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횃불 올린 교수단, “정·부통령 선거 다시 하라”절규

다음날인 25일 아침 9시 반, 간밤에 혼자서 ‘시국선언’이라는 이름으로 성명서 초안을 작성한 이상은 교수는 정석해 교수를 만나러 연세대로 갔다.이상은, 219쪽.
성명서에 ‘시국선언’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이상은 교수가 시국선언문 초안을 작성하면서 임의로 정한 것이라고 한다.일부 기록에는 이와 다르게 “시국선언문의 원본은 고려대이상은, 김경돈 양교수가 중심이 되어 명륜동 부근에 살고있는 교수들이 수일 전부터 기초하기에 이른 것이라 한다”고 하였다(안동일·기범 공저, 『기적과 환상』, 영신문화사, 1960, 277-278쪽).
어제의 경과를 이야기하고 오늘 대회에 의장이 되어달라는 부탁을 하기 위해서였다. 초안을 본 정석해 교수는 전적으로 찬동하면서, 재선거 실시에 대한 내용이 빠졌다며 즉석에서 추가하였다. 이상은 교수가 연세대 교수들의 더 많은 참여를 부탁하자 정석해 교수는 “(연세대에서는) 오늘 4시에 학교 단독성명을 내기 위한 교수회의가 있어 (자신은 나오겠지만)다른 교수들은 나오지 못할 것 같다”고 하였다.이상은 교수는 이때 깜박 잊고 연세대에 시국선언문 초안을 두고 왔다고 한다(이상은, 222쪽).
오후 2시 반, 이종우, 이상은 교수는 이미 서울대 의대 구내 교수회관에 와 있었고, 정석해 교수도 연세대 백낙준 총장을 비롯하여 교수들 수 십 명이 선언문에 사인한 서명부를 가지고 왔다.4월 25일 오전 10시 경에는 민병기 교수가 외국기자들을 위해 선언문을 번역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이상은 교수가 초안을 다시 써주었으나 번역하지 못하였다. 이때까지도 교수들의 계획은 비밀에 붙여진 상태였다. 그러나 연세대의 정석해 교수가 이미 선언문을 고쳐 베껴서 서명부 앞에 붙이고 사인을 받았고, 회의 시작 전 회장 입구 접수처에서 어느 신문기자가 가지고 가 버려, 이미 발표되기 전에 누출이 된 상태였다(이상은, 224쪽). 이에 대해 다른 기록에 따르면 “정석해 교수는 이날 아침 이미 연세대 교수회의에서 4·19 학생의거를지지하는 결의문을 채택하고 백낙준 총장을 비롯한 전 교수의 서명날인을 받아둔 상태였다”고 한다(조화영 편, 144-145쪽).
오후 3시, 서울대 교수회관에는 300여 명의 교수들이 모여들었으며, 이중 258명의 참석자로부터 서명을 받았다. 국내신문사에서는 불과 2-3사의 기자만 왔을 뿐이나, 마침 한국에 체류하고 있던 외국 특파원들은 20여 명이 몰려들어 바쁘게 취재활동을 전개하였다.당시 모임을 주도한 입장에서는 50-60명만 모여도 성공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조화영 편, 146쪽).3시 30분 경 회의가 시작되자 이종우 교수는 개회사에서 4·19사태에 대한 교수들의 태도 표명과 이 사태를 일으키게 한 정치적 원인에 대한 규탄을 행동으로 취할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이 대회의 목적과 취지를 설명하였다. 다음으로는 예정대로 정석해 교수를 의장으로 추대하였다. 그리고 미리 작정된 회순에 따라 토의가 시작되었다. 교수들은 이상은 교수가 작성한 시국선언문 초안을 놓고 2시간 반 동안 논의를 거듭하였다. 이날 회의 도중 여러 교수들은 학생들이 먼저 피를 흘렸다는 사실을 들어 자책하는 발언을 하였고, 심지어는 선언문 속에 자책의 문구를 넣자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결국 회의는 뒤늦게나마 “학생들이 흘린 피에 보답하기 위해선 우선 궐기하고, 자책과 반성은 강당에 서서 학생들 앞에서 직접 하자”는 결론을 얻었다.『동아일보』1960. 4. 26 석1면.
