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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학생시위가 있기까지

4월 1일 신학기가 시작되었다. 이미 3·15부정선거마산 사건, 곳곳에서 발생하는 학생들의 시위로 전국의 학생들은 동요되고 있었다.
고려대학교학생대부분도마찬가지였다. 『고대신보』는 연달아 젊은이들의 봉기를 촉구하는 내용의 기사를 실었다. 『고대신보』의 사설 중 1960년 3월 26일자 “낡은 사회에 신선한 피를 수혈하라”와 4월 2일 자 “우리는 행동성이 결여된 기형적 지식인을 거부한다”는 많은 학생들의 입에 오르내렸다.『고대신문』축쇄판 2(1957년부터 1960년까지), 431. 435쪽4월 3일, 5개 단과대학 운영위원장들은 밤 7시 경 종로2가에 있는 수정모밀국수 집의 뒷방에 모여 사태를 논의하며 시위 문제를 토론하였다.
그러나 별다른 결론은 내리지 못했다.학생자치위원회 운영위원장들은 이후에도 여러 차례 모임을 갖고 시위에 대한 논의를 하였다고 한다. 학생회 간부들의 논의와 계획은 고려대학교 학생자치위원회가 쓴 「자유 정의 진리 되찾기 위해」에 자세하게 나와 있다(고려대학교학생자치위원회, 「자유 정의 진리 되찾기 위해」, 이강현 편, 『민주혁명의 발자취 : 전국각급학교 학생대표 수기』, 정음사, 1960, 123-132쪽).10일 경에는 밤사이에 캠퍼스 십여 군데에 각기 다른 필체와 문체로 학생들의 봉기를 촉구하는 벽보가 나붙었다.안동일·홍기범 공저, 『기적과 환상』, 영신문화사, 1960, 207-209쪽시위의 분위기가 이미 학생들 사이에서 무르익고 있었던 것이다. 학생들의 술렁거림을 눈치 챈 경찰은 사복 차림으로 연일 교내에 잠복하며 동태를 살폈다.조화영 편, 『사월혁명투쟁사 : 취재기자들이 본 사월혁명의 저류』, 국제출판사,1960, 76쪽 ; 안동일·홍기범 공저,207-209쪽
학생들 사이에는 암묵적으로 4월 16일 신입생 환영회를 기회로 하여 무슨 일인가가 벌어질 것이라는 암시가 오고갔다. 그러나 이를 알아 챈 학교 측에서는 16일의 신입생 환영회를 18일 오후 1시로 연기하였다.안동일·홍기범 공저, 208-209쪽 ; 조화영 편, 77쪽.
그러나 4·19 직후 작성된 다른 기록에는 학생회 간부들이 시위준비를 위해 학교 측과 협상하여 자진해서 신입생 환영회를 18일로 연기하였다고 서술하였다(고려대학교 학생자치위원회, 12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