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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대 일부, 이기붕 집 앞까지 육박

12시 경, 주류부대가 경무대를 향하고 있는 동안 성균관대학교 학생 3천여 명은 광화문을 분기점으로 서대문 이기붕의 집으로 향하였다. 성균관대는 원래 20일 시위를 계획하고 있었다. 그러나 19일 오전 각 대학들이 시위하는 것에 고무되어 오전 11시 석조본관 앞에서 “우리의 이 평화적인 시위는 어느 누구도 막을 수 없다. 우리는 불의에 항거하며 정의를 좇을 따름이다. 오직 민주대한의 번영을 위해 우리는 이제 나섰다”는 요지의 선언문을 낭독하고, “3·15선거는 사상 최대 최악의 선거였다”, “정·부통령 선거 다시 하라”, “학원에 자유를 달라”, “민족정기는 살아있다”는 등의 6개조문의 결의문을 낭독한 후 스크럼을 짜고 교문을 나섰다. 이들은 창경원(현 창경궁)을 지나 돈화문을 거쳐 종로통으로 들어서서 광화문에 이르렀다.
광화문 로터리에서 시위대는 잠시 멈추어 서서 국회의사당으로 가자는 의견과 경무대로 가자는 의견이 대립되었다. 잠시 후 시위대는 경무대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선두가 경기도청 앞에 이르렀을 때, 다른 학교의 시위대가 경무대 쪽으로 향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성균관대 시위대는 서대문 이기붕의 집으로 가기로 결의하고 방향을 바꾸었다.『주간성대』1960. 5. 4 1면 ; 안동일·홍기범 공저, 239-241쪽 ; 조화영편, 102쪽.
일부 기록에는 성균관대 시위학생들 일부가 경무대 쪽으로 계속 전진하여 경무대 앞 전차종점까지 나아간 것으로 되어있다(성균관대학교학생자치위원회, 「우리는 이렇게 싸웠다」, 이강현 편,189-199쪽). 다른 기록에는 성균관대학생들이 경무대 앞에서 시위한 사진을 발견하였다고 되어있다(홍영유, 『사월혁명통사』제5권, 271쪽). 이로 미루어 보아 성균관대의 주류는 서대문으로, 일부는 경무대로 향했던 것으로 보인다.
시위대가 서대문으로 향한 것에 대한일부 기록은 12시 30분 경 서울대생 약 1천 명이 광화문을 분기점으로 서대문으로 발걸음을 돌렸다고 한다(현역일선기자동인 편, 101쪽). 『동아일보』보도에 의하면 “약 2천 명”이 서대문으로 향하였다고 하였다(『동아일보』1960.4. 20 조1·3면, 석3면).
7명의 부상자가 발생한 성균관대 학생들은 이후 동대문 경찰서 앞, 을지로내무부 앞, 자유당 중앙당부 등에서 농성하다가 오후 5시 15분 경 경 전원 귀교하였다(『주간성대』1960. 5. 4 1면).
제2경무대라고 일컬어지던 이곳은 유충렬 시경국장의 진두지휘 아래 서대문서 경찰 53명으로 편성된 2개 기동경찰대와 성동서에서 증원된 기동경찰대 25명, 그리고 약 50명의 헌병들이 첩첩이 경비진을 치고 있었다.조화영 편, 102쪽.
4월 19일 이기붕의 집은 이들 경찰뿐아니라 4월 18일 고려대 시위대를 습격했던 깡패 일당인 유지광의 부하 40여 명도 함께 경비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조선일보』1960. 4. 25 조2면).

오후 12시 25분 경, 시위대는 이기붕의 집 약 5미터 앞까지 육박하였다. 시위대가 서대문으로 향하자 경찰은 이기붕 집 못미처 송월동 로터리에서 이들과 충돌하였다. 학생 일부가 경찰을 향해 돌을 던지자 대기 중에 있던 소방차가 붉은 물을 뿌렸다. 학생들이 벽돌로 응수하면서 속속 부상자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부상자는 적십자병원으로 운반되었다. 경찰은 병력을 집결하고 가끔 수 십 발씩 발사하였으나 시위대는 후퇴하지 않았다. 시위대의 선두는 태극기를 높이 흔들면서 애국가를 부르며 농성에 들어갔다. 약 600명은 노상에 주저앉고, 그 외 학생들은 서서 “이 의장은 국민 앞에 사과하라”고 외쳤다.『한국일보』1960. 4. 20 조2면.
시위대가 경찰이 충돌하는 사이 이기붕 일가는 자택 뒷문으로 빠져나가 지프차를 타고 탈출하였다. 이들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6군단으로 가서 이틀간 체류하고 21일 아침 9시 경에 돌아온 즉시경무대로 가 이승만을 방문하고 요담하였다(조화영 편, 332쪽).

오후 12시 40분 경, 신촌 방면에서 약 3천 명의 연세대와 홍익대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이들은 아현동 고개에서 약 20명의 경관들의 제지를 받았으나 계속 전진, 서대문에서 남대문 시경 앞을 통과한 다음 동화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 쪽에서 다른 학교 학생들과 합류하였다.『조선일보』1960. 4. 19 석1·3면 ;『동아일보』1960. 4. 20 조1·3면, 석3면이따금씩 중앙청 앞 시위대와 의사당 앞 시위대가 교체되기도하였다. 선두에 선 수 천 시위학생들이 광화문 쪽으로 되돌아오면 다시 의사당 쪽에서 나타난 5천- 6천 명의 대학생들과 중·고등학생들이 서대문 방향으로 몰려들었다.『조선일보』1960. 4. 19 석1·3면 ;『동아일보』1960. 4. 20 조1·3면, 석3면
오후 3시 경, 경찰들이 학생들을 연행하여 이기붕의 집 건너편 동양극장으로 끌고 가자 시위대는 석방을 요구하며 극장에 돌을 던졌다.이정길, 「경성전기공업고등학교 : 4·19데모 수기」, 사월혁명청사편찬회, 523-524쪽.
동양극장으로 끌려간 학생들은 심한 타박상을 입고 인사불성이 된 상태로 병원에 실려 갔고, 사망한 경우도 있었다
그로 인해 동양극장이 많이 파손되었다. 오후 4시 반 경, 서대문 일대는 완전히 교통이 차단되었고, 경찰관들의 발포소리만 요란하였다. 경찰이 발포를 계속하고 수 명의 사상자가 나오자 시위대는 오후4시 반쯤 완전히 철수하였다.
그러나 저녁 7시, 이기붕 집 앞과 충정로 일대에서는 경찰들이 통금시간에 쫓겨 집으로 돌아가는 군중 속에서 학생만을 골라 허리띠를 끌러 양 손을 묶고 곤봉이며 소총 개머리판으로 난타한 뒤 연행하였다.현역일선기자동인 편, 102쪽또한 지나가는 학생을 잡아 뒤에서 괴한이 삽으로 무참히 내리찍어 쓰러지면 쓰레기를 치우는 마차에 집어넣어 버리기도 하였다.이정길, 52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