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위대 일부, 이기붕 집 앞까지 육박
광화문 로터리에서
일부 기록에는 성균관대 시위학생들 일부가 경무대 쪽으로 계속 전진하여 경무대 앞 전차종점까지 나아간 것으로 되어있다(
7명의 부상자가 발생한 성균관대 학생들은 이후 동대문 경찰서 앞, 을지로내무부 앞, 자유당 중앙당부 등에서 농성하다가 오후 5시 15분 경 경 전원 귀교하였다(『주간성대』1960. 5. 4 1면).
4월 19일 이기붕의 집은 이들 경찰뿐아니라 4월 18일 고려대 시위대를 습격했던 깡패 일당인 유지광의 부하 40여 명도 함께 경비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조선일보』1960. 4. 25 조2면).
오후 12시 25분 경, 시위대는 이기붕의 집 약 5미터 앞까지 육박하였다. 시위대가 서대문으로 향하자 경찰은 이기붕 집 못미처 송월동 로터리에서 이들과 충돌하였다. 학생 일부가 경찰을 향해 돌을 던지자 대기 중에 있던 소방차가 붉은 물을 뿌렸다. 학생들이 벽돌로 응수하면서 속속 부상자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부상자는 적십자병원으로 운반되었다. 경찰은 병력을 집결하고 가끔 수 십 발씩 발사하였으나 시위대는 후퇴하지 않았다. 시위대의 선두는 태극기를 높이 흔들면서 애국가를 부르며 농성에 들어갔다. 약 600명은 노상에 주저앉고, 그 외 학생들은 서서 “이 의장은 국민 앞에 사과하라”고 외쳤다.
시위대가 경찰이 충돌하는 사이 이기붕 일가는 자택 뒷문으로 빠져나가 지프차를 타고 탈출하였다. 이들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6군단으로 가서 이틀간 체류하고 21일 아침 9시 경에 돌아온 즉시경무대로 가 이승만을 방문하고 요담하였다(조화영 편, 332쪽).
오후 12시 40분 경, 신촌 방면에서 약 3천 명의 연세대와 홍익대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이들은 아현동 고개에서 약 20명의 경관들의 제지를 받았으나 계속 전진, 서대문에서 남대문 시경 앞을 통과한 다음 동화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 쪽에서 다른 학교 학생들과 합류하였다.
오후 3시 경, 경찰들이 학생들을 연행하여 이기붕의 집 건너편 동양극장으로 끌고 가자 시위대는 석방을 요구하며 극장에 돌을 던졌다.
동양극장으로 끌려간 학생들은 심한 타박상을 입고 인사불성이 된 상태로 병원에 실려 갔고, 사망한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저녁 7시, 이기붕 집 앞과 충정로 일대에서는 경찰들이 통금시간에 쫓겨 집으로 돌아가는 군중 속에서 학생만을 골라 허리띠를 끌러 양 손을 묶고 곤봉이며 소총 개머리판으로 난타한 뒤 연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