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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 군중 대표, 대통령 사퇴 성명 발표 전 이승만 면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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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아침 9시, 송요찬 계엄사령관경무대이승만 대통령을 방문하였다. 송 사령관은 그 자리에서 약 50분 동안 사태 수습책을 솔직히 말하였고, 시위대표자들과의 면담도 부탁하였다. 오랫동안 듣고 있던 대통령은 이를 수락하였다. 그래서 서울시내 공설운동장 앞에서 시위를 하다 선출된 각계 대표 14명은 계엄사령관을 만나려고 육군부대에 갔다가 조재미, 이석봉 두 준장의 안내로 오전 10시 10분 경 경무대에서 송사령관과 만났다. 송 사령관은 그들의 요구가 무엇인가를 자세히 듣고 그중 5명만을 추려서 대통령과 만나게 했다.현역일선기자동인 편, 200쪽.
시위군중 대표들이 이날 아침 이 대통령을 만난 사실은 분명한데, 모두 몇 명이며, 그들이 어떻게 선택되었고,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확실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민간인 대표로 경무대에 들어간 사람 중 하나로 알려진 유일라는 자신의 수기에서 군중 대표 14명 중 자신이 3명을 추려 민간인 3명과 학생 1명, 모두 4명이 대통령을 만났다고 한다. 또한 대통령을 만나기 전 송 장군이 “각하를 뵈오면 무슨 말을 할 것인가?”하고 물었을 때 “그건 여기서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각하와 직접 만나야 할 이야기들이니까요”했다고 한다(유일라, 「나는 대통령을 만나 하야를 권고했다」, 『실화』1960. 6월호, 84쪽).
•동아일보는 “시내 공설운동장 앞에서 시위를 하던 군중대표 5명”이라 하였고, 이들 중 유일라(25, 노동)와 김기일(34, 독학생)의 증언을 보도하였다(『동아일보』1960. 4. 27 조3면).
•조선일보는 “시위학생 대표로 선발된 건국대 학생 한규철, 경희대 김효영 및 시민대표 구경석등 3씨는 … 경무대로 이 대통령을 방문하고”라고 하였다(『조선일보』1960. 4. 26 석1면).
•몇 몇 기록에서는 “계엄사령관을 만나려고 육군부대에 갔던 일반인· 대학생·고등학생 대표 14명인데 그 중 대통령을 만난 다섯 사람 중, 선용, 한규철, 유일라, 김기일 만이 알려졌을 뿐 나머지 한 사람은 알려지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한국일보』1960. 4. 26 석3면 ; 현역일선기자동인 편, 200쪽).
•반면 일부 기록은 “이날 대통령을 만난 사람은 김선봉, 한규철, 유일라, 김기일, 이성화 등 다섯”이라고 하였다(현역일선기자동인 편, 144쪽).

