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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수들의 시위 준비과정

4월 20일, 평소 자유당의 노골적인 불법, 부정, 횡포에 대해 강한 불만을 가지고 있던 고려대학교이상은 대학원장과 조용만·이종우 교수 등은 4월 19일의 학생시위를 보고 “교수들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않겠나”하는 생각을 공유하였다. 이들은 자연스럽게 모임을 갖고 첫째, 학생들이 피를 흘리고 있는 이때에 우리 교수들이 가만히 좌시할수 없지 않느냐 둘째, 독재정권에 항거하여 궐기한 이 의거를 공산당의 조종이니, 야당의 사주니 하고 왜곡하고 탄압하는 것에 분개하지 않을 수 없다 셋째, 모처럼 일으킨 의거의 정열이 계엄령 하의 질사회복과 사태의 평정으로 냉각되면 다시 재연되기 힘들므로 그 열기가 식기 전에 독재정권 타도의 목표까지 운동을 이끌어 가야 한다는 의견에 공감하였다.
21일, 정재각 교수(고려대)도 이들과 의견을 함께 하고 뜻 맞는 사람들을 좀 더 모으기로 합의하였다.
22일 오전, 이상은 교수가 연세대학교정석해 문과대학장, 조의설 교수 등과 만나 의사를 타진하고, 정재각, 김경탁, 손명현(이상 고려대), 최재희(서울대) 교수들과도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오후 1시, 이상은, 정석해, 이종우(고려대), 조의설(연세대), 최재희 교수가 서울대학교 교수회관에서 모임을 갖고 구체적인 문제를 의논하였다. 이들은 “학생들이 부정과 불의를 참다못해 일어서 싸웠는데 교수들이 이렇게 가만히 있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며 교수들이 각 대학별로 성명을 할 것인지 공동명의로 성명을할 것인지를 논의하였다. 그러나 계엄령 하에서의 집회가 불가능하고 언론이 통제되므로 좀 더 사태를 관망하기로 하였다.
23일 오후, 이상은 교수는 오전에 있었던 각 대학 총장회의에서 ①데모에 가담한 혐의로 구속된 학생을 관대히 처벌할 것, ②계엄령을 해제하고 하루 빨리 개학하도록 관계요로에 건의할 것과, ③위문금 모집, 위문단 파견, 27일 개학을 결의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시국에 대한 논의가 없었던 것에 실망하고 분개하였다.“ 중국5·4운동처럼중국5·4운동은 1919년 베이징의 대학생을 중심으로 일어난 반제국주의·반봉건주의 혁명이다. 학생운동이 혁명운동으로 발전한 정치운동이었으며, 교수와 학생이 합작한 지식계급의 운동이었다.우리 학생들의 흘린 피가 보람 있으려면 역시 교수들이 뒷받침해 주지 않으면 안 되리라”는 생각을 한 이상은 교수는 이종우, 정석해 교수와 만났다. 그들은 “이번 일(4·19학생시위)이 성공하지 못하면 앞으로 학원에 대한 자유당과 경찰의 보복이 더 심해질 것을 우려”하며, 교수들이 일어나야 하는 필연성에 공감하였다. 이들은 또한 당시 외국여론이 한국의 반정부 시위에 매우 유리하게 되어가고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었다. 미국의 허터 국무장관도 처음에는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강경한 태도를 비난하더니차차 시위를 지지하는 쪽으로 바뀌고 있고, 영국의 여론도 그러하므로, 이런 때 우리국민이 좀 더 적극적으로 반대의사를 보이면 성과가 있을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그 방법론을 고민하던 교수들은 각 대학별 단독행동보다는 대규모 교수연합대회 방향으로 추진할 것을 합의하였다.
24일, 이승만 대통령이 사태 수습을 위해 자유당 총재직을 사퇴하며 이기붕을 의장직에서 사퇴시킬 것이라는 기사가 보도되었다. 오후 1시 쯤 이종우 교수 자택에서 이상은, 김경탁, 정재각, 김성식(이상 고려대), 최재희(서울대), 조윤제(성균관대) 교수등 7인이 모였다. 같은 시각 이정규(전 청주대학장)교수 자택에서도 이항녕, 변희용, 박희성, 손명현(이상 고려대), 김영달(동국대) 교수들이 모여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논의하고 있었다. 늦은 시각, 이들 중 이항녕 교수가 대표로 이종우 교수 자택으로 와 8명이 모임을 계속하였는데, 이들은 거듭된 논의 끝에 다음날인 25일 오후 3시 서울대교수회관에서 대학교수들의 대회를 갖고 시국성명서를 발표하자는데 의견의 일치를보았다.거사일을 바로 다음날인 25일로 잡은 것은 이 모임 자체가 시급을 요하는 성질의 것인데다 매달 25일은 국립대의 봉급일이므로 연락이 편하고 많은 인원을 확보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었다(이상은, 214쪽).
교수단은 계엄령 하에서 대중집회를 열게 되면 문제가 될 것을 우려하여 신문기자를 통해 미리 계엄당국에 양해를 구해놓았다. 또한 다음날 있을 집회를 국내외 기자들에게 미리 알려주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4월 24일 한 고려대 교수가 미국대사관 관리들과 접촉하여 교수들이 25일시위를 할 예정이라고 알리기로 하였다. 이 교수는 교수단 시위가 대중적 저항에 리더쉽을 부여할 뿐만이 아니라, 3·15 선거에 대한 시정조치를 명확하게 제시하고, 이승만 사퇴를 요구할 것이라고 하였다.주한미국대사관이 국무부에 보낸 전문, 전문번호 967? 1960. 4. 25. 795B.00, Central Decimal Files, RG59.이러한 사실을 전한 교수의 실명은 원자료인 대사관 전문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성명서 내용은 “학생들의 참살(慘殺)에 대해 교육자로서의 동정적 태도를 표명하는 것으로 그칠 것인가? 아니면 사태발생의 주요원인인 3·15부정선거를 부인하고 발본색원적인 정치문제에까지 태도표명을 할 것인가?”로 의견이 분분하다가 결정을 보지 못하였다. 이에 그동안 토론된 사항을 정리하여 이상은 교수가 초안을 잡기로 하였다.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一. 우리는 4·19학생시위를 적극 지지한다.
一. 누적된 부패와 부정의 총책임을 지고 현 집권세력은 즉시 물러가라.
一. 3·15 부정선거를 조작한 자와 학생 살상자는 즉시 체포, 처단하라.
一. 구금된 학생은 무조건 즉시 석방하라.
一. 관권과 결탁하여 부정축재한 자는 적발, 처단하라.
一. 학원의 절대 자유를 보장하라.
一. 곡학아세(曲學阿世)하는 사이비 학자를 배격한다.
一. 정치도구화한 소위 문화인, 예술인을 배격한다.성명서 발표를 위한 대회명칭에 대해서도 설전이 있었으나 이 자리에서 결정하지 못하였다. 또한 문안작성자를 정하는 문제에 있어서도 아무도 맡으려 하지 않았는데, 이에 대해 이상은은 어찌 보면겸양이라 할 수도 있고, 어찌 보면 책임의 회피 같기도 하며, 또 어찌 보면 각자 발표내용에 대하여 확실한 견해가 서있지 않아 그런 것 같다고 하였다. ‘대학교수단’이라는 명칭은 이상은 교수가 작성한 ‘시국선언(초안)’에 처음으로 등장하고 있다(이상은, 216-21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