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바로가기주메뉴 바로가기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로고

개요

  • 공유하기
4월 19일의 대규모 유혈사태 이후 비상계엄이 선포된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대전 등 대도시에서는 큰 시위가 일어나지 못하였다. 그러나 4월 25일 오후, 서울에서는 주저앉으려는 정국을 다시 깨우는 교수단의 시위가 있었고, 또다시 대규모 시위의발생을 유도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오후 3시, 동숭동 서울대학교 교수회관에 모인 258명의 대학교수들은 “각 대학교수단 - 학생의 피에 보답하자”라고 쓴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들은 시위 시작 전 14개 항의 시국선언을 채택, 낭독하고 오후 5시 45분 교문을 나와 종로, 을지로 입구, 미국대사관 앞을 거쳐 국회의사당 앞까지 행진하였다. 교수들은 국회의사당 앞에 당도하여 시국선언문을 다시 낭독하는 것으로 시위를 마쳤다.
이를 본 시민과 학생들은 이 대열에 합세하였고, 교수단이 해산한 후에도 세종로 로터리에 집결, 각종 구호를 외치며 또다시 궐기하였다. 교수단의 시위로 커다란 자극을 받은 시민들은 “부정선거의 원흉을 잡아내라!”, “형제들의 피의 대가를 찾자!”고 소리를 높였다. 4·19 이후 사회 안정을 위해 애쓰던 군에서는 처음으로 탱크 3대와 약 1개 대대로 추측되는 무장병력을 국회의사당 앞에 배치하였다. 그러나 군중들은 “국군 만세!”를 외치며 이들을 환영하였다. 군은 발포하지 않았으나 이기붕 집과 해무청 앞, 종로5가에서 발포가 있어 또다시 유혈참사가 발생하였다.
이날 대학교수단의 시위는 자유당정권을 완전히 붕괴시키고 새 역사를 여는 결정적인 모멘트가 되었다.
지방에서는 춘천진주, 마산, 김해, 남원 등지에서 시위가 있었다. 춘천진주에서는 시장과 도지사로부터 사퇴약속을 받아냈다. 마산에서는 할머니들이 “죽은 학생 책임지고 리 대통령 물러가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하였다.
분류
시위 상황 1960-4-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