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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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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1일, 3·15 마산 사건의 행방불명자였던 김주열의 시신이 참혹한 모습으로 발견되었다. 이를 계기로 오후부터 마산 곳곳에서 또다시 격렬한 시위가 일어났다. 김주열의 시신이 도립마산병원에 안치되자 병원 앞에는 격분한 시민들이 모여들어 시체실을 점거했다. 일부 시민과 학생들이 도립병원을 벗어나 시가행진을 시작하자 신(新)마산과 구(舊)마산 일대의 다른 곳에서도 연달아 시위대가 구성되었다. 이날 시위대는 플래카드와 구호를 통해 고문과 살인을 자행한 경찰을 규탄하고, 정·부통령 재선거를 요구했다. 시위대는 마산경찰서와 각 파출소, 마산시청과 소방서, 형무소 등 관공서에 투석하고 집기를 파괴했다. 창원군청에서는 투표함을 부수고 투표용지를 시내에 뿌렸다. 그밖에 마산시장 관사와 민주당에서 자유당으로 당적을 바꾼 허윤수·김성근 의원의 집, 서울신문 지국, 국민회 마산지부 등을 파괴하였다. 경찰들은 시위가 발생하자 피신하였으나 도경의 증원 조치가 결정되자 경찰서로 집결했다. 마산경찰서 안에 모인 경찰은 공포를 쏘아 경찰서를 포위한 시위대를 해산하려 했지만 공방전이 계속되자 실탄을 발사했다. 이로 인해 마산경찰서 앞에서 1명의 사망자와 5-6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마산경찰서 앞 발포로 일시 해산되었던 시위대는 여러 무리로 나뉘어 마산 곳곳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던 또 다른 시위대들과 구마산에서 합류했다. 이들은 시민들과 함께 구호를 외치며 행진하다 야간통행금지 사이렌이 울리자 대부분 귀가했다. 마지막까지 남은 1천여 명의 시위대는 마산경찰서 앞에서 연행자 석방을 요구하며 연좌농성을 벌였다. 경찰이 연행된 학생들을 석방하자 시위대는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며 해산했다. 김주열 사건은 전 국민의 분노를 일으켰고, 이 날의 시위는 4월혁명의 중요한 거점이 되었다. 마산에서는 12일과 13일에도 시위가 계속 발생하였다.
분류
시위 상황 / 국회 1960-4-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