪽
오후 3시 40분 경『동아일보』1960. 3. 16 석3면 ;『마산일보』1960. 3. 17 2면 ; 대한변호사협 회,「마산사건 진상조사보고서」,『대한변협 오십년사』, 2002, 819쪽 ; 김재희 편,『청춘의혈 : 역사를 창조한 젊은 사자들』, 호남출판사, 1960, 71쪽. 일부 기록은 오후 3시 45분 경으로(조화영 편, 29쪽), 일부 기록은 오후 3시 반 경으로(『동아일보』1960. 3. 17 조3 면, 안동일·홍기범 공저, 124쪽), 일부 기록은 오후 4시 경으로(『조선일보』 1960. 3. 16 조1면), 일부 기록은 오후 3시 경으로(이강현 편,『민주혁명의 발자 취 : 전국 각급학교 학생대표의 수기』, 정음사, 1960, 51쪽), 반면 일부 기록에 는 오후 2시 30분으로 기록되어 있다 (3·15의거사 편찬위원회, 294쪽).정남규 도의원을 비롯한 30여 명의 민주당원은 시위대를 구성하여 “부정선거를 배격하자!”고 외치면서 만세를 부르고 당 사무실을 뛰쳐나왔다. 이들은 머리에 수건을 동여매고,“협잡선거 물리치자”, “투표할 자유를 달라!”, “민주주의 만세!”라고 쓴 플래카드를 들고 시내를 행진하였다. 평화적인 시위행진은 불종거리 창동의 번화가를 거쳐 남성동파출소를 돌아 부림시장을 거쳐 다시 당사 앞으로 돌아왔다. 이때까지 경찰은 시위대를 제지하지 않았다. 약 30분 후 군중들이이 시위대열에 호응하면서, 시위대를 따르는 군중이 수 천 명에 이르렀다. 약 1시간 반 동안 마산 시내 일대가 혼란에 빠지자 비로소 경찰이 출동하여 민주당 간부 6명(도의원 정남규, 부위원장 강경술, 상무위원 황칠규, 감찰위원장 정경도, 당원 정진철, 박주복)을 스리쿼터 트럭으로 강제 연행하였다. 군중들은 “선거까지 포기한 사람들을 잡아간다는 것은 지나치지 않느냐”고 분개하기도 했다. 뒤를 따르던 군중들과 연행되는 시당 간부들은 손을 들어 서로 환호하였다.5.『한국일보』1960 3. 16 조1면 ;『마산일보』1960. 3. 17 2면 ;『조선일보』1960.3. 16 조3면 ;『동아일보』1960. 3. 16 석3면, 1960. 4. 1 조3면 ; 안동일·홍기범 공저, 124쪽 ; 3·15의거사 편찬위 원회, 294-295쪽.동아일보는 민주당원의 연행에 시민들이 자극을 받아 3월 15일의 소요기운이 성숙하기 시작했다고 보도했고, 조선일보 또한 민주당원의 연행이 시위의 직접적 동기가 되었다고 보도하였다(『동아일보』1960. 3. 17 조3면 ;『조선일보』1960. 3. 16 조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