이 날 교수회의에 각 대학 총장급은 참석지 않았으며, “여당의 정책자문위원이 되었던 총장들을 규탄하라”는 말도 나왔고, 그 중에는 “땅에 떨어진 교권을 차제에 다시 찾자”느니, “대학교수뿐 아닌 중·고등학교, 그리고 초등학교 교사 등 전 교직자들의 권익을 전취해야 한다”는 의견을 말하기도 하였으나 구체적인 결론은 없었다.
그리하여 ‘9인 기초위원’이란 이름으로 9개 대학에서 각각 한 사람씩 뽑아 10분 내로 초안을 수정하기로 결의하였다. 이에 따라 이항녕(고려대)·김증한(서울법대)·권오돈(연세대)·이종극(중앙대)·김영달(동국대)·조윤제(성균관대)·유진(외국어대)·이종우(고려대)·이희승(서울대 문리대) 등 9명의 교수들이 기초위원으로 뽑혀 별실에 모여 시국선언문 초안의 문구를 약간 수정하였다.이상은, 224쪽.
몇몇 기록에는 이들 ‘9인 기초위원’의명단이 다르게 나와 있는데, 이항녕과 권오돈, 유진 교수 대신 정석해, 이정규, 한태수 교수가 들어가 있다(조화영편, 148쪽 ; 김재희 편, 『청춘의혈 : 역사를 창조한 젊은 사자들』, 호남출판사, 1960, 109쪽 ; 안동일·홍기범 공저,277쪽). 여기서는 교수단 시위의 주요멤버였던 이상은의 글을 존중하여 서술하였다.
이들은 전문 문구의 약간과, 제4조에서 “현 정부와 집권당”이란 표현은 “대통령을 위시한 여야 국회의원 및 대법관 등”으로 바꾸었다. 제8조 “깡패를 철저히 색출 처단하고, 그 전국적 조직을 분쇄하라”는 부분은 삭제하였다. 제12·13조는 병합하였다. 수정된 시국선언문은 임시서기인 이항녕 교수에 의해 보고되었고, 이는 박수로써 만장일치로 채택되었다.
오후 5시 35분, 통금시간이 1시간 반도 남지 않게 되자 김영달 교수는 긴급동의를 요청하고 “폐회하는 대로 데모를 합시다”하고 외쳤다. 시위 제의가 나오자 회장 내 공기는 별안간 긴장하였다. 즉시로 찬성론과 반대론이 대두되었다. 그러자 의장인 정석해 교수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열렬한 찬성발언을 한바탕 하고 교수들에게 가부를 물었다. 찬성하는 사람은 과반수 남짓 되었지만, 반대의견을 표명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의장은 곧 가결을 선언하였다. 그러자 회장을 빠져나가는 사람이 몇 있었다. 의장이 이들에게 “전원일치의 행동을 하자”며 요구하였다.
오후 5시 50분 경, 대학교수단은 거리에 나서기 전 동숭동의 서울대학교 교수회관 앞에서 시국선언문을 소리 높여 낭독하였다.조화영 편, 149-150쪽 그리고 백발이 성성한 변희용(성균관대, 65), 권오돈(연세대, 65)교수가 『고대신보』의 오주환 주간이 마련해온 “각 대학 교수단”이란 글씨 밑에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고 쓴 플래카드를 들고 선두에 섰다.“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는 글씨는 당시 성균관대 교수인 청명 임창순 선생이썼다. 이상은 교수는 “재경(在京) 각 대학교수단”이라고 썼다고 하는데, 당시교수단 시위 사진의 플래카드에는 “재경”은 보이지 않고 “각 대학 교수단”이라는 글자만 보인다(이상은, 226쪽).
일부 기록에서는 “고대생 10여 명이 미리 준비한 플래카드를 제공”하였다고 한다(안동일·홍기범 공저, 280쪽).
그 뒤를 이종우, 이항녕, 정석해, 임창순(성균관대) 교수가 태극기를 펼쳐들고 뒤따랐다. 이들은 4열종대로 질서정연하게 출발하였다.안동일·홍기범 공저, 280쪽 ; 김재희편, 108쪽
각 대학 교수단 시국선언문 이번 4·19의거는 이 나라 정치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중대한 계기이다. 이에 대한 철저한 규정 없이는 이 민족의 불행한 운명을 도저히 만회할 길이 없다. 이 비상시국에 대처하여 우리는 이제 전국대학교수들의 양심에 호소하여 다음과 같이 우리의 소신을 선언한다.

