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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경찰서 앞 충돌과 시위 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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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7시 40분쯤 400여 명의 또 다른 시위대는 남성동파출소를 급습했다. 경찰들은 시위대가 몰려오는 것을 보고 도주했다. 남성동파출소는 물론 시내 5개 파출소가 청년 및 학생들에게 점령당해 난장판이 되었다. 비슷한 시각, 500여 명의 시위대는 마산경찰서로 향했다. 시위대는 경찰서로 가는 도중 11일 밤 사망한 김영길의 시신을 안치해 둔 덕수의원에 투석해 유리창을 파괴했다. 시위대가 경찰서에 도착해 문 앞에 설치한 전등불을 파괴했다. 시위대는 경찰서에 투석했고 일부 과격한 청년들은 경찰서 마당에 서있던 소방차, 트럭, 지프 등을 끌어내 불을 지르기도 했다. 낮 시위는 질서정연하고 평화적이었지만 밤 시위시위대의 분노가 폭발해 격렬해졌다. 시위군중은 마산경찰서와 시청 앞, 남성동파출소에서 자산동 철교 밑 도로에 가득 차 있었다. 시위수는 2만 명가량으로 추산되었다. 학생들은 “교문경관 체포하라”, “협잡선거 다시 하라”는 구호를 외쳤고, 시민들도 학생들의 구호를 따라 외쳤다. 오후 8시가 넘어서자 창원군청과 도립병원에 있던 시위대 등이 마산경찰서 앞으로 속속 집결해 합류했다. 이들이 경찰서로 침입할 기세를 보이며 전진하면 경찰대는 이에 발맞추어 후퇴하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이미 경찰서 담 안에는 카빈총을 든 무장경관 150여 명이 대기하고 있었고 소방차 3대가 유사시를 대비해 시동을 걸어두고 있었다. 밤 9시 무렵, 시위대의 선봉대가 함성과 함께 돌팔매질을 하며 경찰서 정문으로 돌입했다. 경찰은 공포를 쏘며 대응했다. 경찰은 약 30분간에 걸쳐 공포를 쏘았고, 소방차도 시위대를 향해 물을 뿌렸다. 시위대는 50미터 가량 후퇴했다. 이 과정에서 경찰들과 몸싸움을 벌였던40여 명은 경찰에 연행되었고, 시위 주동대 이외의 시민들은 제각기 흩어졌다.『서울신문』1960. 4. 13 조3면 ;『마산일보』1960. 4. 14 2면 ;『조선일보』1960. 4. 13 조3면 ;『동아일보』1960.4. 13 석3면 ; 조화영 편, 57쪽 ; 안동일·홍기범 공저, 174-176쪽 ; 3·15의 거사 편찬위원회, 382-383쪽
한편 마산시청 앞에 집결해 있었던 군중들과 귀가 중이던 일부 시민들은 오후 9시 20분 경 시청 내로 침입했다. 시위대가 침입하자 시청 현관을 경비 중이던 5-6명의 경찰관들은 현장에서 피신했다. 시위대는 청사의 유리창을 비롯해 기물들을 파괴하고, 시청에 비치되어 있던 서류들을 꺼내 헤쳐 놓았다. 7-8명의 시민들은 지하실 쪽 세무과에 들어가 “마음대로 세금매기는 새끼들아!”라고 외치며 서류뭉치를 찢기도 했다. 이와 같은 소동에도 시청에서의 인명피해는 없었다『마산일보』1960. 4. 14 2면 ;『조선일보』1960. 4. 13 조3면 ;『동아일보』1960. 4. 13 석3면 ; 안동일·홍기범 공저, 176-177쪽
오후 11시 20분 무렵 시위대는 대부분 해산했다. 마산경찰서 골목에는 아직 군중들이 모여 있었고 그 밖의 곳곳에서 산발적인 함성이 들리는 정도였다. 시위대가 주로 외친 구호는 “뭉쳐라 뭉쳐라”, “무장경찰 나오지 말라”등이었다. 밤 시위에서 부녀자들은 “고문경관 체포하라”, “관력발동 하지 말라”고 외쳤고 “꽃잎처럼 떨어져간 전우야 잘가거라”라는 노래를 불렀다. 시위대의 해산만을 기다리고 있던 경찰은 무차별 검거에 나섰다. 도망치는 청년과 학생들은 곤봉으로 구타당하며 연행되었다.『서울신문』1960. 4. 13 조3면 ;『한국일보』1960. 4. 13 조3면 ;『동아일보』1960. 4. 13 석3면 ; 안동일·홍기범공저, 176-177쪽 ; 3·15의거사 편찬위원회, 383쪽
분류
시위 상황 / 마산 196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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