이들이 대통령과의 면담을 기다리는 동안 중앙청 앞에서 요란한 총소리가 났다. 대표들은 울면서 “우리 학우가 죽어간다”고 송사령관에게 매달렸다. 송 사령관은 태연한 표정으로 “공포니 안심하라”고 하면서 대통령과의 면담을 주선하였다.현역일선기자동인 편, 142-144쪽
대표들은 이 대통령을 경무대 본관 남쪽정원에서 약 10분간 면담하였다. 허정과 호위 2명을 대동하고 대표를 기다리고 있던 대통령의 표정은 침울하고도 심각하였다.유일라에 의하면 대표 4명은 처음에 경무대 응접실로 안내되었다가 송요찬 계엄사령관의 안내로 정원에 가 이 대통령을 만났는데, 그 자리에는 허정과 곽영주가 있었다고 한다(유일라, 84쪽).
“저 국민의 아우성이 들리십니까?”대표들이 묻자 대통령은 “듣고 있다”고 조용히 말하였다.“ 지금의 사태를 수습하려면 하야하는 것이 좋겠다”는 말에 한참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국민이 나가라고 하면 나가겠다”고 굳은 결의 속에 똑똑히 말하였다. 이어서 대통령은 “선거에 잘못이 있다는 것을 어제 그제야 비로소 그 내용을 알았다”고 말하고 그 자리에서 재선거를 약속하였다.“ 최인규, 한희석 등 부정선거의 책임자를 어떻게 하겠는가”라는 질문에는 “엄벌하겠다”고 말하고, 국민이 원한다면 내각책임제로 고칠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기붕에 대한 복안을 묻는 말에는 “내가 후사의 한 사람으로 길러왔으나 잘못된 점이 있다면 고치겠다”고 말하였다.『동아일보』1960. 4. 27 조3면 ; 현역일선기자동인 편, 142-144쪽.
•유일라의 증언에 의하면 시민대표들은 “각하께서 하야하셔야 됩니다”에 이어 “이기붕 의장을 어떻게 생각합니까?”“이정재, 임화수 같은 깡패를 정치적 앞재비로 이용하는 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하고 물어보았으며, “이 대통령은 대표들이 보는 앞에서 (하야) 방송 녹음을 했다”고 하였다(유일라, 84-85쪽).
•한국일보는 “대표들은 이 자리에서 이 대통령의 사임, 3·15선거의 무효, 내각책임제의 실시, 이기붕에 대한 일절 공직에서의 추방 등 4개 안을 건의하였고, 대통령은 즉석에서 이를 승낙하였다. 대표들은 감격의 울음을 터뜨렸다”고 한다고 보도하였다(『한국일보』1960. 4. 26 석3면).
•조선일보는 “…대표일행은 ①3·15선거는 부정선거다, ②이 대통령은 하야할 것, ③악정자는 지체 없이 처단할 것, ④치안을 빨리 확보할 것, ⑤학생들에게 빨리 교문을 열어줄 것 등을 요구하였다 한다”고 보도하였다(『조선일보』1960. 4. 26 석1면).
•허정은 그의 회고록에서 “이때는 아직 하야성명이 발표되기 전이었다. 그런데 한 청년이 당돌하게도 대통령에게 “대통령께서 하야하신다는 것이 사실입니까?”하고 하야의 진부를 캐물었다. 또 어떤 청년은 “하야하신다면 누구에게 정권을 넘기시겠습니까?”라고 물었다. 심지어 한 청년은 “저희들 생각으로는 송장군에게 정권을 인계하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라고 말도 되지 않는 발언을 하기도했다”고 기록하였다(허정, 『허정회고록: 내일을 위한 증언』, 샘터사, 1979, 219-220쪽).

대표들은 경무대를 나오면서 “여·야 정객은 모두 믿을 수 없으니 군정을 포고해 달라”고 요청하였는데, 이 자리에서 송 사령관은 “헌법을 존중하고 정치체제 밑에서 질서를 바로잡겠다”고 하면서 “군정은 절대로 안될 말”이라고 했다고 한다.『한국일보』1960. 4. 26 석1면.
•당시 동아일보 기자 최원각의 글에서도 “(대표들이) 경무대를 나오면서 송 중장을 잡고 “우리는 이제 모든 것을 믿을 수 없습니다. 자유당도, 민주당도. 오직 계엄사령관 한사람만을 믿으니 현재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하여 당분간 군정을 실시해 주십시요”라고 말하였다. 이에 대하여 그는 “군정이라는 것은 민주주의를 이 땅에서 말살한다”고 잘라서 말하며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고하였다(최원각, 「송요찬론」, 『세계』제2권 6호, 국제문화연구소, 1960. 6, 176-178쪽).
•당시 발행된 『육군연감』에도 “송 사령관은 데모대와 정부, 다시 말하면 국민과 대통령 사이에 끼어 무척 고심했던 것 같으며, 또한 사태의 수습을 위해 그가 취한 액션이 하나의 국가 반란죄에 가까운 오해를 초래할까봐 세심한 주의를 한 흔적이 역력하다”고 기술하였다. 또한 “(송 사령관은) 이번 사태를 통하여 군대가 어떠한 경우에 있어서도 정치에 개입해서는 안 되며, 또한 국민과 더불어 있다는 전통을 확립하였다는데 대해 보다 더 군인으로서의 보람을 느낀다”고 하였다(육군본부군사감실 편, 『육군연감』4293년판, 41쪽).

대통령에게 이와 같은 다짐을 받은 대표들은 바로 뛰어나와 육군본부에서 마련해준 선전차로 면담내용을 가두방송 하면서 시위의 진정을 호소하였다.현역일선기자동인 편, 142-144쪽 ; 『한국일보』1960. 4. 26 석3면.
유일라의 증언에 의하면 이 대통령은 미국대사를 5분간이나 기다리게 하고 대표들의 말을 들어주었으며, 대표들은 이 대통령이 참으로 애국자라는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유일라, 85쪽).
분류
시위 상황 / 서울 1960-4-26