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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부 장관 중앙청서 심야까지 대기

전국적인 혼란상태가 계속된 19일 오전, 경무대에서 열린 정례 국무회의에서 이 대통령홍진기 내무장관으로부터 고려대 학생들의 시위를비롯하여 전국 여러 도시에서 발생한 학생시위사건에 대한 보고를 듣고, 이를 조속히 수습할 수있는 대책을 세우도록 지시했다고 한다.「제1공화국 국무회의 :『신두영 비망록』에 비친 자유당 말기」1, 『경향신문』1990. 4. 193면 ;『조선일보』1960. 4. 19 석1면 ;『동아일보』1960. 4. 20 조1면.
『신두영 비망록』에 의하면 이 대통령은 이날 국무회의 자리에서 현 시국을 “난(亂) 중에있는 것 같다”고 규정하고, 해결책을 강구해 줄 것을 각료들에게 당부하였다. 그는 이어 “이 사람들이 학교를 움직여 때려 부수려고 하는 것 같으니 내가 나가달라고 하는 것 같다. 있을 수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는 “외부에서는 무어라고 말하고 있는가?”고 반문하였다. 경향신문은 이에 대해 “이 대통령은 (당시 이미) 일련의 시위사태의 본질적 원인이 3·15부정선거에 있고, 궁극적으로 자신의 퇴진을 겨냥하고 있다는 점을 간파하고 있었고, 따라서 자신의 거취문제에 대한 여론의 반응에 신경을 쓰고 있었음이 그의 발언 곳곳에 잘 나타나고 있다”고 서술하였다(『경향신문』, 1990. 4. 19 3면).
이 날 국무회의는 시위사태의 배후 조종문제만 따지고시국수습 문제는 진지한 토론에 붙여지지 못하였다.「제1공화국 국무회의 :『신두영 비망록』에 비친 자유당 말기」1,『경향신문』1990. 4. 193면.
『신두영 비망록』에 의하면 회의에서 홍진기 내무장관 등 국무위원들은 시위사태가 장면등 민주당 신파에 의해 조종되고 있다고 이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마산사태는 민주당의 선동과 공산당의 조종에 의한 것이라고 몰아붙였다
정무장관들은 국무회의가 끝난 후 중앙청으로 돌아가 심야에 이르기까지 중앙청 회의실에 모여 사태의 추이에 관한 보고를 수시로 받았다.국무위원들이 4월 19일 당시 사태의 심각성을 알게 된 것은 시위대가 중앙청 쪽으로 몰려든, 정오가 거의 다 된 시각이었다고 한다(김정렬, 234쪽). 그러나 홍진기 내무, 김정렬 국방, 최재유 문교 등 3장관은 회의가 끝난 뒤에도 밤늦게까지 경무대에 머물러 있었다.홍진기 내무와 최재유 문교, 김정렬국방장관이 국무회의가 끝나고도 남아있었던 이유는 각자 대통령에게 결재를 받을 일이 있어서였다고 한다(김정렬, 234쪽). 시위진압을 위한 경찰배치와 병력동원은 비상계엄령이 선포된 다음 경무대와 중앙청 국무회의실에 모인 장관들의 결정을 거쳐 계엄사령부에 의하여 집행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오후 9시 경, 중앙청에서는 장관들이 일괄사표를 제출했다는 설과 이기붕 국회의장 이 당선된 부통령직을 사퇴하겠다고 선언했다는 풍문이 돌았다. 최치환 공보실장은 이것을 모두 부인하지는 않았지만 “말할 수 없다”고 하고,“ 이번 사태에 대해서 공식적인 성명을 준비 중에 있다”고 하였다.『동아일보』1960. 4. 20 석3면 ;『조선일보』1960. 4. 20 석1면 ; 현역일선기자동인 편, 162-16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