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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부산·대구·광주·대전 등 5개 도시에 비상계엄령 선포

정부는 부정선거 규탄 학생시위가 전국에 확대됨에 따라 19일 오후, 국무원 공고82호로써 서울지구 일원에 경비계엄령을 오후 1시로 소급적용하여 선포하고, 치안유지를 군에게 위임하였다.당시 국방부장관이던 김정렬에 의하면 계엄령에 대한 이야기는 홍진기 내무부장관이 먼저 꺼냈고, 자신은 이에 반대했지만 30분 정도 후에 역시 계속 들어오는 상황보고를 접하고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아서 비상계엄령을 선포하는 것에 동의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대통령은 학생은 적이 아니라며 계엄령은 선포를 완강히 거절하다가 1시간여에 걸친 설득으로 마침내 승낙하였다고 한다. 이때가 오후 2시 반 정도 되었는데, 계엄령 선포를 오후 1시로 소급하여 적용하기로 한 이유는 오후 1시에 이미 경찰이 발포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김정렬, 235-238쪽). 비상계엄령은 대통령이 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가 발생했을 경우나 적과 교전상태에 있거나 사회질서가 극도로 혼란스러울때 선포할 수 있는 것이다.
김정렬은 비상계엄 선포 후 군대의 동원과 배치문제를 미8군과 상의하여 가평에 있는 15사단을 동원하기로 하였는데, 당시 8군사령관 매그루더 장군은 하와이 출장 중이었고, 김정렬은 부사령관인 에머슨 커밍스 중장과 상의하였다. 그는 또 비상계엄시 막강한 권력을 갖는 계엄사령관이 쿠데타를 일으킬 가능성을 우려해서 자신과 친분이 있는 제1야전군 사령관 유재흥 장군에게 2개 사단을 동원하여 중랑천에 주둔해 송요찬을 견제하게끔 하였다고 한다. 15사단은 이후 4개월 동안 서울에 주둔해 있었는데, 김정렬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사고가 발생하지 않은 것은 자신이 이렇게 미리 손을 써둔 덕분이라고 자찬하였다(김정렬, 240-245쪽).
오후 2시 50분에는비상계엄령으로 변경하였다. 계엄사령관에는 육군참모총장 송요찬 중장(42)이 임명되었다. 부사령관에는 장도영 중장, 부산지구 계엄사무소장에는 박정희 소장, 대구지구는 윤춘근 소장, 광주 지구는 박현수 소장, 대전지구는 임부택 소장이각각 임명되었다.현역일선기자동인 편, 169쪽.
이 내용은 포고문 3호에 발표된 것이다. 『동아일보』는 부산지구계엄사령관에는 박정희소장(군수기지사령관), 대구·광주·대전 등 3지구에는 장도영 중장(2군사령관)이 임명되었다고 보도하였다(『동아일보』1960. 4. 20 석1면).

정부는 이어 오후 4시 30분 부산·대구·광주·대전 등 4개 도시에도 경비계엄령을 추가 선포하고, 5시부터 비상계엄령으로 변경하였다.『서울신문』1960. 4. 20 1면 ;『동아일보』1960. 4. 20 석1면.
조선일보는 서울을 제외한 지역에 경비계엄이 내려진 시각을 오후 4시로 보도하였다(『조선일보』1960. 4. 20 조1면).
일부 기록에 의하면 국무위원들은 해가 저물기 전에 군대를 입경시킬 것이냐, 그렇지 않으면 어느 정도 가라앉는 것을 보고 밤에 입경시킬 것이냐를 놓고 의견이 분분하다가 신중론자의 의견이 채택되어 해가 밝은 동안에는 군인들의 모습을 일반시민에게 보이지않기로 하였다. 중앙청에서 이 모든 상황을 보며 계엄을 결정한 국무위원들은 전화를 통하여 가족들을 피신시키기에 바빴다고 한다(현역일선기자동인 편, 16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