1. 마산·서울·기타 각지의 학생 데모는 주권을 빼앗긴 국민의 울분을 대신하여 궐기한 학생들의 순진한 정의감의 발로이며, 부정과 불의에는 항거하는 민족정기의 표현이다.
2. 이 데모를 공산당의 조종이나 야당의 사주로 보는 것은 고의의 곡해이며, 학생들의 정의감의 모독이다.
3. 평화적이요 합법적인 학생데모에 총탄과 폭력을 기탄없이 남용하여 대량의 유혈참극을 빚어낸 경찰은 민주와 자유를 기본으로 한 국립경찰이 아니라 불법과 폭력으로 정권을 유지하려는 일부 정치집단의 사병이다.
4. 누적된 부패와 부정과 횡포로써의 민족적 대 참극, 대 치욕을 초래케 한 대통령을 위시하여 국회의원 및 대법관 등은 그 책임을 지고 물러나지 않으면 국민과 학생들의 분노는 가라앉기 힘들 것이다.
5. 3·15선거는 불법선거이다. 공명선거에 의하여 정·부통령선거를 다시 실시하라.
6. 3·15부정선거를 조작한 주모자들은 중형에 처해야 한다.
7. 학생살상의 만행을 위에서 명령한 자 및 직접 하수자는 즉시 체포 처결하라.
8. 모든 구속학생은 무조건 석방하라. 그들 중에 파괴 또는 폭행자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동료피살에 흥분된 비정상상태 하의 행동이요, 폭행 또는 파괴가 그 본의가 아닌 까닭이다.
9. 정치적 입지를 이용 또는 권력과 결탁하여 부정축재한 자는 관·군·민을 막론하고 가차없이 적발, 처단하여 국가기강을 세우라.
10. 경찰은 학원의 자유를 보장하라.
11. 학원의 정치도구화를 배격한다.
12. 곡학아세(曲學阿世)하는 사이비 학자와 정치도구화 하는 소위 문인·예술인을 배격한다.
13. 학생 제군은 38선 너머 호시탐탐하는 공산괴뢰들이 군들의 의거를 선전에 이용하고 있음을 경계하라. 그리고 이남에서도 반공의 이름을 도용하던 방식으로 군들의 피의 효과를 정치적으로 악이용하려는 불순분자가 있음을 조심하라.
14. 시국의 중대성을 인식하고 국가의 장래를 염려하여 학생들은 흥분을 진정하고 이성을 지켜 속히 학업의 본분으로 돌아오라.
단기 4293년 4월 25일
대학교수단
출처 :『조선일보』1960. 4. 26 조3면 ; 현역일선기자동인 편, 『사월혁명 : 학도의 피와 승리의 기록』, 1960,112-114쪽 ; 안동일·홍기범 공저, 『기적과 환상』, 영신문화사, 1960, 278-279쪽
대학교수단의 플래카드가 서울대 의대 교문을 나서자 국내외 사진기자 수 십 명이 매달린 각 신문사의 보도차가 10여 대나 앞장서서 달렸다. “이승만 정권은 물러가라”,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는 4월 19일에는 들어보지 못한 색다른 구호를 외치며 시위하는 동안 육군 특무부대의 지프차 한 대만이 이들을 지켜보았다. 구호를 소리 높이 외치며 종로5가에 나선 것이 오후 6시 5분 경, 양쪽 인도에 걸어가던 시민들은 대학교수단의 시위에 환성과 박수를 보내고, 특히 학생들은 스승들의 궐기에 눈물을 흘리며 만세를 부르고 박수를 보냈다. 종로 5가에 있는 4·19 부상자가 입원해 있는 반도병원 2층 입원실에서는 부상자들이 얼굴에 붕대를 감은 모습 그대로 만세를 부르기도 하였다.『동아일보』1960. 4. 26 석3면 ;『조선일보』1960. 4. 26 조3면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보는 이 대학교수들의 시위에 길 가던 수 천 시민들은 열광적인 박수를 보냈다. 시위대 양편에는 어느새 수 백, 수 천 명의 학생들이 구호를 복창했고, 보도에서는 박수소리가 그치지 않았다.조화영 편, 151-15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