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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공업고등학교 학생들의 시위와 시민들의 지지
오전 10시 경
오전 10시 30분 경 시위대가 시청 앞을 지나 경찰서로 향하려 할 때 정복경찰관 약 200-300명
일부 기록은 경찰수가 시위대의 2배정도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안동일·홍기범 공저, 171쪽 ; 3·15의거사 편찬위원회, 355쪽).
마산여고와 제일여고의 정문은 잠겨 있었다. 마산여고 학생들은 책가방을 싸고 생활관에서 플래카드를 제작했다. 그러나 교사들은 “설치지 마라! 설치면 재미없다”는 식의 엄포를 놓으며 신발장에 있는 학생화까지 감췄다. 제일여고의 사정도 다르지 않아서, 학생들이 무섭게 여기는 교사들을 뽑아 3학년 교실에 배치시키고, 훈육주임을 비롯한 신체가 건장한 교사들이 학생들을 감시했다. 이와 같은 학교당국의 저지로 마산여고와 제일여고 여학생들은 마산공고 학생들의 시위에 호응하지 못했다.
마산공고 시위대는 제일극장 앞을 둘러 구마산 쪽으로 행진했다. 이때 민주당 윤보선 의원과 몇몇 동료 의원들이 학생들을 만류했다. 학생들이 질서정연한 시위를 하겠고 주장하자 국회의원들은 자신들이 앞장서겠다고 했다. 시위대는 10여 명씩 스크럼을 짜고 애국가와 ‘해방의 노래’를 부르며 마산경찰서를 정면으로 통과했다. 각 신문 통신사의 지프와 USIS의 촬영반이 시위대를 뒤따랐다. 경찰은 2중 3중으로 경계하고 있었으나 시위대를 저지하지는 않았다.
길가에 서서 박수갈채로 응원을 보내던 시민들도 시위대열에 동참했다. 1만여 명의일반 시민들은 때마침 내리는 부슬비에 우산을 들고 뒤따랐다. 시민들은 “자식을 지키자, 우리도 민주주의를 찾아야 하겠다”등의 구호를 외쳤다. 일부 시민들은 시위대에게 양동이로 물을 떠다 주기도 했다. 눈물을 흘리는 여인들도 있었다. 신마산과 구마산을 잇는 도로는 인파로 뒤덮여 보행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교통은 완전히 마비되어 차량들은 인파를 피해 해변통을 이용하고 있었다. 학생 시위대는 북마산을 거쳐 15킬로미터의 시위행진을 마치고 오후 1시 25분 경 무사히 학교로 돌아와 해산하였다. 학생들은 시민들에게 “우리는 이제 학업에 돌아가겠으니 돌아서 달라”고 외쳤다. 학생들은 교장의 제의대로 한 시간 수업을 받았다. 교장은 “이제까지 용기있게 시위를 하였으니 더 이상 흥분하지 말라. 무사히 돌아와서 기쁘다. 모든 책임은 내가 지겠다”고 훈시했다. 마산공고 시위는 해산했으나 일부 학생들은 흩어져 각 학교로 시위를 선동하고 다녔다.
- 분류
- 시위 상황 / 마산 1960-4-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